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안에 숨어 있는 야수와 인간의 왜소함에 대한 보고서

장려상

인간 안에 숨어 있는 야수와 인간의 왜소함에 대한 보고서

피터 마쓰, 「네 이웃을 사랑하라」

01 서재현


야만의 기록

인간이 어느 정도로 ‘인간 아닌 무언가’가 될 수 있는가. 이 책의 주제가 무엇이건 간에,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그 화두였다. 이 책은 부제인 ‘20세기 유럽-야만의 기록’ 그대로, 인간의 ‘야만성’을 처음부터 아무런 가공 없이 독자에게 바로 내던져 보이고 있었다. 책의 가장 첫머리에 기록된 것이 자신의 소개나 글의 배경이 아니라, ‘악취’라는 것에서부터 그러한 사실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악취. 수개월 동안 난민 생활을 하여 씻지 못한 인간들의 악취. 작가는 그러한 악취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인간이 짐승처럼 악취를 풍기는 것을 상상하게 하면서 이미지적인 부분부터 인간의 모습을 걷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앞서 나온 모습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듯 차례로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로 드러나는 장면을 서술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강렬한 충격임과 동시에 마치 폭력과도 같았다. 독자에게 쉴 새 없이 주어지는 그 폭력은 그 어떤 미사여구의 포장도 통하지 않는 적나라한 진실을 눈앞에 들이대고, 면전에서 소리 없는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이 책의 작가는 피터 마쓰로, 워싱턴 포스트의 특파원으로 여러 전쟁을 취재한 전쟁 기자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그가 몇 년간 체험하며 취재했던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그는 전쟁 중에 있는 보스니아 내부의 가장 위험한 지구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솔직하게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 것은, 인간의 인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리석고 야만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전과 적

보스니아에는 오랜 시간 동안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사람들과 무슬림들이 함께 살아왔다. 그들 사이의 알력은 거의 없었고, 실제 있었다 해도 민족주의나 집단 배척과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들은 함께 살아오며 서로 융화되어 온 같은 국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전이 발발하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터무니없는 뜬소문과 잘못된 민족주의, 그리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종교적 편 가르기에 밀려 이웃은 적이 되고 친구는 원수로 화했다. 선동가들의 과격한 선동과 정치가들의 공작은 과격을 부추겼으며, 진실은 이미 저 멀리 감춰지고 말았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생생하게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보다 확실한 진위를 알기 위해 다각도로 정보를 모으는 노력을 책 전체에 걸쳐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기자라는 신분을 적절히 활용했다. 때로는 고향을 잃고 헤매는 난민에게, 때로는 감옥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죄수에게, 그리고 때로는 난민들을 향해 총을 쏘라고 강요하는 잔인한 사령관에게.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닿는 곳에 그 손을 뻗고,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얻으며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었다. 그가 만난 것은 피해자만이 아니었다. 보스니아 인들을 ‘청소’하고 그 자리에 남은 세르비아인들 역시 그의 취재 대상이었다. 작가는 양쪽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최대한 노력했으며,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정보로 인해 현혹될 수 있는지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작가가 기술해 놓은 취재 내용 가운데 정말로 놀라운 것은, 쫓겨난 난민들도 그 자리에 들어온 세르비아인들도 정작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난민들은 물론이고 세르비아인들조차 진실에서 한없이 멀어져 있었다. 실제 대부분의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계 무슬림에 대해 대단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대부분은 정부와 선동가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당치 않은 헛소문은 전쟁 중에는 의외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세르비아인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한 이웃이던 무슬림들을 몰아내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그들 가운데에는 어째서 그들이 이러한 일을 해야만 하는지 진지한 의문을 지닌 사람도 있고, 또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불가항력으로 몰려나는 데에 대해 감정적으로 슬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결과는 같았다. 난민들은 구해질 수 없었고 그런 상황은 내전 종식까지도 이어진 것은 물론 지역에 따라서는 더욱 격화되기까지 했다.

일반 시민들의 인식이 잘못되어 있다면, 상층부에서는 어떤 생각을 할까. 작가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지역 사령관, 군 사령관, 대통령까지도 접견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까지 만난 뒤에 전쟁의 시작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의외로 너무나 평범했던 전쟁의 목적. 정치적인 이해와 실리가 얽힌 정치가들의 야욕은, 현대인인 우리들에게 있어 그다지 새로울 만한 것도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역시 작가의 간결하고 쉬운 설명으로 전쟁의 전말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작가가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원인은 간단했지만, 이제 그 해결은 한없이 어려울 것이다’라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광기

작가는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설명하며 결코 군대와 군대 간의 전투에 대한 묘사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시각에서 군인 사상자는 묘사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군인이 아니라 난민 쪽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돌아다닌 지역도 대부분 ‘교전 지역’이 아닌 일종의 ‘살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군인들에 의해 인종 청소가 자행된 곳, 잔인무도한 폭거와 고문이 행해지는 수용소, 언제 총탄이 날아와 목숨을 빼앗을지 모르는(기자들도 그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명 ‘안전 지역’. 그는 그 모든 지역의 참상과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해 오고 있다.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 아직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문명의 이기를 입고 질서가 갖춰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야수에 대해 깨닫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이 의외로 ‘간단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행하는 고문이 어디까지 끔찍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이 얼마나 당연하게 자행될 수 있는지 그는 무심결에 눈을 돌려 버리고 싶을 만큼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 독자에게 말해 준다. 첫머리부터 일관되게 이어지는 폭행, 강도, 고문, 강간, 살인의 가지가지 묘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분노가 치밀어오를 만큼 잔인하기 짝이 없다.

또한 그는 그들이 그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 실제 보스니아계 무슬림들은 이슬람 광신자도 아니고, 문화색도 옅어져 이미 삶의 방식도 세르비아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종교적 차별주의에 빠져 세르비아인들이 그토록 잔인해졌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또한 보스니아인들이 딱히 세르비아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실제 많은 지역에서 잘 지내고 있었으며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이웃이고 친구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갑자기 상황이 이다지도 바뀐 것일까. 여기에 대해 작가는 담담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의 억눌린 야수성이 발발한 것에 불과하다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우리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만약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일본인들을 한 수용소에 가둬 놓고, ‘마음대로 해라. 모든 행위는 애국적인 것이므로 전혀 처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살인을 하건 폭행을 하건 강간을 하건 자유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우리 가운데 몇이나, 그 미친 야수를 향한 초대장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상황이 전쟁 중이며 누구도 우리를 탓할 사람이 없음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주변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지며, 집단적인 흥분이 나를 사로잡는다면?

이 책에서 묘사된 갖가지 범죄들은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지만, 실제 작가는 이러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는 인간이 얼마나 외부, 혹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해 무력하며 또한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의 모습을 퇴보시킬 수 있는지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그렇기에 더욱, 그의 글은 읽는 이의 마음을 때리고 있었다.

침묵하는 세계

보스니아 내전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처럼 서방이 적극적으로 한쪽 편에 개입하고 있는 전쟁은 아니다. 그렇다면 UN의 군대는 어째서 출진하여 이 내전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다주려 하지 않는가? 쉽게 제기될 수 있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작가는 또다시 부정적인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실제 미국이 어떤 식으로 내전에 개입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보스니아 내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작가의 펜 끝에서 나타나는 진실은 전쟁의 참상 못지않게 황당하며, 또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멀리 떨어져 전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쉽게 오해를 빚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조지 부시의 정부는 보스니아 내전의 개입에 소극적이었고, 파견된 지휘관은 내전의 종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글을 읽는 독자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지휘관 역시 ‘평화’의 이름 아래에 모든 것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을 돕지도 중재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어느 한쪽이 완전히 패망하여 전쟁이 빨리 종식되기를 바란 것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 먼저 전쟁을 시작한 ‘전범’인가 따위는 그의 생각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평화로운 세상의 타국 시민들’에게 역시, 그런 사실은 중요치 않았던 것이다. 몇 명의 민간인이 억울하게 쫓겨나든, 몇 사람이 폭탄에 맞아 죽든,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려 하지 않았다.

진상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시민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밖에서 지켜보는 우리들 역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름뿐인 허울의 평화 깃발 아래 얼마나 많은 분노가 쌓이고 원한이 축적되는지, 실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왜곡된 보도와 잘못된 편견, 그리고 정부의 정보 조작에 의한 것에 의한 것이었다 해도 그로 인해 얼마나 잘못된 시각이 발생할 수 있는지, 그 위험에 대해 작가는 통렬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실제 개인이 이러한 타국의 내전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든지, 그 나라 난민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한국에 살고 있는 나와 같은 인간이 보스니아 내전의 진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해도, 당장 거기에 영향을 미칠 아무런 수단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편견과 오해를 없애는 것에 분명 의미는 있다. 진실이 보다 복잡한 사정 속에 있음을 아는 것으로 인해, 선입견과 편향된 정보로 뒤틀어진 시각이 바로잡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광신적이다. 그들은 여성차별적이다. 또한 그들은 꽉 막힌 답답한 인종들이며, 그다지 영리하지도 않다.」 이러한 예와 같은 잘못된 시각은 진실을 통해 바로잡기 전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 우리는 무슬림이 크리스트 교 국가에 테러를 가했다면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크리스트 교인이 이슬람 국가에 테러를 가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지 못하지 않는가? 작가는 개인의 시각이 얼마나 쉽게 좌지우지될 수 있는지를 보이며,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지를 역설하고 있다. 또한 나 역시 책을 읽으며 그 말에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시각을 지니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한쪽만 듣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만 않는다면, 이와 같은 내전이 발발할 위기에 혹 접하게 되었을 때-그리고 그때 미약하게나마 의견을 표출할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때-보다 올바른 결말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인간의 몰락과 나약함

이 글을 읽으며 독자들은 아마 적지 않게 분노할 것이다. 전쟁의 내용이나 원인은 둘째치더라도, 전쟁 중에 행해지는 갖가지 인종 청소와 고문 등이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읽는 내내, 전쟁과 인간 내면의 야수에 대해 치미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분노는 글 중에 나타난 작가의 어떤 체험 앞에 맥없이, 그리고 어이없게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분노한다는 것은 정의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이와 같은 일을 불의로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 또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은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작가는 자신이 실제 그러한 상황에 처해 보았음을 일화로 제시하고 있었다. 기자라 해도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 당장이라도 자신들을 쏘아 죽일 수 있는 총을 든 병사가 옆에 서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무차별로 사람을 폭행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그 군인이 쓰러진 사람의 가슴에 대고 총을 당기려 하는 그 순간까지, 작가를 비롯한 기자들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 그들의 생존 본능이 그들의 행동을 얽어매고 말았던 것이다.

나의 짧은 분노는 거기서 끝났다. 만약 내가 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들과 다르게 당당히 나서서 그 흉행을 저지할 수 있었을까? 거의 100% 불가능했을 것이다. 작가는 인간이 갖고 있는 소위 인간성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계기로 인해 무너질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게 될 수 있는지 여러 면에 걸쳐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작가가 보스니아 내전의 실상 못지않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곳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참상을 막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변화가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결코 쉽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보스니아 내전은 27만명의 사망자와 2백만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키고, 결국 1995년 말에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음을 이 책은 고하고 있다. 이해를 달리하는 강대국들간의 정치적 야합을 통해 보스니아 내전이 끝났다 한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본질은 과거 원시 시대의 야만스러운 야수의 생활에서부터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풀숲에 잘 숨겨진 야수의 모습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도덕의 고삐를 놓으면 당장 튀어나올 준비를 한 채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인간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 모든 짐승,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나약하고 악한 정신이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 보스니아 사태는 단순히 먼 나라에서 발생한 잔인한 내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야수성에 대해 적나라하게 밝혀 주고 있는 하나의 보고서인 것이다.

전쟁의 시작은 비록 민족 간 분열을 조장한 정치가들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그 가속화는 인간들 스스로가 행했다. 선동가들은 야수성이 날뛸 자유를 주었고, 폭력과 총검이 판치는 세상에서 인간의 야수성은 잔인하게 빛을 발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끔찍했는지는, 지금이라도 인터넷을 켜서 ‘보스니아’라고만 쓰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보스니아 내전 막바지에 무려 7000명의 회교도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인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은 내전 최악의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꼽힌다.)

글을 읽는 내내 나는 작가의 ‘두려움’을 읽었다. 그는 분명 인간이면서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잔인한 야수성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다만 그것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올바르게 두려워해야 함을 말하고 있었다.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맹수를 두려워하면 그에 해당하는 대책을 세워 위험을 피하게 된다. 맹수들과 달리 인간 내면의 적은 보이지 않으며, 동시에 그 자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대책은 한없이 어렵고도 힘들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인간성의 상실과 야수의 탈옥은 인간이 인간으로 있는 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재난이며, 우리 모두는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항상 이를 경계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전쟁과 멀리 떨어진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어디까지 실감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솔직히 전쟁은커녕 싸움도 제대로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나이기에, 인간의 폭력성이나 야수성에 대해 말한다 한들 와 닿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게 외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며, 또한 인간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보스니아가 아닌 그 어느 곳에서라도, 우리는 인간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필사적으로 내게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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