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에서 피로사회를 꿈꾸다

일반부문 3등작

피로사회에서 피로사회를 꿈꾸다

한병철, 『피로사회』

이한석


1. 상반된 첫인상

불친절하다.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이다. 부록을 포함해 겨우 백여 쪽이 넘는 에세이 형식이 자세한 설명에 적합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철학서임에도 용어의 명확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근대사회를 설명하는 ‘부정성’, ‘타자성’ 등은 이미 모더니티 비판에서 자주 등장한 용어들인 만큼 어렵지 않게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기근대의 성과사회를 묘사하고 진단하는 과정에서 ‘긍정성의 과잉’, ‘깊은 심심함’ 등의 단어들의 애매모호한 안개를 걷어내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긍정성의 과잉’은 저자가 후기근대사회의 특징을 포착하며 쓴 첫 표현이지만 『피로사회』의 본문에서 그 뜻을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부록인 「우울사회」에 이르러서야 그 단어가 ‘지배적 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개인의 순응적 긍정’을 의미한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저자가 추구하는 ‘깊은 심심함’의 의미가 보통의 ‘심심함’과 어떻게 다른지는 끝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니체에서부터 한트케까지의 기존의 여러 논의들이 『피로사회』의 배경에서 논의를 보완하고 있다는 점은 그 인용의 분량을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인용문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고 자신의 문장을 명확히 다듬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친절하다.

그러나 불친절하다고 해서 그 첫인상이 불쾌하다는 것은 아니다. ‘피로’와 ‘사회’의 합성어로 된 제목만으로도 이미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러한 불친절함과 모호함을 넘어서는 친근함이 있다. 이는 아마 피로사회라는 소재가 읽는 이로부터 멀지 않은 실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우리의 몸은 바쁨과 피로에 익숙하다. 바쁜 친구를 동경하고, 피곤해도 바쁘게 사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심지어 이미지 관리를 위해 바쁜 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에너지음료는 시험기간의 필수품이 되었으며 비소설부문에는 기운을 북돋는 자기계발서들이 베스트셀러로 올라온 지가 오래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언제든 심심함을 메울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SNS공간은 고된 일에 대한 엄살과 일이 끝난 후에 찾아오는 주체할 수 없는 심심함으로 떠들썩하다. 이 사소한 현상들은 비록 그 발생영역과 의미는 제각각이지만, 피곤을 낳은 바쁨을 도리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서 발생한 현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논의라는 점에서 이 책은 누구에게나 다가설 수 있는 친근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첫인상만으로 책 한권을 가볍게 평가해버리는 것은 분명 무리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글의 외면과 내면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면 외면의 상반된 경향은 내면과도 조응하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상의 상반된 첫인상이 발견되는 원인은 책의 내용과도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소재의 친근성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말하는가와 연관되고 말하기 방식의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명확하게 포착하고 드러내는가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이 첫인상을 실마리로 『피로사회』의 성과와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피로사회』는 앞서 확인했듯 피로로 가득한 일상의 문제점을 ‘피로사회’라는 명명을 통해 포착하고자 한다. 그동안 건강의 측면 외에는 조명받지 못하던 피로가 어떤 사회구조에서 배태되었으며 왜 문제적인지, 이 피로사회가 근대성의 역사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73)는 저자의 마지막 말은, 피로가 단순히 우리에게 부담스럽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현실의 피로사회를 극복해나가는 실마리로서 피로의 의미를 재음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피로사회』의 성과와 한계를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직면한 현실로서 피로사회를 살펴보는 대목과 나아가 그 현실을 극복하는 기획으로서 긍정적인 피로사회를 구상하는 대목일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두 부분을 나누어 각각 앞의 첫인상과 어떤 영향관계를 맺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몸으로 느끼던 현실의 피로사회

지금까지 근대사회를 이해하는 모델은 ‘면역학적 체계’라 부르는 방식이었다. 이 체계는 금지형의 부정적 명령으로 유지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피로와 바쁨의 문제들은 하나같이 갈등과 억압의 징후를 결여하고 있다. 예컨대 에너지음료와 자기계발서는 구성원에 대한 갈등과 억압이 아니라 격려와 긍정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구성원들은 자신의 바쁜 삶에 자부심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한병철은 이러한 현재의 사회는 기존의 모델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그러한 모델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명령의 부정성을 설명상의 핵심으로 삼는 까닭에 기존의 근대모델은 부정성이 결여된 피로사회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이 바쁘고 피로한 일상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신경증적 체계’ 즉 피로사회라는 새로운 틀을 도입한다. 후기근대사회는 경제적 효율성을 제한하던 이전의 금지명령들을 해제하고 오히려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더 높을 효율성을 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탈규제사회에서 구성원들은 금지의 명령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는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더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향상된 성과를 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할 따름이다. 요컨대 후기 근대사회의 구성원은 일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를 얻은 듯하지만, 그 자유는 오로지 노동을 향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점에서 강제나 다름없다. 피로사회의 구성원인 성과주체들은 자유에서 비롯하는 끊임없는 내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기착취와 탈진에 이르게 된다. 저자는 성과주체를 탈진으로 끌고가는 이 감각을 자아-피로라 부른다.

성과주체의 자아-피로는 우리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피로라는 점에서 이전의 모델이 설명하지 못한 과잉긍정의 현상들을 파악하는 데에 유용하다. 바쁨을 긍정하는 사회분위기는 더 노동할 수 있는 자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성과주체의 성격 그 자체이다. 자기계발서와 에너지음료의 호황은 성과주체의 심리구조를 반영한다. 자유에 대한 긍정이 육체적 한계에 부딪혔을 때, 자신의 자유와 성과에 대한 믿음을 지켜주고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현대 성과주체들이 의지하는 종교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무장의 효력이 다할 때, 현대에 만연한 질환인 우울증이 찾아온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피로에 찌든 성과주체는 자유라는 긍정적 명령에 부응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무력함의 경험이 바로 우울증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심심함에 대한 현대인의 감각 역시 자아-피로가 가지는 지각/주의 구조로 해명될 수 있다. 성과의 다다익선 체제에서 하나의 일에 오랫동안 매달리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자연히 성과주체는 더 높은 성과를 위해 여러 일에 주의를 기울에게 됨으로써 자신의 주의는 파편화된다. 이러한 주의구조에 익숙한 성과주체에게 심심함은 주의를 기울일 만한 자극이 없는 까닭에 낯선 것이다. 또한 심심함은 노동이 결여하기 때문에 자신이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과 같아서 참을 수 없는 감각이다. 바로 성과주체의 이러한 심심함을 언제 어디서나 해소해주는 매체로서 스마트폰과 SNS공간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작 일상의 현상에 무력했던 기존 모델과 달리 저자가 도입한 피로사회 개념은 잡다해보이는 일상의 현상들을 일관성있게 설명할 길을 열어주었다.

나아가 저자는 이렇게 자아-피로로 얼룩진 피로사회의 구조를 단순히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평가함에 이른다. 자아-피로는 기본적으로 내적인 성과압박을 받는 모든 성과주체가 우울증의 잠재적 환자임을 드러낸다. 또한 자아-피로가 낳은 지각의 파편화는 인류의 문화를 이끌어온 강한 집중력과는 정반대의 것이기도 하다. 파편화된 주의는 철학과 같은 깊은 사색, 성과와 무관한 예술적 행위를 소화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의 피로사회는 야만적이고 반문화적인 사회로 나아갈 위험을 안을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나아가 개인의 지각이 파편화될 뿐만 아니라 사회속의 개인 역시 원자화된다는 점에서 자아-피로는 문제적이다. 성과주체는 오로지 자신의 노동에만 몰두하여 성과를 올리기에도 바쁘다. 타자와의 만남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효율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과주체들은 자아-피로를 함께 나눌 수도 없고 나누려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는 점차 소멸한다. 이러한 성과주체는 사회 전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공동체에 대한 고려는 성과주체에게 사치에 불과한 것이 라는 점에서 피로사회의 위험성이 발견된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피로에 대한 우리의 달갑지 않은 직관적 느낌이 단순히 한 개인의 육체적 건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자아-피로는 성과주체가 더 이상 문화적인 것에 관심이 없으며, 타자와의 소통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우울하다는 신호이다. 즉 우리가 느끼는 피로란 성과주체의 혹사당한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사회 전체를 자기파괴의 도정으로 이끌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피로감의 일반적인 해결책은 그 피로감을 외면하여 그것을 긍정적으로 극복하려는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자기계발서와 에너지음료를 통해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다잡고 스마트폰과 SNS공간을 통해 짜증스러움을 해소함으로써 다시금 노동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기를 도모했던 것이다. 이에 한병철은 그러한 정신무장은 결코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며, 우리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피로의 문제가 단순히 쉽게 외면해버리면 되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불쾌함은 단순히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위험의 신호라는 것이다. 요컨대 막연하게 불편함으로만 다가오는 피로가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성을 안고 있는지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그의 비판이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3. 미래의 피로사회를 꿈꾸다

저자는 이러한 자아-피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피로사회를 구상한다. 그의 구상은 자아-피로에 의해 천박한 삶으로 이끌려가는 현실의 피로사회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인간이 노동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점에서 저자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사회의 모습 역시 피로사회이다. 그러나 미래의 피로사회 구성원들은 한트케의 우리-피로라는 새로운 피로를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깊은 심심함과 사색적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의 피로사회와 구별된다. 우리-피로는 노동 사이의 막간의 시간을 통해 타자와 만나 관계를 형성하거나 사색할 여유가 있는 문화적 감각이다. 지각의 파편화를 지향하는 자아-피로와는 달리 우리-피로는 주체적으로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주체성은 사색적 삶으로 이어짐으로써 자아-피로가 외면했던 문화적 활동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아-피로와 천박한 삶의 대척점에 서있는 우리-피로와 사색적 삶으로 저자는 새로운 피로사회를 그리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구상이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상반된 두 피로사회 사이의 심연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가이드를 필요로 할 것이다. 성과주체가 우리-피로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고, 그 경험이 추구하는 사색적 삶이라는 목표가 이정표로서 확보될 수 있을 때 그의 논의가 이상사회에 대한 헛된 묘사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피로사회』는 성과주체가 우리-피로와 사색적 삶을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히 답변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저자가 피로의 본질을 놓침으로써 발생한다. 피로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노동의 결과로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가 능동적으로 경험하는 노동과 심리태도의 변화를 시도할 수는 있지만 노동의 결과로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피로의 성격은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어떤 피로를 경험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어떤 노동을 어떤 심리적 태도로 대하는가에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피로가 전제하고 있는 노동의 모습은 노동 시간 외에는 성과와 효율에서 타자를 만나고 사색적 삶을 허용하는 형태로, 언제나 성과에 시달리는 성과주체의 자기착취적 노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다. 이에 현실의 성과주체들이 우리-피로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저자 스스로 설명했듯 자아-피로를 느끼는 성과주체는 그 행동·심리 양식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자아-피로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착취적 노동 구조가 해결되지 않는 한 성과주체들이 우리-피로를 경험하는 일은 우선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성과주체의 자기착취적 노동은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시도한다 하더라도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심심함과 다를 바 없는 우리-피로를 견디는 일은 성과주체에게 불안과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만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노동의 성격 변화를 빠뜨린 채 우리-피로와 사색적 삶의 모습만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피로사회』가 그리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현실화되기 어렵다. 미래의 피로사회에 다가서기 위해 바뀌어야 할 것은 주체의 모습이지 피로의 성격이 아니다.

긍정적 피로사회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저자의 불친절한 화법이 두드러지는 까닭은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피로를 설명하면서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는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조차 않은” 친절의 공간, 무차별의 공간이다” (67~68)며 함축적인 한트케의 말을 직접인용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풀어서 설명해주지 않는다. 또한 이 묘사의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조차 않은’, ‘친절’ 등의 단어들처럼 미래의 피로사회에 대해 묘사하고 인용할 때면 저자는 이상적인 단어들을 나열할 뿐 왜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은 빠뜨린다. 나아가 저자는 사색적 삶과 성과주체의 삶을 각각 문화와 야만의 이분법적 도식에 대응시킴으로써 전자의 가치를 당위적으로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우리-피로와 사색적 삶의 가치가 이상과 당위의 차원에서만 확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치는 당위성을 선언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각 개인에게 절실하고 가까운 목표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성과주체가 어떠한 변화를 통해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미래의 이상과 당위를 반복해서 환기한다는 것은 거꾸로 그 미래상이 현실과 관련을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미래에 대한 구상은 현실의 성과주체에 의해 도달불가능한 과제이지만 동시에 도달해야할 과제라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순을 건너기 위해 이상적 단어의 나열과 직접인용과 같은 불친절한 화법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인 사색적 삶은 일관적인 모습을 이루지 못한다. 인류 문화의 원동력으로서 그가 묘사하는 사색적 삶은 최소한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예술적 방식으로 드러나는 사색적 삶이다. 이는 앞서 우리-피로처럼 자극을 주체적으로 소화하고 반응 (표현)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이다. 이는 결국 성과주체가 보이는 지각/주의의 파편화에 대항하여 전일하고 주체적인 지각/주의의 회복을 도모한다는 그의 이상과 부합하는 삶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색적 삶의 두 번째 양상으로서 제시되는 무위(無爲, nicht-zu)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는 사색의 본질적 특성으로 무위를 들면서,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에 도달하려 한다” (53)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위의 삶은 오히려 자극과 반응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자극을 초월하려는 노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미래의 피로사회에서의 삶과 예술적 양식으로서의 사색적 삶이 건전한 주체에 의한 자극의 건강한 처리를 지향하는 반면, 무위적 양식으로서의 사색적 삶은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주체를 지향한다는 비일관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일관적이지 못한 사색적 삶의 구상은 현실을 타개해나가는 방향설정에 혼선을 빚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는 점에서 그의 미래 구상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 역시 근본적으로 『피로사회』의 불친절한 말하기 방식과 관련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종류의 사색적 삶의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두 양식을 동일하게 이해한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 즉 무위의 피로다” (72)라고 했을 때, 저자는 영감을 주는 예술적 삶의 양식과 무위의 양식을 거의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상술했듯 이 두 양식은 하나로 뭉뚱그려질 수 없으며 외부 자극에 대해 이질적으로 반응한다는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이러한 동일시가 가능했던 데에는 두 삶의 양식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다만 이상적인 것으로만 제시된다는 저자의 불친절함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책 전체를 통틀어 저자 스스로 두 삶의 양식에 대해 각각 분명하게 설명한 바가 없었다는 점은 거꾸로 저자가 묘사하는 사색적 삶을 비일관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이 오독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러나 피로사회의 불친절한 설명에 대해 이러한 오독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의 긍정적 피로사회에 대한 구상이 더욱 정밀해질 필요가 있음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 다시 첫인상으로

이상에서 『피로사회』의 성과와 한계를 확인함으로써 외면에 대한 상반된 첫인상이 결코 내용상으로도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우선 『피로사회』의 성과는 현실의 피로사회를 설명한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기존의 모델이 설명하지 못한 피로라는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였고 나아가 피로가 가지는 개인적·사회적 위험성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저자가 집중한 피로라는 현상이 우리의 일상과 가깝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설명상의 불친절함에도 불구하고 경험을 바탕으로 실제 현상들을 피로사회의 일부로 설명할 수 있었으며, 이미 몸으로 느끼던 막연한 피로감의 실체에 다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이 느끼는 피로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듯이 『피로사회』의 불친절한 설명의 문제 역시 더 내용상의 한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피로사회』의 한계는 미래의 피로사회에 대한 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자가 그리는 피로사회가 이상적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이 책은 그 이상을 제시하고 묘사할 뿐, 그 이상의 도달가능성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성과주체에게 미래의 피로사회란, 최선의 경우라해도 도달해야 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내적 갈등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공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불친절한 설명은 두드러지는 양상을 보인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넘어서기 위해 당위적·이상적 표현과 직접인용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의 지향점으로서 사색적 삶을 대표하는 두 양상이 서로 합치될 수 없다는, 일관되지 못하다는 한계를 보인다. 나아가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 불친절한 화법으로 인해 이 비일관적인 두 양상을 모호하게 뒤섞음으로써 이상을 향한 이정표의 역할을 다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비록 몸에 와닿는 가까운 일상을 의미있게 포착했다는 의의를 가지지만 고단한 현실과 대비되는 이상을 제시해놓고도 그리로 향하는 길을 얼버무려놓은 이 불친절함은 단순히 짧은 분량에서 기인하는 무뚝뚝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야속함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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