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은 병이다

일반부문 2등작

다정은 병이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전솔희


행색내기에 좋은 책이었다. 범상치 않지만, 처음 몇 페이지만 손을 탄 비범하진 않은 책으로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찾는 이가 더 없었다. 연장횟수 세 번을 꽉 채운 후에 책장을 넘겼다. 『몰락의 에티카』라니. 책 첫 장을 넘기며 아연하여 전체의 삼분의 일 가량을 채우기도 전에 황급히 책을 닫았을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전을 더듬어가며, 읽었던 줄을 다시 돌아 읽으며, 마침표에서 이어지는 첫 단어를 되뇌며 읽었다. 『몰락의 에티카』를 나는 그렇게 읽었다. 마침내 다 읽게 되었을 때 묘한 기분이 일었다. 한 권의 평론집을 읽은 게 아니라 한 사람을 읽은 것 같았다.

그래서 당연하게 또 만났다. 추워진 날씨에, 울컥한 소주 한 모금과 함께 옛 연인을 꾸역꾸역 떠올리듯 서점을 서성거렸다. 찾았다. 『몰락의 에티카』에 비하면 애교스럽기까지 한 두께다. 그럼에도 쉽게 꺼내볼 수 없었다. 또 덜컥 제목에서부터 겁을 먹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이번엔 좀 쉽다 싶다. 『느낌의 공동체』라니. Community of Feeling이라니. Community는 몰라도 Feeling은 내가 좀 알지, 했다. 어묵과 소주에 기대 우는 싸구려 추억팔이도 모두 감싸안아줄 제목이었다. 멋있고 따뜻했다.

사랑하는 시인이 없었다. 마음에 담아 언제고 꺼내 흐느낄 시도 없었다. 눈 감고 콧노래 부르듯 흘러나오는 시가 없다 한 번도 외롭지 않았다. 시라고 하면 떠오르던 딱 하나의 시와 시인과 사람이 있기는 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김영랑, 그리고 우리 어머니. 안락의자 옆 탁자 위 예쁜 액자에는 사진은 없고 이 시가 있었다. 오월의 어느 날, 신문 한 귀퉁이에 활짝 핀 모란을 배경으로 이 시가 실렸을 터다. 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울렸겠지, 생각한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나무에 새순이 돋아 연둣빛이 출렁거릴 봄이다. 연둣빛이 지나가니 어머니는 슬픈 마음이 들었을 거다. 삼백예순날 우는 대신 이 시를 오려 액자에 담아 두고 기다리셨겠지. 액자에 담긴 신문은 우그러졌지만 어머니 얼굴은 모란보다 환했겠지, 생각한다.

이제는 외롭다. 겁을 먹고 슬프다. 사랑하게 돼 밉다. 이 책을 읽은 후의 나는 이전의 나와 다르다. 『느낌의 공동체』의 저자 신형철은 나에게로 와서 중매인이 되었고 오작교가 되었다. 괴롭다. 한꺼번에 여러 명의 시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제시어가 ‘시’라면 ‘모란, 김영랑, 어머니’의 답만 내뱉던 나는 ‘손택수’, ‘박연준’, ‘황인숙’, ‘윤제림’, 특히 ‘김경주’와 ‘문태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세상에 저릿한 시가 있다니. 세상에 웃음이 자꾸 새는 시가 있다니. 세상이 놀라웠다. 시가 이럴 수 있구나. 이제는 단연코 이야기할 수 있다. 시는 그럴 수 있다. 부디 바란다. 저자는 계속 오작교가 되어 주기를.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우주로 날아가는 방 1」)를 짚으며 책을 덮고 똑같이 해보는 천치가 있을까. 눈동자를 굴리며 외로워본 적 없다하는 천치가 나다.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우주로 날아가는 방 5」)를 되뇌며 그 울음소리를 쫓는 천치가 바로 나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몽상가」중에서)를 읽고는 뿅 간 천치 또한 나다. 혼미한 몇 주를 보냈다. 시인 김경주와 나이가 같다는 저자는 “책상에 앉아 세상을 저울질하는 백면서생이 거칠고 아름다운 유목민의 노래를 동경과 질투가 범벅된 눈으로 야금야금 읽은 밤들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너의 현생까지도 음악이다.”라고 저자가 시인에게 말한다. 나는 고맙다. 시인은 부르고, 저자는 흐르는 음악을 잡아주었다. 눈으로 보는데 귀로 들리는 신기한 합주다.

시인과 시를 논한다. 아니, 이야기한다. 저자는 체계 없이 그동안의 글들을 나누었다 했다. 그런데 내게 1부에서 6부까지 이어지는 타이틀은 하나의 이야기였다. 원한도 신파도 없이,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 유산된 시인들의 사회,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기, 훌륭한 미친 이야기, 만나지 말아야 한다. 이 제목들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또 천치인가. 1부, 2부에 빠져 노를 젓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 책은 평론집이 아니라 노래집이다. 책머리에서 저자 또한 두 번째 평론집이 아니라 첫 번째 산문집이라 했다. 틀렸다. 이건 분명 노래집이다. 웬만한 후크송도 결국 이 노래집과는 싸워 이길 수 없다.

문태준 시인을 노래하는 부분에서는 가슴이 일렁거린다. "몰인정의 시대에 그의 시는 갸륵하다. 그의 다정 때문이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라 했다. 병 맞다. (중략) 저 환자의 눈에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휑하고 뻔한 인생일까 싶어진다. 그래서 돌연 아연하여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란 그런 것이다. 언제 그 맥이 끊어질지 모를 이 소중한 환후를 우리는 아껴 기린다. 그는 낫지 마라. 그래야 우리가 산다." 저자는 문태준 시인을 '부럽다'고 한다. 나는 저자의 고백을 엿들은 것 같다. 좋아하는 선배에게 고백하는 어느 후배의 모습을 목격한 기분이 든다. 그 선배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지고 용기 있는 후배 또한 궁금해진다. 문태준 시인을 이야기 한 이 평론은 나에게 훔쳐 본 고백편지가 되었다. 그가 궁금해져 참을 수가 없어졌다. 참, 바쁘게 만드는 책이다.

시인 윤제림의 노래를 이야기한 부분은 이 책을 '재밌다'고 턱 들고 추천할 수 있게 한 부분이다. "싸리재 너머/ 비행운 떴다// 붉은 밭고랑에서 허리를 펴며/ 호미 든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남양댁/ 소리치겠다// "저기 우리 진평이 간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진평이가 몬다." (「공군소령 김진평」전문) 저자가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진평이가 몬다."에서 무표정을 유지할 수, 당연히 없었다. 윤제림 시인이 근사하게 시치미를 떼도 독자도 같이 시치미 뗄 수는 없다. 조용히 행과 열에 숨을 넣어가며 읽다 웃음이 터져 눈물까지 나나게 한다. 윤제림 시인을 소개하고 근사한 시치미를 뗀다 하는 저자도 만만찮다. 백면서생인 저자는 아무래도 글만 읽지는 않았던 듯하다.

시와 시인을 노래한 부분에서 저자는 큐피드가 되었다. 그의 눈이 머무르고 매만진 자리는 영락없이 나의 사랑이 되었다. 일방적 사랑의 전언이 아니다. 나로 하여금 바쁘게 움직이게 하는 사랑이다. 그가 본 것을 내가 다시 보게 하고 백발백중 빠져들게 한다. 이런 마법이 있나. 그의 전작 『몰락의 에티카』와는 또 다르다. 『느낌의 공동체』는 팔 할이 연애편지 다.

3부, 유산된 시인들의 사회는 어쩐지 내게 단호한 선생님 같았다. 분명 화가 나신 얼굴은 아닌데 무엇인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선생님. 너희들이 꼭 이 '사랑의 매'의 의미를 안다면 좋겠구나, 하는 무언의 압박. 모르고 맞으면 아프고 억울할 터다. 그때는 정말 잘 몰랐다. 알고 맞는 매는 더 쓰고 더 아프단 것을.

'백문이 불여일청 언니네 이발관'에서 가수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를 "제목부터가 이미 시적이다. 어색한 듯 결합된 세 어절이 만들어내는 이 쓸쓸한 뉘앙스."라고 이야기했다. 그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일까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저자의 이야기 그 너머의 어떤 것까지 읽게 하는 그의 필력이 무섭다.

영화 '다크나이트' 이야기는 또 어떤가. 영화가 끝날 때쯤 엔딩 시퀀스를 보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던 나는 이 글을 보고 눈물이 쏙 들어갔다. "우리는 두 배에 나눠 타고 있는가. 80일이 넘게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 철탑에서 고공농성중인 KTX-새마을호 여승무원등과 도루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른 쪽 배에 타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죽지 않으려면 저들이 죽어야 하나. (중략) 다만 외람된 마음의 오체투지나마 다짐해보는 것이다. 그들은 망각되는 순간 죽을 터이니, 잊지 말자고 못난 문장 몇 개나마 적어보는 것이다." 저자는 마음의 오체투지를 다짐해 적었지만 그 활자에 나는 맞았다. 차마 다음 페이지로 쉽게 넘겨지지 않았다. 오체투지를 선언한 스승 앞에서 '혼자 가십시오.'라고는 도저히 못하겠다. 나도 그 배에 타고 있으니까. 이건 어느 편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이야기다.

저자의 '그냥 놔두게, 그도 한국이야'를 이야기한 부분에서 나는 홍세화와 프랑스를 만날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 수업시간마다 '톨레랑스(tolerantia)'에 대해 족히 서른 번은 이야기하셨던 영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대학생일 땐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아껴 읽었다. 신문 주말 특별 호에 그의 이야기가 실렸고 찾아 읽었다. 그가 한번은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하다 거리를 헤맸던 일화가 나온다. 쩔쩔매던 그에게 프랑스인이 말했다. "초보자라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직업에 데뷔시기는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데뷔시기! 이런 대사를 뱉는 사람이 있는 나라라니! 내게 프랑스는 톨레랑스로 이어지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쿨하고 멋진 나라였다. 관용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저자의 이야기는 글 말미에 내 허를 찌른다. "애국심이란 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증오하는 졸렬한 배타주의가 아니라 그 어떤 타자도 내 나라 동포를 대하듯 포용하는 박애 정신과 더 가까운 것이라고 믿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일은 끝내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그 사랑은 가련한 사랑이다." 이쯤 되면 저자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사전적'인 시각은 결여된 듯 느껴진다. 그 결핍마저 끔찍이 좋다면 당신도 이미 저자의 추종자가 된 것이다. 저자에게 '사전적' 시각은 없어도 가련히 여겨 문장으로 보듬어 줄 품이 있다. 단호하지만 따뜻한 그 품에 나는 계속 뛰어들고 싶다.

소설가의 이야기에 등장한 신경숙과 구스타프 야누흐, 김소연과 권혁웅. 이 부분에서 나는 뜨거워진다. 신경숙의 이야기를 하며 문학의 귀한 소임을 "타인의 신발에 발을 넣어 보기 위해서는 나의 신발을 먼저 벗어야 한다는 것. (중략) 당신의 신발을 벗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나긋함이 나를 울린다. 카프카의 편지는 "책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라며 나를 깨운다. 김소연과 권형웅의 이야기가 나의 뼈와 뼈 사이를 매만진다. 덕분에 절판된 책을 찾아 또, 바빴다. 처음으로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 같은 애틋함을 느꼈다.

이청준 선생님을 추모하며 쓴 글에서 나는 저자가 이 책을 만들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각인했을 전언을 목격했다. "그러나 이청준의 책을 전부 불태우지 않는 한, 소설은 이야기 이상이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삼국지』세트를 구입할 생각이 없지만, 완간되면 삼십여 권에 이를 고인의 전집은 구비하려 한다."는 저자는 이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피 끓는 영웅들의 활극이 아니라 피맺힌 윤리학적 상상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라 했다. 내 책장에는 현재 이청준 선생님의 전집 중 1권부터 5권이 가장 좋은 자리를 잡고 있다. 저자의 다짐을 엿듣고 따라한 것 아니다. 고등학생 때 한 대학의 백일장에서 이청준 선생님을 뵈었다. 교과서에 실린 「눈길」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분이셨다. 백일장의 마무리 때 몸을 배배 꼬며 선생님께 사인을 해달라며 책을 내밀었다. 눈보다 환하게 웃어주시며 석 자를 적어주셨다. 그 기억이 너무나 선명해 작고하셨을 때 서러이 울었다. 나는 저자의 이 글에서 마침표까지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말이 옳다.

"때로 우리는 한 배를 타게 되지만 그 배가 하늘로 날아오를지 벼랑으로 떨어질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줄을 알면서도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다"라고 저자는 책머리에서 밝혔다. 그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바람이 멈춰서는 안 된다. 저자가 끊임없이 노를 저어왔기에 우리는 만났다. 결국에는 시도, 소설도, 영화도, 세상도 하나다. 모두가 아픔이고 모두가 사랑이다. 그의 첫 평론집은 『몰락의 에티카』지만 나는 『느낌의 공동체』를 먼저 권한다. 평론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느낌의 공동체』는 저자의 바람대로 완벽하게 시가 된 산문이다. 시가 된 산문집은 읽는 이에게 흥얼거릴 노래가 될 것이라 장담한다. 나는 신형철의 노래를 들었고, 반했다. 그가 문태준 시인에게 다정도 병 맞다 이야기했듯 나도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다정은 확실히 병이다. 그는 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느낌의 공동체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내어주고, 함께 노를 저어 간다. 그러니 부디, 앞으로도, "그는 낫지 마라. 그래야 우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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