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호에게”: 군대에 관한 책들에 대하여

장려상

“필호에게”: 군대에 관한 책들에 대하여

언론 꼼반 서경국


필호야 안녕. 영원히 올 지 않을 것만 같던 2007년 10월이 왔구나. 더위가 물러가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너를 잠시 떠나보내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문득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볼에 스치는 서늘한 바람을 느끼니 퍼뜩 시간이 얼마 없음을 절감한다. 이번 달 말이면 넌 진주로 가 25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군대에서 보내게 되겠지. 먼저 군대에 입대했고, 이제 군 생활의 절반을 보낸 나로서는 너를 그곳에 정말로 보내고 싶지 않구나. 이 말이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들을 타자화 하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만, 그 곳을 경험해본 나이기에 더욱 네가 그곳에 간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올 봄에 나는 MDF 친구들에게 ‘군대’ 세미나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이야기 했었다. 현재 내 삶의 가장 주된 관심사가 바로 그것이고, 너와 종훈이도 곧 입대를 할 것이었기에 함께 공부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 나름 함께 읽을 책도 생각해놨고, 약 두 텀에 걸쳐 이야기할 거리도 생각해놨었다. 내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너희를 부대 안으로 에스코트(escort)하여 세미나를 하자는 계획도 말했었지.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번 여름에 MDF('Men Doing Feminism'의 약자로, 서울대학교 언론과/Comm반 내 여성주의 모임인 ‘여우입술’내에 있는 조각모임이다) 모임을 하지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제안자인 나의 게으름 때문일 것 이다만, 그것 말고도 너희에게 핑계를 댈만한 이유 또한 있었단다. 내가 생각했던 세미나의 첫 번째 텀은 ‘군대와 남성-징병제를 중심으로’였고, 두 번째 텀은 ‘다른 가능성들-양심적 병역거부와 모병제’였다. 하지만 이 세미나를 진행시키는데 덜컥 겁이 났어. 나는 입대를 앞둔 너희에게 군대의 진실을 더 깊이 알게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으로 너무 두려웠다. 더욱 알면 알수록, 진실에 다가가면 다가 갈수록 군대에서 자행하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너희들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 것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괜찮았을 것들도, 알고 나면 마음속에 끊임없이 반발감과 죄책감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다 너희들도 나처럼 몸과 마음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군대에 대해서 잘 모르고 갔던 나조차도 수많은 반발감이 들었는데, 그것을 알고가면 어찌할까 걱정이 됐던 것이야.

그리고 두 번째 텀에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많이 갈등됐다. 우리의 세미나는 당연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결론을 낼 것이다. 하지만 일단 나부터가 그러한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지난 5월달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에 문형이와 함께 간 나는 많은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러면서 너희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도 부끄러운 일이고, 너희에게 부담을 주는 일인 것 만 같았다.

그래서 결국 너희에게 제대로 이야기도 못한 채 흐지부지 시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필호 네가 군대에 가기 전에 어떻게든 이야기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쓴다.

_군대라는 곳

내가 찾아보았던 많은 책들에서 군대의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와 ‘군대 내 폭력성’ 등에 대해 잘 분석해 놓았다. 『대한민국史 3권』의 <대한민국 사병은 똥개인가>를 통해서 군대 내 사병들의 인권침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볼 수 있었고, 『당신들의 대한민국1』의 <아직도 폭력의 충만한 사회>를 통해서도 군대가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는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으로 왜 군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자. 일단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는 군대가 하는 일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군대가 하는 일은 당연히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일이겠지. 적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하고, 적을 공격하여 이긴다는 것. 이러한 목표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사병들에게는 창의성과 자율성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가 없다. 어쩌면 너는 삼국지의 제갈공명을 생각하며 전쟁에도 창의력이 필요하다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의 전쟁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전이라는 것은 그 때 그 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수립되어 수차례 반복됨으로서 부대의 전투력을 높인다. 작전을 수립하는 몇몇 핵심 장교들에게는 임기응변과 창의력이 요구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제한적이다. 지나친 창의력은 의외성의 증가를 낳고 작전을 수행하는 사병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 장교들에게 그럴진데 사병들에게 창의성은 절대 발휘해서는 안 되는 성질의 것이다. 사병들은 단독작전을 수행하는 특수요원이 아니야. 그들은 그 전에 수차례 연습 된 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순간 부대 전체는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지. 모든 것은 상부에서 미리 내려진 대로, 이전에 연습된 대로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군대는 창의성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매우 경직된 성격을 띤다.

대신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경험’이다.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각 경우에 대해서 많은 경험을 해 보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능력이 아니라, 짜여진 매뉴얼을 얼마나 많이 경험해 보았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짬’이라는 것이 나온다. ‘짬’은 본래 군대에서 먹는 밥과 그 음식물 찌꺼기를 말한다. ‘짬이 쌓인다’는 말은 즉 얼마나 군대에서 오래 있었는가 하는 말이다(사회에서 “내가 먹은 밥그릇 수가 얼만데…어쩌구 저쩌구…”하는 것과 비슷한 용법이겠지). 군대에서 선임에게 주어지는 권력은 단지 법규로 규정해놓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도 실제로 군대에 오래 있는 사람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 또한 대체로 높은 편이다. 이 외에도 ‘정보의 접근 허가’가 ‘짬의 권력화’에 영향을 끼치지만, 확실히 후임보다는 선임이 더 많은 것을 할 줄 알고 임무 수행능력이 탁월하여, ‘자연스레’ 위계질서가 확립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하지만 창의력이 필요없고, 위계질서가 최우선시 되는 조직이라고 해서 모두 ‘폭력’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는 행정부의 관료조직부터 기업의 말단 조직, 공장의 생산라인 등도 창의력보다는 경험과 위계질서를 더 따지지만 군대와 같은 폭력은 동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군대의 폭력은 어디에서 유발되는 것일까? 나는 경직된 군대 조직이 ‘징병제’라는 시스템을 만나 군대 내 폭력이 유발된다고 생각한다.

군대 내 폭력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신병에 대한 폭력이다. 훈련소에 막 입대한 훈련병, 자대에 막 전입한 신입 이병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 군대에서 발생한 자살사고 가운데 군에 입대한지 6개월 미만인 이등병의 자살사고가 가장 많다는 구나.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이유는 바로 ‘적응’이다. 하지만 왜 적응을 위해서 폭력이 필요할까? 그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군대라는 곳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징병제에 의해서 억지로 군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신병의 가장 큰 문제는 그의 행동이 아직 미숙하다는 점이 아니다. 폭력 또한 그의 행위 자체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후임병을 ‘갈구며’ 흔히 하는 말로 ‘빠졌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군인으로서의 긴장과 정신력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폭력의 대부분은 그의 ‘정신력’을 문제 삼고서 이루어진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어떤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군대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기 싫은 것을 억지로 왔다. 따라서 군대 초기에는 그것에 대한 불만이 강하며, 군대 밖에서 하던 사고방식이 강하게 남아있다. 이것을 좌절시키고 군인으로서의 ‘정신력’을 키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폭력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신력’을 위해서는 ‘정신교육’이 필요하지 왜 폭력을 쓰는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군대에서는 수시로 ‘정신교육’이 실시된다. 하지만 몸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물리력만큼 인간의 뇌리에 깊이 인식되는 공포는 없는 것 같다.

만약 자신이 자원해서 군에 들어오는 모병제라면 어떨까? 적어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의식이 있을 것이고, 어느 정도의 자부심과 목표 또한 있을 것이다. 모병제 중 하나인 직업군인제의 경우에는 성과가 있을 경우 포인트를 주고, 그것에 따라 진급과 봉급이 결정되는 제도를 갖고 있는 사례가 많다. 그럴 경우 스스로 동기를 유발하여 더욱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근무에 임할 것이다. 폭력은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징병제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 군대 생활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더욱 열심히 해야 할 어떠한 동기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폭력을 통하여 군대에 억지로 적응 시키는 것이다.

_군대와 남성

지금껏 우리가 세미나 커리나 소개받은 책을 통해서 접한 군대에 관한 내용에는, 군대를 통해 어떻게 남성이 사회적 특권을 획득하는지와, 군사주의가 어떻게 여성을 ‘2등 시민’화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세미나를 통해서 내가 살펴보고자 했던 바는 너와 나의 문제, 즉 군대에 갔다온 ‘남성’에게 발생하는 변화에 관한 것이었어. 이에 관해서 내가 아는 가장 공감가는 책이 바로 권혁범 교수님의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Ⅴ. 남자와 군대, 그리고 군사주의> 장이었다. 그 중에서도 <예비역 남성,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글은 교수님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군대에 갔다 온 남성에 대한 뛰어난 통찰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은 군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남성을 변화시키고 길들이고 있는지를 잘 분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군대라는 곳에서 2년을 보내고 난 다음에 남성들이 겪게 되는 보상심리와 피해의식, 집단적 연대감까지도 잘 짚어내고 있다.

그가 만약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할 수 있고 그것을 넓은 정치적 지평 위에서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징병제'와 병역의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국가/국민/국방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전혀 논의하고 있지 않는 현행 교육제도와 정치문화하에서 그런 능력을 갖기 어렵다. 따라서 제대군인은 오히려 자신의 경험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특권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사실 군필자의 손해는 자신들이 정상적인 '국민'이 되는 특권의 이면이다. 여성이 '국민'에서 소외되는 중요한 이유는 군 복무 경험의 부재와 관련되어 있다.
(중략)
나는 군필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분노, 억울함, 자긍심, 사회적 인정에 대한 욕구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은 애당초 대상을 잘못설정하고 있다. 그들의 화살은 국방부, 헌법재판소, 청와대와 국회, 그리고 특권층을 향해야 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군경험에 대해 뭔가를 보상받고 싶다면 급진적으로는 징병제 폐지, 중도적으로는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 최소한 보수적으로는 군생활 개선 등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거나 그것에 지지를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군필 남성들은 군대 경험을 토대로 해서 여성이나 사회적 소수자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느끼는 소외감, 불안증, 차별에 감정이입하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걸까?
(권혁범,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또 하나의 문화, 2006, pp.191-192)

피해의식에 대해서는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해야겠구나. 얼마전에 내 방명록에 어떤 여자 친구가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요즘 알바를 시작했어요. 음식점 알바인데 뭔가 ㅡㅜ 엄청 착취당하는 듯. 감정적으로도 힘들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어요. 사회에 나가면 이렇게 맨날 힘들고 슬플까요. 아아. 군대 가신 경국님이 부럽기도.ㅜㅠㅠ

이 친구의 의견이 맞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 역시 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아르바이트의 경우, 특히 사회경험이 적은 학생 아르바이트의 경우에 상대적으로 심한 착취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친구가 감수성이 무척 예민한 친구라는 것을 알기에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들 거라는 것도 공감한다. 하지만 군대에 있는 내가 부럽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학생 아르바이트와 군대 복무를 가지고 어떤 것이 더 낫고 더 못하다는 것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얼마나 힘든가?’라는 감정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역시 이 땅에서 가장 감정노동과 노동 강도가 강하며 착취가 심한 곳이다. 학생 아르바이트의 경우 요즘 시세는 최소 시간당 3500원의 급여를 받으며 음식점의 경우 그보다 더 높다고 알고 있다. 군인의 경우 내 월급이 7만 2천원인데 한 달에 25일을 근무한다고 따지면 하루 일당이 2880원이란다. 하루에 8시간을 근무한다고 치면 시간 당 320원이지. 물론 하루 세끼가 공짜이고 주거가 보장된다. 그것을 감안 하더라도 나 같은 카투사의 경우 시간 당 2500원, 일반 한국 육군의 경우 시간당 1000원이 안되는 급여로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근무 시간만을 따졌을 때의 이야기이지 군대에는 근무 외에도 행해지는 여러 가지 것들이 많다. 근데 더 큰 문제는 급여가 아니다. 아르바이트는 자기 자신이 돈을 벌 목적으로 자원해서 한 것이다. 하지만 군대는 그렇지 않다. 자신의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강제로 복역하고 있다. 이것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겠지. 어쨌든 이런 이유로 그 친구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 글을 보자마자 나는 아주 아주 화가 났고, 어이가 없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군대라는 곳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친구가 ‘감히’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몹시 불쾌했다. 순간적으로 ‘역시나 군대에 안 가본 녀석들은 모르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피해의식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차분하게 군대의 힘든 점을 예로 들며 그것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경험 없음’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피해의식에 기반 한 보상심리와 남성들의 연대감은 군대문화와 징병제를 더욱 굳건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본다. 국가는 그들의 경험에 ‘국방’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가치와 특권을 부여함으로서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의 공격 방향을 군대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 쪽으로 돌려버린다. 공격의 대상을 갖고, 자신의 특권까지 갖게 된 남성들은 그 불만을 징병제나 군대 쪽으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심리적 보상을 위하여 그것을 미화하고 찬양하는데 동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한다. 우리가 군대에서 느끼는 좌절, 불안, 박탈감, 억울함 등은 군대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바뀌어져야 할 것은 군대이다. 우리의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바로 군대인 것이다. 여성이나 소수자가 아니야.

오히려 권혁범 교수님은 글의 말미에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남성이 여성이나 소수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좌절의 경험을 평생에 걸쳐 경험하는 그/녀들과 공감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임 앞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밤길을 걸으며 이와 같으면서 다른 공포를 느끼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병장들은 가만히 있는 가운데 온갖 청소와 허드렛일을 떠맡아 하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가사노동에 대한 감정들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권혁범 교수님은 이 글에서 요즘 세상에 남자들은 여자들과 별다른 체험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우월주의 의식은 여전한데, 그런 남자들을 여성과 구분하게 하는 독특한 경험이 바로 군대의 경험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여성과 구별되는 경험이면서 동시에, 남성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여성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말년엔 병장으로서의 권력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제대 후에는 그 권력의 달콤함 만을 기억 할 뿐, 신병 때의 괴로움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권혁범 교수님은 같은 장의 <한국의 남성, 남성성>이라는 글에서 ‘남성도 피해자다.’라는 표현이 조금 위험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나 역시 이 말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새맞이 시절, 남학우들에게 여성주의를 소개하면서 가부장제 사회 내에서는 남성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전략을 택하기도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별권력관계 내에서만큼은 남성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은 듯 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군대에 관해서 만큼은 남성은 피해자이다(이는 성별권력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피해는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야한다는 점에서 ‘남성은 피해자다’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 2년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빼앗겨버린다. 여성을 도구화하고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에 젖어 그녀들과의 다른 관계 가능성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린다. 권력이 없다는 것의 서글픔과 더불어 권력의 달콤함을 배우게 돼,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는 욕심을 갖게 된다. 이 밖에도 우리는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다. 그것이 정말로 ‘피해’였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군대를 향해 변화를 외쳐야한다. 제대 이후에 국가에서 주는 특권에 젖어 그 시절을 미화하며 자위할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재구성하고 비판 하는 능력을 가져야한다.

_병역거부

얼마 전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국가가 ‘종교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1만 2천명이 넘는 병역 거부자들을 감옥으로 보냈던 지난 역사를 뒤로하고 이제야 우리에게도 ‘총을 들지 않을 권리’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단초가 마련 된 것 같아 무척이나 반갑더구나.

『대한민국史 3권』의 <한국군은 인해전술을 원하는가>에 보면 대체복무를 실시하고 있는 대만의 예가 잘 나와 있다. 이 글은 병역 자원이 모자란다는 군 당국의 주장이 그다지 설득력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대체 복무를 통해 인권 침해도 막고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확실히 현대전에서 인해전술은 효율적인 전술이 아니다. 군 당국 내에서도 끊임없이 감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군 복무 기간 단축 등은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대체복무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색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대체복무를 실사할 경우 누가 군대에 가겠느냐고 반문을 하더라.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대만의 경우 대체복무제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인식과 힘든 근무 여건으로 인해 현역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한다. 이번에 정부에 의해 대체복무 대상지로 제시된 전남 소록도의 한센병원, 경남 마산의 결핵병원, 서울과 나주, 춘천, 공주 등의 정신병원 등 9개 국립 특수병원과 전국 200여 개 노인전문요양 시설 등은 고위 당국자 자신이 밝힌 대로 가장 난도가 높은 분야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현역 복부가 18개월로 줄어들고 있는 판국에 36개월을 합숙하며 근무한다는 것은 웬만한 신념이 아니고서야 하기 힘든 선택이 아니겠니?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이 대체 복무 안이 만족스럽지만은 않구나. 우선은 대체 복무제도가 마치 징벌적인 의미로 비춰지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 ‘가장 난도가 높은 분야’라는 표현도 그렇고 무엇보다 36개월이라는 기간이 문제다. 인권운동 사랑방의 논평에 의하면 유엔 인권위원회는 대체복무 기간이 현역복무 기간의 1.5배를 넘으면 징벌적 수준에 해당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는 구나. ‘병역 거부자들의 대체복무는 평화적 신념에 대한 권리로서 보장해야할 문제이지 병역거부에 대한 징벌이 되어선 안 된다’는 논평에 공감이 간다. 책에 따르면 대만의 경우 종교적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의 복무 기간이 너무 길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어 이들의 복무 기간이 처음 현역의 1.5배에서 지금은 1.1배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종교적 병역거부’와 ‘비종교적 병역거부’를 구분하여 전자에 대해서만 대체복무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나는 도대체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구분 할 수가 없다. 그 근원이 종교적인 이유에서든 양심적인 이유에서든, 집총을 거부한 이유는 평화를 사랑하고 타인에 대한 살상을 거부하려는 신념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체복무를 희망하는 종교적 병역 거부자들에 대해서 법조계와 학계, 사회단체 관계자 등으로 별도의 자격판정위원회를 구성해 해당 종교단체 증빙서류와 당사자 면담 등을 통해 대상자를 선정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구분은 ‘종교적’인 것이 양심이나 인권, 평화와 같은 신념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우리 사회의 통념에 기대고 있다. 분명히도 ‘여호와의 증인’신도들은 그들이 믿는 신의 뜻에 따라 평화를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병역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평화에 대한 신념을 그들에게서 분리시킨다. ‘종교적 병역거부’와 ‘비종교적 병역거부’의 구분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그리고는 그들을 ‘신에 대해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광신도 집단’으로 매도한다. 그런 방법으로 병역 거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감에 대해 쏟아지던 비판을 무마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집단을 왕따 시키고, 대체 복무의 확장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번에 정부에 의해 발표된 안은 그야말로 ‘단초’에 불과한 것 같다. 계속해서 비종교적 병역 거부에 대한 논의를 해 나가야할 것이며 전쟁과 군사주의, 평화에 관한 사회적 논의로 이어나가야할 거라고 생각해.

_모병제

마지막으로 모병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봐야할 것 같구나. 많은 책들에서 징병제의 부작용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이 모병제이다. 『우리안의 파시즘』에 실린 박노자 교수님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국의 ‘군사주의’>를 보면 ‘그리고 군대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방안으로는 현재로서 모병제 도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모병제가 도입됨으로써 징병제와 관련된 각종의 부정행위도 일소될 것이고, 학생들의 학습 효과도 꽤 향상될 것이며, 군대 자체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임지현 외 지음, 『우리안의 파시즘』, 삼인, 2000, p.100)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史 1권』에서도 <이제 모병제를 준비하자>라는 글을 통하여 모병제가 각종 군대문제의 해결책임을 제시하고 있다. 앞서 본 권혁범 교수님의 글에는 가장 급진적인 방법으로 징병제의 폐지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글 곳곳에서 그 해결책으로 모병제를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모병제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일까?

언젠가 여우입술 커뮤니티에 모병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그 때 성철이가 달았던 짤막한 댓글 하나를 살펴보자.

흠, 본문과는 별 상관이 없는 얘긴데, 우리나라에서 진보적인 담론에 조금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관성적으로 군 = 폭력, 징병제 = 타도대상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해. 사실 엄밀히 얘기해서 폭력이 정치적으로 배제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매우 한정적인 것에 불과하고, 무장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거든. 누가 뭐래도 총 든 사람한텐 개길 수 없는 거니까. 모병제는, 음, 빨갱이 식으로 말하자면, 인민과 분리된 전문적 무장집단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꽤 위험할 수 있어. 특히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의 예에서도 보듯, 모병제를 통해 군에 입대하는 대다수가 룸펜 프롤레타리아 및 극빈민 계층에 속한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더욱 위험하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징병제 = 인민의 자기무장이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야. 다만 무턱대고 모병제를 얘기하는 것이 군대 폭력의 절감에 절대 도움이 안 된다는 거지. 오히려 정말 완벽히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폭력집단을 형성함으로써 군대 외부, 즉 사회에 가해지는 폭력은 심화될 지도 모르지.
무장이 필요한 것은 적대라는 조건이 존재할 때고, 적대라는 조건은 계급 사회를 전제로 하니, 혁명적 인민의 자기무장 이후 전체 인민의 무장해제로 이어지는 과정이 없이는, 군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목을 잡겠지. 뭐 러시아 혁명 때도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군사 소비에트였으니까... 적어도 현실에서 무장 = 권력이라는 것을 무시하지는 않아야 제대로 된 인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용 :)

그 당시에 나는 모병제로의 전환 이후 남/녀 모두 자유롭게 군에 입대 할 수 있는, 지금의 미국과 같은 모델을 가장 바람직한 방안으로 제시한 적이 있다. 성철이의 글 이후로는 논쟁이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나 역시 그 당시에는 모병제에 대한 워낙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딱히 반박할 말은 없으면서도 그다지 저 글에 공감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카투사로 군에 입대하여 미군의 시스템 속에서 생활해보니 성철이의 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깨닫게 되었다.

모병제에는 기대하는 대로 좋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억지로 입대를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겠니.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그 밖에도 모병제는 군대 자체를 더욱 효율적이고 능동적으로 만든다. 앞서 말했듯이 ‘자원에 의한 군 복무’는 군인 개인 개인에게 능동적인 마인드를 갖게 만든다. 그리고 실적이나 능력에 따라 포인트를 지급하고 그에 따라 진급이 결정되는 계급체계를 통하여 자기 개발과 근무능력 향상을 유도한다. 우리와 같이 단지 군대에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로 말도 안되는 권력을 휘두르는 일도 없다. 우리의 이등병에 해당하는 'Private'부터 상병에 해당하는 ‘Specialist/Corporal’까지는 동등한 동료로서 명령의 상하 구분이 없다. 대신 수년의 근무와 뛰어난 실적을 바탕으로 우리의 병장에 해당하는 ‘Sergeant’이 되면 부사관(NCO)으로 인정받아 사병보다 높은 지위체계를 인정받는다.

대부분의 복무는 ‘직업’의 형태와 유사하게 이루어진다. 봉급도 미국의 평균적인 직장에서 받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일과 시간 이후에나 휴일에는 최소한의 제약만을 남겨둔 채 상당한 자유가 주어진다. 직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장교-부사관-사병으로 이어지는 명령 체계가 있으나, 한국군과 같이 무조건적인 복종과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다.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자기 임무를 하며, 그에 대한 보상도 처벌도 자신이 책임진다.

군대가 ‘직업’과 같은 분위기로 이루어지다보니 ‘국방’, ‘안보’와 같은 국가주의적인 사상의 주입도 덜한 편이다. 우리나라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군인들이 그러한 고생을 해야하는 그럴싸한 근거를 마련 해줘야하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한국군에서 이루어지는 군대교육의 대부분은 충성이나 국가 안보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미군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대부분 전술, 전투에 관한 것이거나 평시에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지식에 관한 것이다. 아마 미군들에게 ‘국가를 위한 희생’ 따위를 이야기하면 코웃음을 쳐버릴 거야.

군대 내부의 필요에 의한 것이긴 하겠지만, 인종 차별이나 여성 차별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EO(Equal Opportunity)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정기적으로 인종차별 금지, 성폭력/성희롱 금지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며, 누군가가 EO에 진정을 할 경우 매우 법적이며 엄격한 규정의 적용을 받게 되어있다. 군대 내에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고, 많은 여성들이 복무하고 있지만 그에 따른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잘 제어되고 있는 모습이더구나.

하지만 모병제에도 문제는 있다. 성철이가 지적한대로 사회 극빈층에 속한 이들이 군대에 온 경우가 많다. 앞서 말했듯이 군대 내에서는 사회 계층에 따른 차별이 금지되고, 동등한 기회 속에서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일정한 지위로 진출하기 힘든 이들이 군대에 자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군대가 이러한 사회 하층계급의 불만을 무마하고 그들을 보수화시키는 학교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국가’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가는 그들에게 저항하고 반발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지키고 발전시켜야할 것이 되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다만 미국사회에서 마약이나 알코올이 사회 하층민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군대는 그들을 보수화시키는 보다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듯 하다.

더불어 군대 외부, 즉 사회에 가해지는 폭력은 심화될지 모른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국민(모든 남성)과 군대가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사회와 군대가 매우 복잡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으며, 국가에 대한 사회 일부 계층의 저항이 발생하였을 경우 그에 대한 진압도 생각처럼 무차별적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독립적인 폭력집단을 형성하였을 경우 국가에 반하는 행동에 대한 폭력 역시 더욱 강해지고 무자비해질 것이라는 예상을 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병제를 실시하고, 여성의 군대 자원이 가능해진다고 해도 여성과 남성 사이에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군대 내부에서조차 명백하게 들어난다. 미군에는 많은 보직(MOS)가 존재한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에 자신의 지원과 특기, 훈련 성적 등을 반영하여 보직이 결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각 보직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분포를 보면 군대 내에서 여/남의 성별분업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단적인 예로 군대 내의 물품을 관리하고 보급하는 일을 하는 보급병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이 여성이다. 특히 보급병에게는 그다지 많은 특기나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어린 흑인 여성들이 많다. 이에 반해 군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병의 경우 나는 아직 단 한명의 여군도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확연하게 들어나는 차이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힘들거나 전투와 관련된 일들은 남자들이 떠맡아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때가 많더라. 결국 여성이 군대에 오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해소하는데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 듯 하다. 그것은 군대 안에도 밖에도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성별 고정관념이 근거한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모병제라는 것이 물론 군대 내부와 외부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 징병제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것이 모든 해결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과연 우리는 어떤 상상을 해 볼 수 있을까? 성철이는 혁명적 인민의 자기무장 이후 전체 인민의 무장해제로 이어지는 과정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였지만, 나는 그 전에 그의 전제인 ‘적대라는 조건은 계급사회를 전제로 한다’는 명제에 전적으로 동의 할 수 없기 때문에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주저된다. 부족한 나는 정치학적으로 군대가 소멸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아직 없는 듯 하다. 너는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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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가 길어졌다. 그냥 그동안 군대에 있으면서 했던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었더니 주절주절 말이 많아져버렸네. 생각해보니 네게 별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없는 것 같다야. 완전히 나를 위한 글이 되어버렸구나. 어쨌든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용기를 준 너에게 감사해야할 것 같다.

때로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고, 밤잠 못 이루며 괴로워해야 하겠지. 아프게 저항하며, 처절하게 무너지기도 할 거야. 나는 아직 군대 간 사람이 “뭐, 괜찮아. 잘 지내고 있어.”라고 말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떻게 그곳에서 ‘괜찮을’ 수 있는걸까. 너는 그곳에서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

부디 건강하렴. 나처럼 아프지 말고. 혹시 아프면 바로 연락해야한다.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당장 달려갈게. 7주 후에 나와서 연락 안하면 가만 안 둘테다. 정색쟁이인 너는 편지 할 필요 없다고 할지 모르겠다만, 네 훈련소 주소가 나오는 대로 편지 쓸거다. 하하하.

시간이 얼마 없구나. 가기 전에 꼭 보자. 보고 싶다, 필호야.

2007.10. 경국.

<참고한 책>

  • 권혁범,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또 하나의 문화, 2006
  •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1』, 한겨레신문사, 2001
  • 임지현 외 지음, 『우리안의 파시즘』, 삼인, 2000
  • 한홍구, 『대한민국史 1권』, 한겨레신문사, 2003
  • 한홍구, 『대한민국史 3권』, 한겨레신문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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