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여타수록작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김민재
1.
주디스 허먼의 책을 다 읽는 데는 2주가 넘게 걸렸다. 꾸준히 봤지만 의외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글 자체가 재미없는 게 아니었다. 다만 매 번 읽고 난 순간 마다, 너무 힘이 들었다.
몇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온갖 망상이 머리를 지배한다. 나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그런 감정들이 단어로 적혀있다. 그/녀들은 껍데기가 없고 속이 흐물거리면서 자기를 잃는다. 생존자들은 가끔 자신이 구역질나는 검은 점액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 걸 어줍잖게 상상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나의 머리는 길을 잃고, 잠시 혼란스러워졌다가 이내 책장을 덮게 된다.
2.
지금까지 완전히 어둠 속에 가려졌던 '외상후 장애'는 불과 몇 십 년 전부터 제대로 된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네는 잊혀지고, 프로이트는 침묵한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피해자들이 피해자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공포와 통제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녀들은 다양한 심리적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기억을 잊으려하거나, 학대가 아니었다고 축소시키거나, 합리화(자신이 악하기 때문에 처벌받는다고 생각하는 등의 일.)한다. 긴 학대의 기간을 거친 사람은 이러한 증상이 더욱 복합적으로 드러나며 자기가 악하다고 생각하고,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과 본래의 모습이 다르다고 여기며(자기에 대한 상이 통합되지 않음.), 관계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지나치게 모욕한다. 심지어는 통제받는 신체에 대한 자해를 통해서 자신의 심리적 고통을 잊고 자기를 보호하려 한다.
이런 일들은 공포의 순간에는 훌륭하게 자신을 방어하지만 일상에 복귀했을 때 큰 문제를 낳는다. 극단을 치닫는 감정들이 순간순간을 지배한다. 극단적인 분노를 일으킨 뒤에, 자기가 악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더욱 강하게 증명되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녀는 더 깊은 자기 부정에 빠진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는 더욱 고립된다.
한동안은 이 피해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다. 더욱 더 학대를 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 성격이 원래 존재했다거나, 그들의 도덕심이 나약하다거나 하는 식의 낙인이 찍히곤 했다. 수용소에서 변절한 사람에 대한 모욕과 가정폭력 속에서 가출하고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경멸은 그/녀들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성폭행의 경우에도 피해자에게 피학적인 성향이 있다거나 그/녀도 원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즐비하다. 심리적 연구들도 초기에는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가정을 두고서 시작되었었다. 하지만 그런 연구들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
놀라운 것은 이러한 증세를 일으키는 지고한 악들이 도처에 널려있다는 것이다. 심리적 외상을 일으키기 위한 행동의 전형인 성폭행은 가부장적 사회 내에 널려있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 뿐 아니라, 아버지, 친척, 배우자, 애인 등 모든 종류의 지인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여전히 사법 체계에서는 피해자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으며, 경찰들도 심리적 외상을 더욱 심화시킬 짓들을 자행하곤 한다.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도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 게다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의 모든 일은 '사적'인 일로 여겨지며 사회적인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법적으로는 아동학대, 배우자 구타가 큰 죄로 여겨지지만 사회적인 눈길은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가족에게서 도망친 사람(특히 여성)은 비도덕적이라고 쉽게 비난받는다.
심지어 한국은 '학교'라는 기관에서 아이들을 구타하는 것이 합법적이고 교육적인 행동이라고 여기는 나라이다! 어릴 적부터 한국의 아이들은 선생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지닌 사람의 기분에 좌우되어 맞으면서, 자신에게 맞을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훌륭히 성숙시킨다. 이것은 학교-(특히 많은 남성은)군대-직장의 인생의 큰 분기 속에 완전하게 체계화되어 있고, 가정 내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사회화 속에 맞을만한 짓을 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수용되며, 피해자에게 어떤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리가 쉽게 힘을 얻는다.(학교 군대 직장을 거치며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되는 경험도 하며, 이 구조에 갇힌 이들은 폭력에 둔감해지려고 한다.)
4.
치료의 과정은 험난하다. 산산이 부서진 기억을 통합시키는 일은 많은 시간 - 혹은 평생을 요구한다. 안전의 보장과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 그리고 산산이 부서진 기억을 통합시키는 것은 치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한 번의 이야기로, 엑소시스트와 같은 격렬한 고통 1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또한 치료는 잊어버리고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모든 기억들이 찬찬히 밝혀져야 하며, 그러한 기억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디스 허먼은 마지막 덧붙이는 글에서 기억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외상을 일으키는 정치였던 독재에 대해 ‘사면’을 해주면서, 우리는 기억을 상실하고 있다. 고문과 학대, 학살에 의한 외상을 가진 사람들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덮어버리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더 많이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덮어주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화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물론 그러는 동안 ‘생존자’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20년 전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국가가 우리는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순진한 사람들은 그 믿음이 깨어졌을 때 외상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평택의 투쟁 뿐 아니라 미군의 활주로 투쟁이 있었던 곳에서 주민들은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수십 년 간 의지해온 공동체를 잃었을 뿐 아니라, 수천 명의 군인과 용역들이 밀고 들어와 그들을 폭행했을 때, 이전의 소박한 신념 체계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2003년의 부안 투쟁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들 사이에 남은 상처는 커져갔고, 잦은 싸움, 격렬한 화와 대인기피 증세를 호소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거대한 정치적 기획에 의한 폭력이 아닌 사적 영역에서의 폭력도 말할 출구가 넓지 않다. 거리에는 학대받은 아이들의 사진을 전시하고선 서명을 받는 이들이 넘쳐난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이러한 사진들이 본인의 허락을 받고서 전시되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 허락을 받았더라도 이것은 신체적 외상에만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전시 속에서 아이들에 대한 육체적 학대는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그 아이들의 정신적 외상과 이후의 삶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공감이 거의 없다. 성폭력도 그다지 나은 상황이 아니다. 단편적인 예로, 밀양에서 있었던 고등학생들의 집단 성폭행의 경우, 가해자들은 합의를 마치고 떳떳하게 다니지만, 피해자는 결국 어머니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도피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침묵은 치유가 아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외상을 주었던 사건 자체가 상처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상처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피해자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외상의 피해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상처들에 대한 인정, 회복이 없다면 사회 모든 곳 구석구석마다 부정과 비밀, 외상을 주는 행위들이 계속해서 맥동할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