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적 성과사회의 피로와 박카스D: 진짜 피로회복제는 ‘우리 안’에 있다
일반부문 3등작
규율적 성과사회의 피로와 박카스D: 진짜 피로회복제는 ‘우리 안’에 있다
한병철, 『피로사회』
조정희
1. 서론: 피로사회론의 첫걸음
유럽에서 날아든 <피로사회>는 저자가 한국계라는 점을 빼고라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피로’라는 개인적, 생리학적인 용어가 ‘사회’라는 집단적, 사회과학적 분석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글을 접한 것은 신선한 경험이다. 게다가 ‘피로사회’라는 저자의 개념은 뒤르껭의 ‘유기적 사회’에서 퇴니스의 ‘이익 사회’를 거쳐 마르쿠제의 ‘일차원 사회’와 보들리아르의 ‘소비사회’로까지 흘러온 유럽식 비판적 사회분석 계보에서 가장 최근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만큼 비중 있는 개념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가능하다. 그러나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는 첫 문장이 시사 하듯이 <피로사회>는 아직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진단적이다. 이미 전개된 사회를 뜯어보고 맞춰보고 해석하기 보다는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새로운 사회가 풍기는 병리성을 감지하고 경계하는 단계이다. 따라서 이 책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피로사회론’을 전개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가 21세기에 살게 될 사회는 과잉 긍정성에 현혹되고 성과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개인들이 파괴적이고 단절적인 피로에 시달리며 우울증과 신경증을 겪어야 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리고 설사 저자의 경고가 설득력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독일 사회뿐 아니라 한국이나 미국 사회에도 비슷한 경종을 울릴 수 있을까? 전자는 ‘피로사회론’의 이론적 타당성 문제라면 후자는 이론 적용의 보편성의 문제다. 이 두 문제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의 전체 얼개와 그에 따른 내용의 흐름을 미리 알아 두는 것이 좋겠다.
<피로사회>는 모두 7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한국어판에만 덧붙여진 ‘우울사회’는 논의에서 제외했다), 홀수 장은 저자의 주장, 짝수 장은 문헌 비판이라는 규칙성을 보인다. 1장(‘신경성 폭력’)은 저자의 병리학적 통찰력을 선보이면서 결론을 복선처럼 깔아놓은 서론이고, 2장(‘규율사회의 피안에서’)은 벽과 감시에 집착했던 푸꼬 비판이다. 3장(‘깊은 심심함’)은 벤야민을 빌어 ‘무위(無爲)’의 중요성을 지적했고, 4장(‘활동적 삶’)은 본의 아니게 성과사회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해준 아렌트 비판이다. 5장(‘보는 법의 교육’)은 니체를 빌어 ‘관조(觀照)’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6장(‘바틀비의 경우’)은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에 나타난 파괴적 피로 비판이다. 그리고 마지막 7장(‘피로사회’)은 한트케의 논의를 빌어 분열적 피로를 지양하고 근본적 피로를 지향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 글은 서론격의 1장과 결론격의 7장, 그리고 예외 상황을 다룬 6장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저자의 비판들이 대부분 수긍할만한 것일 뿐 아니라, 설사 미비점이 있다 해도 통찰력을 해칠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다.
2. 에이즈와 암.
1장(‘신경성 폭력’)에서 저자는 20세기와 함께 부정적 이질성과 적대적 타자성에 기반을 둔 바이러스-면역학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21세기에는 이질성도 부정성을 잃고 타자성도 적대성을 잃었다고 진단한다. 지난 세기의 갈등거리였던 부정과 적대가 사라졌다면 이제 모두 행복해 지는 걸까?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다. 오롯이 남겨진 긍정성이 과잉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사라질 줄 알았던 공포와 갈등이 이번에는 부단히 스스로를 착취하는 개인들의 내부에서 자라나온다. 결과는 광범위한 신경증과 우울증이다. 저자의 독특한 병리학적 통찰에 감탄하면서도 뭔가 미진한 느낌이 남는데, 그것은 여전히 위협적인 에이즈(AIDS)와 암(癌)이 관찰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병리학적 서론에 에이즈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의문이다. 에이즈는 명백히 면역학적 질병이며 그 원인이 타자와 외부이며 그 성격이 공격성과 부정성이라는 점에서 20세기의 질병이다. 문제는 이 20세기의 질병이 21세기에도 인류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신경증과 우울증을 강조하면서 에이즈를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이 일부 아프리카 사회나 성적 소수자들의 문제일 뿐 유럽 사회나 사회 내 다수자들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에이즈가 면역학과 생명공학의 발달로 이내 정복될 문제라고 가볍게 보았기 때문일까? 어느 경우라도 에이즈 문제는 피로사회론에 작지 않은 구멍을 뚫어놓는다. 더구나 병리학적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보면서 암의 문제를 제쳐둔 것은 심각한 문제다.
20세기 마지막 해 벽두, 월터 아이잭슨(Walter Isaacson)은 <타임>의 편집장 칼럼으로 <생명공학의 세기>를 실었다. 새 밀레니엄의 과학 발전을 10가지로 전망한 이 글의 네 번째 항목에서 그는 “21세기에는 생명공학 발전으로 암이 정복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2012년 현재 암은 아직 난공불락이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이 “암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래 미국 정부는 암 연구에 2천억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미국의 암사망률은 1950년과 2005년 사이의 55년 동안에 겨우 5퍼센트 줄었을 뿐이다. 세계 종양학계는 체내 정상세포가 왜 돌연변이를 일으켜 무한 증식을 시작하는지를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20세기에 소아마비와 천연두가 그랬듯이, 21세기에 암이 인류 질병사의 뒤꼍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는 대신 아이잭슨은 결국 암에 스러진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집필해야 했다.
저자는 성과사회에 만연된 과잉의 긍정성을 내면화한 개인들이 지속적으로 자신을 착취하면서 자기 내부로부터 시작된 적대와 공포에 시달린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는 암의 병리학적 특징과 일치한다. 생명이 긍정이고 죽음이 부정이라면 암은 긍정성에서 출발한다. 모든 세포는 일정한 횟수의 분열을 일으킨 후에 사망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런데 일부 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세포 사망 프로그램’을 회피하고 무한 증식을 시작하는데 이게 바로 암세포이다. 암세포는 그자체로는 사망을 극복한 영생의 존재이다. 이 영생 세포는 죽지 않을 뿐 아니라 무한 분열을 통해 덩치를 키워간다. 이 같은 과잉 긍정성 때문에 암세포는 다른 세포와 조직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생태계 전체, 즉 숙주인 인간을 죽이고 결과적으로 자신도 죽는다. 긍정성의 과잉 때문에 자기 안에 욕망과 기대를 무한 증식시키는 개인들이 그것의 좌절로 인해 우울증과 신경증에 허덕이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면 저자는 암을 지난 세기의 질병이 아니라 전형적인 21세기의 질병으로 분류해야 했다. 그리고 향후 전개될 피로사회론은 신경증과 우울증 뿐 아니라 암의 병리학적 특징들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미국과 한국 사회
저자는 7장(‘피로사회’)에서 피로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서술한다. 성과사회에서 개인들이 자기 착취를 계속하면서 겪는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피로가 첫째이다. 둘째는 저자가 한트케를 인용해 제시한 “근본적인 피로”인데 이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탈진 상태”가 아니라 “영감을 주”고 “정신을 태어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다. 근본적 피로는 그것이 가지는 특유의 무차별성으로 인해 “경직된 경계선을 거두”고 “우애의 분위기”를 회복시킨다. 물론 저자의 논의에서 근본적 피로는 가능태로 제시될 뿐, 분석과 서술의 초점은 성과사회의 분열적 피로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저자의 관찰 내용이 유럽 사회 밖에서도 발견되는 것일까?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를 살펴보자.
만성 피로 증후군. 암을 빼고도 21세기 의학이 치료법은커녕 원인조차 밝히지 못한 질병이 적어도 한 가지 더 있다. “만성 피로 증후군(Chronic Fatigue Syndrom: CFS)”이 그것이다. 미국의 질병통제센터(CDC)의 기준에 따르면 “일상생활의 50%이상을 저해하는 피로가 별다른 원인 없이 6개월 이상 지속”되면서 “미열, 목의 통증, 임파선 통증, 근육통, 근육 쇠약, 지속적 피로감, 두통, 관절통, 눈부심, 건망증, 주의력 집중 장애, 우울증 등”의 신체적, 신경정신과적 증상들 중에서 4-8개 이상이 겹쳐서 나타나면 만성 피로 증후군으로 진단된다. CDC 매뉴얼에는 이 증후군의 원인과 치료법은 발견된 바 없다고 되어 있다. 2012년 현재 약 1백만명 이상의 미국인이 심각한 만성 피로 증후군을 앓고 있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개별 암 환자들보다 많은 숫자이며, 이 증후군으로 인해 미국 경제가 입는 손실은 연간 91억달러(2004년 연구)에서 180억달러(2008년 연구)에 이른다.
박카스디(D). 미국의 피로 이야기를 먼저 했는데 체계적인 자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자료가 없거나, 찾기 어렵거나, 믿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피로 이야기는 박카스디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박카스는 1961년 한국 시장에 출시된 이래 50년간 판매량 1위를 놓지 않은 자양강장제로, 2010년 한 해 동안 약 3억5천만병이 팔렸고 매출액은 약 1300억원에 달했다. 박카스가 약사의 조언을 받게 돼있는 일반의약품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판매량이다. 한편 성분은 달라도 박카스와 비슷한 용도로 소비되는 비타500의 매출액도 2010년 한해에 830억원을 기록했으므로 두 피로회복/비타민 드링크제의 한 해 매출액은 2천억원이 넘는다. 게다가 최근 등장한 각종 에너지 음료 판매량이 박카스와 비타500을 포함한 피로회복제 전체 판매량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돼, 피로회복과 에너지 보충을 향한 한국인들의 갈망은 연간 5천억 원이 넘는 규모의 피로회복제 시장을 형성해 놓았다. 이는 처방전 없이 약국이나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구매할 수 있는 드링크류만 따진 것이니, 전문적 의료진단과 처방이 필요한 우울증과 신경증, 불면증과 각종 강박증 등에 관련된 의료적, 사회적 비용을 더한다면 천문학적 규모에 이를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어째서 회복할 피로가 그다지도 많은 것일까?
미국인들이 겪는 만성 피로 증후군이나 한국인들이 박카스류로 다스리는 피로는 저자가 말하는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피로이며 과잉 긍정성이 무한증식하는 성과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 착취적인 ‘활동적 삶’의 결과일 것이다. 독일 뿐 아니라 미국과 한국 사회에서도 피로사회론이 설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피로사회론의 설명에도 예외가 있음을 저자가 밝히고 있는데, 6장의 ‘바틀비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4. 제3의 피로
6장(‘바틀비의 경우’)은 독특하다. 허만 멜빌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텍스트로 삼아서 책의 다른 곳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제3의 피로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경사 바틀비>는 1853년의 뉴욕 월스트릿을 배경으로 쓰인 것이어서 21세기의 특징인 긍정성 과잉이나 성과주의, 혹은 과중한 자아의 부담으로 인한 분열적 피로 같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이다. 그런데도 바틀비는 “세계 없이, 무감각하고 멍한 상태”에 빠져 있으며 “아무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 “탈진”한 사람으로 서술돼 있다. 이 탈진은 7장에서 설명된 성과사회의 분열적 피로가 아니며, 분열적 피로를 극복해 낸 근본적 피로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제3의 피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사회 성격과 개인의 대응 사이의 부정합에서 나온다.
<필경사 바틀비>에서 규율사회에 전형적인 소외적 피로를 경험하는 것은 다른 필경사들인 터키와 니퍼이다. 그들은 단순 노동에 종사하면서 자아를 제한 당하지만 그 제한을 받아들이게 하는 규율과 훈육에 길들여져 있다. 이들이 겪는 피로는 단순 노동과 훈육으로 인한 소외적 피로이다. 하지만 바틀비는 다르다. 그는 배달 불가능한 우편물을 처리하던 직전 직장에서 참담하게 운명 지워진 자아 관념에 눈을 뜨기는 했으나 그것을 전도시킬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한 채 무기력과 탈진 속에서 쪼그라들고 사위어 간다. 바틀비가 살던 사회는 규율사회였는데도 그가 사회에 대항하는 방식은 성과사회를 극복하려는 것과 유사하다. 바틀비는 무위와 관조의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틀비가 규율사회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시대착오적이어서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고, 탈진해 버린 바틀비는 사회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제거되었다.
바틀비식의 제3의 피로는 한국 같이 성격이 어중간한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한국 사회는 독일과 같은 정도의 성과사회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멜빌이 바틀비의 탈진을 묘사했던 19세기 뉴욕과 같은 규율사회도 아니다. 아마도 성과사회 요소와 규율사회 요소가 뒤섞인 ‘규율적 성과사회’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는 분열적 피로와 소외적 피로가 뒤섞여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제3의 피로가 어떤 경로로 발생하고 범람하는지 서술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바틀비의 죽음만큼 참담하다. 무한 경쟁 속에서 스펙을 쌓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도 ‘88만원 세대’로 범주화되고 마는 젊은이들의 탈진과 청소년에서 노인에 이르는 전 연령층에서 남녀 구별 없이 발견되는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식 제3의 피로가 낳는 비극적 결과가 바틀비의 그것 못지않음을 똑똑히 읽을 수 있다.
5. 무위와 관조
저자는 <피로사회> 전편을 통해 성과사회의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피로를 화합과 회복의 근본적 피로로 전환시킬 것을 역설했다. 무엇이 근본적 피로를 가능하게 하는가? 그것은 벤야민식의 ‘깊은 심심함’과 니체식의 ‘돌이켜 생각하기’가 가능할 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무위) 그저 잠자코 바라보는 것(관조)이다. 무위와 관조를 통해서 우리는 과잉의 긍정성을 부정할 수 있고, 분노할 수 있고, 새로운 가능성의 틈바구니를 찾아낼 수 있다.
피로사회의 탈출구가 무위와 관조를 통한 근본적 피로라는 저자의 주장은 매력적이다. 특히 노장식의 무위와 관조 담론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게 실제로 가능할까? 국제 자본의 형태로 더욱 강력해진 자본의 힘이 분열적 피로를 조장하고 우애적 피로를 부정하는 원인이라면 개인들이 무위와 관조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희박한 것이 아닐까? 근본적 피로란 그저 책을 우울하게 끝맺고 싶지 않은 저자가 제시한 이론적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짧은 실험을 하나 해 보자. 저자의 제안대로 다른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멈춰서, 되돌아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보자. 화두는 뭐라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피로회복’이라는 말은 어떨까?
한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피로회복’이라는 말은 어법상 옳은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회복’이라는 말 앞에는 긍정적인 말이 오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신뢰회복’은 불신에서 신뢰로, ‘정상회복’은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피로회복’은 피로하지 않은 상태에서 피로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한국의 언중은 피로회복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피로회복’을 해석할 때에만은 어법을 무시하고 피로‘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피로‘로부터’ 회복한다는 뜻으로 새겨듣는다. 어법에 맞는 ‘피로해소’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대신 어법에 반하는 ‘피로회복’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면서 그것을 해석학적으로 보충한다.
생각을 조금 더 밀고 나가보자.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바꿔야한다는 엄격한 언어학자들을 가진 나라, ‘국민학교’를 일거에 ‘초등학교’로 바꿔버린 과단성 있는 정부를 가진 나라에서 어떻게 어법에 반하는 ‘피로회복’이라는 표현이 용인되는 것일까? 그것은 혹시 ‘피로’라는 말에 원래 긍정적인 뜻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우리는 ‘기분 좋은 피로’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피로’가 긍정적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한국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피로사회>의 저자가 말하는 ‘근본적 피로’와 그것의 중요성을 감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근본적 피로의 중요성을 느낀다고 해도 그것이 박카스류의 드링크제로 회복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근본적 피로의 중요성과 그것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관찰과 생각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런 관찰과 생각이 가능하려면 우선 현재의 관행을 멈추고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실험을 통해 우리는 ‘무위와 관조’를 통한 근본적 피로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방법론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위와 관조는 저자가 성과사회의 분열적 피로의 해소책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방법이 엉뚱한 사회나 시대에 적용될 때 오히려 비극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 ‘바틀비의 경우’가 보여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 방법론이 ‘전형적 성과사회’인 독일이나 미국에서처럼 ‘규율적 성과사회’로 규정되는 한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예컨대 규율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한국 사회에는 긍정성의 과잉과 함께 일상화된 부정성도 공존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로운 무위나 관조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순응에의 압력이 억압적 구조뿐 아니라 같은 억압을 받는 다른 성원들로부터도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율적 성과사회에서는 자유로운 무위와 관조와 함께 그것을 함께 실천에 옮길 동료들과의 연대가 여전히 중요하다. 즉 규율적 성과사회의 파괴적 피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무위와 관조가 아니라 ‘우리’의 무위와 관조가 필요할 것이라는 말이다.
6. 결론: 진짜 피로회복제는 ‘우리 안’에 있다.
<피로사회>는 징후 진단적인 책이라고 했었다. 이는 독일이나 미국 같은 성과사회에 대한 진단이자 한국과 같은 규율적 성과사회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피로사회론은 어느정도의 타당성과 보편성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피로사회론의 타당성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암과 에이즈의 병리학적 특성과 그것이 다양한 현대 사회들에 주는 함의를 더 천착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었다.
또 바틀비의 경우에 대한 저자의 재해석을 통해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이질적인 사회요소가 동시에 존재하는 규율적 성과사회에 살고 있으며, 그 구성원들은 느끼는 피로는 소외적 분투와 무기력한 탈진으로 범벅이 된 제3의 피로임을 보았다. 이 같은 제3의 피로가 박카스류로 회복될 수가 없는데,, 이는 그것들이 소외적 분투를 연장시킬 뿐 불가피하게 찾아올 무기력한 탈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성과사회의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저자는 무위와 관조의 방법론을 제시했고, ‘피로회복’이라는 표현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 대안이 시도해 볼만한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규율적 성과사회인 한국 사회의 피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무위와 관조뿐 아니라 그러한 개인들의 연대가 동시에 필요함도 살폈다. 규율적 성과사회의 진짜 피로회복제는 ‘내 안’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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