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얘기들, ‘살아있는 과거사’

장려상

끝나지 않은 얘기들, ‘살아있는 과거사’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농경제사회학부 최수호


“벌써 진도가 이만큼이나 나갔네. 내가 이 책 공부할 때는 이까지 하면 한 학기가 다 끝났는데……. 우리 대학 다닐 때는 수업을 별로 안했어. 참 어수선하던 때라 휴강 아니면 데모한다고 동맹 휴학 하기 일쑤였지. 자네들은 참 운이 좋은 걸세.” 교수님들의 감상조의 회고담은 나에게 약간의 충격과 함께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했었지만 어느새 워낙 많이 들어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느 시대에 만들어져 지금은 추억으로 되뇌어지는 얘기들인지, 바로 앞에 서 계시는 저 분이 몸소 겪은 일들이라니. 되뇌어보면 2007년의 대학생인 나에게도 묘한 떨림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체제와 이념, 분단, 군부독재와 민주화운동……? 누구든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생소하게 느껴지는 단어들은 아닐 텐데.’ 사실 나에게 있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핵심적인 표제어들은 단지 낯설지 않다는 것을 넘어서 제법 의미 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중 ․ 고등학교 때 국어책에 등장했던 많은 시들 중 서정적이고 유미적인 성격의 시보다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등 시대 의식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시들이 좋았고 최인훈의〈광장〉,〈회색인〉,〈화두〉등 다분히 이념적인 성향의 소설들에 빠져들었던 것, 20대의 젊은층에게는 인기 없기 마련인〈서울 1945>와 같은 시대극을 즐겨보았던 것 하며 <화려한 휴가>, <박하사탕> 등 무거운 현대사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를 좋아했던 것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비교적 최근 역사의 격동을 접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흔히 외세에 휘둘리고 왜곡되어, 유약의 시기로 여겨지는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가 나에게는 일종의 판타지(?)와 같은 느낌을 주었고 동시에 이 시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결과적으로〈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역시 한국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국사건이었던 ‘통혁당 사건’이 원초가 되어 빚어진 책인 만큼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읽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일련의 과정 끝에 읽게 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고 느끼게 해주었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큰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학점과 취업 문제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학교를 다니던 어느 가을날 무심히 열었던 이 책은 그 동안의 편협한 사고의 열없음을 일깨워 주었고 사람살이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다시 단조로운 일상 속에 파묻히기 전 허접스러우나마 내 생각을 정리해두어야 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일들에 선행해야 할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줄곧 그 명성을 들어오던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그는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20년 20일을 수인(囚人)의 몸으로 지내다 88년에야 출소한 분단 시대의 아픔의 자화상이다. 그가 옥중에서 깊은 사유와 고뇌로 가족들에게 쓴 편지글을 묶어 탄생한 서간집이 바로 이 책인데 읽기 전 한 인간의 삶을 그토록 오래도록 속박했던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넘쳐나는 정보의 시대에 살아가는 만큼 대충의 지식은 얻을 수 있었지만 누군가가 그에 대해 물어온다면 아주 간단한 설명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당시 워낙 파장이 컸던 사건이었던 만큼 그 때의 육중한 무게가 지금도 그대로 전해져오기 때문이며 그 무거운 자기검열체계가 여전히 작동하는 듯 느껴진다고 하면 내가 너무 소심한 사람이 되는 걸까. 그보다는 그 일로 고통 받았던 사람들이 여전히 생생히 표류하고 있기에 아직도 끝난 일이라 여길 수 없는 것에 그 일을 가볍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회는 과거로부터 유리될 수 없으며 한 시대의 아픔은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풀어야하는 숙제를 남겨주는 듯 하다. ‘통혁당 사건’에 대한 나의 생각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어 허무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허무함을 희망으로 채울 수 있었다. 아픈 과거사를 쓸쓸하게 느끼다 그 일로 고초를 겪은 사람이 옥중에서 쓴 글을 읽고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평소 책을 읽을 때 빨리 읽는 법 없이 천천히 정독해서 읽는 편이었다. 그래서 무게 있는 내용일수록 읽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이 책 역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읽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예상과는 달리 다 읽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소 생소한 한자어와 추상적인 관념어가 많이 나옴에도 내용이 겉돌지 않고 머릿속에 착착 감겨올 수 있었던 것은 이 글 특유의 매력과 아름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다양한 감정이 교차했지만 단연 압권이었던 것은 역시 놀라움이었다. 오랜 시간을 외부와 단절된 채 생활하면서 맞닥뜨렸을 절망을 이렇게 온화하고 조화로운 언어로 승화시킨 그의 맑은 정신세계는 하나의 초인적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무거운 고뇌와 번민이 담겨 있는 글일지라도 모두 한편의 시와 같이 아름다웠으며 그 글을 쓴 사람 역시 아름다운 지식인이었다. 서슬 퍼런 권력의 대척에서 국사범으로 복역했다는 약력이 빚어낸 딱딱하고 엄격한 사상가의 이미지는 깨져 버리고 따뜻하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글은 1998년의 개정판에서 새롭게 추가된「청구회 추억」부분이다. 읽고 있는 동안 수감 중에 썼다는 무거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우연찮게 시작된 어린이들과의 만남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유년시절의 아련함을 떠올리게 하는 서정적인 동화와 같았다. 지금은 그 어린 아이들도 이미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을 테지만 당시는 순수한 국민학생이었기에 그 때 묻지 않음이 참 귀엽다고나 할까,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따뜻한 마음씨와 깊은 정이 인상 깊었다. 선생이 육군 사관학교 교관 시절, 수술 때문에 입원했을 때는 절대로 찾아오지 말 것을 당부했음에도 그 먼 길을 두 번이나 걸어서 찾아왔다가 위병소에서 거절당했단다. 그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는 것을 써놓은 부분에서는 제법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발랄한 모습 이면에 감추어진 그들의 가난한 가정형편에 대한 언급과 선생의 갑작스런 구속으로 이야기가 결말지어지는 것은 앞서의 풋풋한 추억과 대비되어 한층 더 슬프고 안타까운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데……. 중앙정보부의 이들 ‘청구회’ 단체의 정체와 회원의 명단을 대라는 심문이라니. 지금은 그것을 당시의 특수한 시대상황과 관련해 빚어진 황당하지만 다소 필연적인 일이었겠거니 치부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이는 특정한 개인의 불행과 곤혹에 그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성이 복재(伏在)하고 있는 것이다”(p.46)라는 저자의 표현에서처럼 실은 특수한 사례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일이며, 권력에 의한 압제는 과거의 독재 치하에서만 행해지던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고 다양한 형태로 일어날 수 있다는 데서 현재 우리에게도 유효한 위험일 것이다. 이 추억담은 나에게 통치 권력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생각거리를 던져주었고 일종의 강렬한 후유증을 남겨주어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고 드문드문 생각나 씁쓸한 표정을 짓게 할 것 같다.

수감되기 전의 추억을 교도소에서 하루 두 장씩 지급하는 휴지에다 깨알같이 적으면서 그는 어떤 느낌들을 가졌을까. 20대의 젊은 패기와 열정이 고독 속에 갇히면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좌절을 느꼈을 법하다. 지성인으로서 모순된 사회에 대한 이론적 정립의 의지와 매 순간을 열심히 살고자 했던 노력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징역이라는 결과로 나왔다는 것은 절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그의 감옥 생활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가려는 소망보다 그 안에서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추상을 벗고 적나라한 현실의 중심에 서려는 자세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는 그의 오랜 수감 생활 중에서 한층 더 성숙해졌을 것이며 완성되어갔을 것이다. “옥죄이는 징역살이 속에서 이나마 조용한 시공(時空)을 점유한다는 것은 흡사 옥담 위의 풀처럼 ‘귀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혼자라는 것이 결코 사람의 처소가 아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숱한 사람들의 은원(恩怨) 속 격려와 지탄과 애정과 증오의 와중에서 비로소 바르게 서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p.119) 아버님께 보내는 편지「창랑의 물가에서」의 한 구절이다. 공장수들이 출역하고 나면 잠깐 동안의 혼자만의 공간이 얻어졌다. 그곳을 엄격한 사유의 도약으로 삼으려는 와중에서도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을 나타내려는 마음가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행동하는 지성의 가장 근본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휴머니즘적 인식이 깔려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에서 바로 이러한 사람에 대한 애정은 타인과의 차이에 대한 인정과 존중으로 발전하는 듯 했다. 「짧은 1년, 긴 하루」에서는 징역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도시의 단편화된 사람 사이의 관계와 달리 오랜 시간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열어 자기 속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열린 타인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타인을 자신만큼 알기에 이르고 자기와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는 차이를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바로 그 ‘차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타인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 충분한 이해 없이 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척 와 닿는 말이었다. 우리 생활의 다툼과 소란 대부분이 자기와 다른 이들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 아니던가. 우리는 가속화되는 경쟁 체제와 개인주의 하에서 자신이 최고이며 자기 기준이 표준인 사회에 살고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 사귐의 핵심이라는 것을 많은 이들이 잊고 지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형수님께 보내는 편지 「함께 맞는 비」에서는 없이 살면서도 비누 한 장, 칫솔 한 개라도 남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핀잔이나 비난 대신 그 사람들 나름의 입장이 있음을 헤아리고 오히려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의 순수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자신의 행위 역시 반성하는 얘기가 나온다. 민감한 감수성과 고운 양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글 구석구석에 드러나는 자신의 행동을 살피는 자세는 글을 읽는 나의 무디어진 의식을 돌아보게 했다. 「창녀촌의 노랑머리」에서 “열악한 삶의 존재 조건에서 키워온 삶의 철학을 부도덕한 것으로 경멸하거나 중산층의 윤리의식으로 바꾸려는 여하한 시도도 그 본질은 폭력이고 위선입니다”(p.298)라고 얘기하는 데서도 차이에 대한 존중은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받아들임과 타인에 대한 진실한 이해가 그의 연대의식과 실천적 의지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한 그의 견해는「관계의 최고 형태」에서 집약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p.313) 묵직하고 진지한 성찰을 참신한 대유로 설득력 있게 표현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지식에 갇혀있는 학자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인간이 되려는 부단한 노력은 큰 귀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또 하나의 놀라움은 그의 뛰어난 예지로부터 왔다. 「인디언의 편지」에서 자연을 불편하고 미개한 것으로 파악하고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수긍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부분이 나온다.「쌀을 얻기 위해서는 벼를 심어야」에서는《순오지》의 건강한 정신을 앞세우는 건강법을 소개하며 경제주의적 사고의 타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모두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쟁점이 되는 얘기들이다. 몇 십 년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치부를 들추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새벽 참새」에서 “도시가 문명의 중심임은 사실이지만 문명 가운데에는 그 필요는 사라지고 전통만 남아 도리어 적응과 굴종을 요구하는, 사람이 그것을 위해 복무하는 그런 문명도 없지 않습니다.”(p.166)라고 서술한 데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사회와 격리된 상태에서 홀로 사색의 장을 열며 썼던 글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의 세속에도 이만한 울림을 주고 있다는 것에서 저자의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었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이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민중의 하층부라 일컬어지는 감옥 안의 생활에서 관념이 아닌 현실을 철저히 배우며 전진하려했던 저자의 태도는 어떠한 허무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한 자신을 발견하려는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그 움직임이야말로 어떤 억압과 폭력에도 죽지 않고 도도히 살아날 수 있는 한줄기 빛의 메시지가 아닐까. 우리가 아픈 과거사를 반추해 희망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이 책에 ‘통혁당 사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동기에서 시작된 이 책의 탐독은 그동안의 나의 사유가 많은 부분 굴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어떤 이에게는 한 생애의 목표였고 또 다른 이에게는 일생의 회한으로 남아있을 과거사 하나하나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 뜨겁고 준열했던 현장을 한낱 픽션의 소재로 향유하려고 했던 나의 철없음은 어떻게 해야 할는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박제되어 버린 옛 이야기를 살아있는 이야기로 일깨워 주었고 나의 수치스러움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조금이나마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었고 동시에 힘겹게 뼈아픈 시기를 감내하셨던 분들에 대한 무례였다. 사회 문제가 녹아 들어있는 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한 것은 그저 문화적 취향일 뿐이었음이 이렇게 명백히 드러났다. 그리고 주제넘을지 모르나 나의 반성과 관련해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예술가들이 즐겨 하는 주장 중에 예술 작품은 미학적인 가치 추구의 목적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하며 특정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다. 나는 그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고 느낀다. 어떤 이들에게는 치열한 생활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단지 보고 감상하기 위한 어떠한 것으로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사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 아니라,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은 타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진실이 배척된 형상화는 스스로에게도 결코 떳떳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차이에 대한 존중을 깨우쳐 주었다는 것에 대해 저자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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