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정적 유토피아를 향한 걸음, ‘복지국가+α’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잠정적 유토피아를 향한 걸음, ‘복지국가+α’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이성영
책을 읽기 전
일단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어감이 좋다.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 유토피아를 교조화시키지 않겠다는 함의가 담긴 듯하다. 인간의 이성은 미래를 내다보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 실존의 한계를 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데 기본 전제가 되는 것은 ‘겸손함’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유토피아의 상과 유토피아로 가는 방법은 끊임없이 교정될 수 있다는 겸손함이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용어에서 묻어나는 듯하다.
책을 읽은 후
2012년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의 한 축은 ‘복지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사람들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인 주거, 의료, 교육 등의 요소에서도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기 어려운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을 생각해보면 ‘복지국가’라는 시대정신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복지국가’에 대하여 보편적 복지, 선별적 복지, 잔여적 복지 등 수많은 ‘복지’ 담론들이 펼쳐지고 있고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를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내어 놓고 있다. 가히 복지의 ‘백가쟁명’ 시대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사회에서 홍기빈의 저작,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이하 『비그포르스』)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또한 ‘복지국가’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상일까?
1.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의 함의
좌우의 프레임을 뛰어넘어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경제학에 대해 고민한 홍기빈의 역작 『비그포르스』에 담긴 통찰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별히 대안체제로서의 ‘잠정적 유토피아’에 담긴 함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유토피아’라는 단어에는‘인간 사회가 지향해야 할 세상’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한 세상이 그려지면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향한 꿈을 꾸고, 유토피아를 이룰 방법을 모색하는 지혜를 찾고, 유토피아를 이루어 가고자 하는 힘과 용기를 얻는다.
하지만 당장 내일 일도 알 수 없는 오늘의 인간이, 이성의 한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시간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궁극적인 유토피아’를 설계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인간의 영역 밖에 있는 일이다. 상상의 영역에 있는 그 유토피아를 소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객관화시킨다는 것은 ‘종교’의 영역을 ‘과학’으로 풀겠다고 하는 발상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시간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낙원은 우리가 ‘상상’하되 ‘설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현실보다 한 걸음 더 나간 내일을 ‘설계’하고 실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시 말해, 오늘의 문제를 인식하고 오늘의 문제가 해결된 내일을 그려보고, 내일로 가기 위한 오늘의 노력에는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실험가능한 ‘과학’의 틀 속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잠정적 유토피아’가 가지는 힘이 있다. 백년, 이백년 후의 낙원이 아니라 대중이 느끼는 오늘의 절실한 문제들이 해결된 10년, 20년 후의 미래상인 ‘잠정적 유토피아’는 종교의 영역에 있던 ‘유토피아’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실현가능한, 그리고 수정가능한 미래계획을 제시한다. 또한 아무런 방향성 없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단편적 사회공학’이 가지는 위험성은 파편적인 개혁들의 충돌로 인한 역사의 후퇴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잠정적 유토피아’는 방향성과 비전을 내포하고 있기에 칼 포퍼 식의 ‘단편적 사회공학’이 가지는 위험성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팍팍한 오늘의 삶이 좀 더 나아진 내일의 모습은 대중들에게 실현불가능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손을 조금만 뻗으면 잡힐 것 같기에 응집력 있는 대중운동의 발화점이 될 수 있다.
비그포르스는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양분하고 있던 20세기 초중반의 시대 속에서 잠정적 유토피아로서 ‘나라살림의 계획’을 구상하여 복지국가 스웨덴의 근간을 세웠다. 비그포르스의 ‘나라살림의 계획’은 교조적이고 궁극적인 유토피아의 상이 아니라 수정가능한 작업가설로서의 잠정적 유토피아이다.
비그포르스가 제시한 ‘잠정적 유토피아’인 ‘나라살림의 계획’은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한다. 1차 세계대전, 대공황과 같은 세계사의 굵직한 위기들 속에서 경제 결정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이 더욱 잘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거나, 혁명을 기다려야 한다는 등 정책적 무능력을 드러냈지만 비그포르스와 사민당은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응책인 국가의 공공지출을 통한 대규모 생산적 산업 조직 및 실업대책 등이 담긴 ‘나라살림의 계획’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스웨덴 사민당은 ‘나라살림의 계획’을 통해 스웨덴 경제의 회복을 이끌었으며 여기에서 얻은 정치적 지지를 기반으로 더욱 구체적인 복지국가의 틀을 닦아나갈 수 있었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성공은 사민당 페르 알빈 한손 총리의 탁월한 정치력과 비그포르스가 이론적 틀을 만들었던 ‘나라살림의 계획’이라는 잠정적 유토피아의 모델의 결합에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경제 결정론적 패러다임을 뛰어넘은 ‘잠정적 유토피아’에 기반한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은 소련의 마르크스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역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 오늘날 대안적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다.
2. 오늘날의 잠정적 유토피아로서 ‘복지국가’ 검증
비그포르스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20세기 초반과 21세기 초반인 오늘의 공통점은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양분했던 시대 속에서 새로운 대안체제가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은 지구를 양분했던 두 체제가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굵직한 위기들 – 1차 세계대전, 대공황, 2차 세계대전 – 속에서 드러났다면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마르크스주의가 무너지고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신자유주의 역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위기 속에서 하나의 대안으로서 ‘사회민주주의’가 자라나고 있었다면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시효가 끝나가는 오늘날까지도 새로운 대안체제가 ‘사회민주주의’ 외에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21세기의 한국에서 ‘잠정적 유토피아’로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까?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불이 넘었지만 대한민국은 더욱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많은 구성원들은 살아가는 것이 더욱 팍팍해진다고 느끼고 있다.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은 탓일 것이다. 개발독재 시절 대한민국의 성장을 위해 저곡가 정책으로 농민들이 고통을 분담했고, 저임금 정책으로 공장의 노동자들이 성장을 위한 고통을 나누었기에 이제는 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누는 재분배 중심의 복지국가 정책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내수시장의 강화를 통한 경제활성화를 도모한다는 측면에서 재분배를 강화하여 서민들의 가처분소득을 증가시켜 준다는 것도 복지국가 정당성 논리의 한 축이다.
이렇듯 일국(一國)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의 한국이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잠정적 유토피아’로 삼는 데에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세계적 관점으로 눈을 돌려보면 현재의 사민주의 복지국가로 당면한 위기들을 해결해 나가기가 어려워 보인다.
3. 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해법 : 복지국가+α
노동과 화폐와 자연을 상품화시킨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늘 주기적인 불황이 찾아오며 체제를 흔드는 위기가 도래할 때마다 제국주의의 확장을 통한 식민지 착취나 대규모 공공지출과 같은 대안을 마련하면서 위기를 넘겨왔지만 오늘날 맞고 있는 위기는 이전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부동산투기와 금융이 결합해 만들어낸 2008년의 경제위기는 전통적인 불황 대처방식인 대규모 공공지출, 양적완화 정책 등을 사용해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금융위기가 재정위기로 번지면서 세계적 불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스웨덴이 복지국가의 틀을 안착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사민당이 ‘나라살림의 계획’이라는 플랜을 통해 1930년대 초반의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복지국가의 기본적 틀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민주의 복지국가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는 위기대처 방식으로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어서기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의 국가경제는 세계경제 내의 종속성이 20세기 초반에 비해 더욱 커져있는 상황이기에 단순히 일국적 해법만으로 풀어나가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또한 무한생산・무한소비에 기반한 지하자원 투입형 자본주의 방식의 임계치가 도달했다는 경보 – 오일피크, 지구온난화 등 - 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즉, 근대를 지탱해왔던 자본주의의 유효기간이 끝나간다는 조짐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오늘의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위기, 그리고 맞이할 위기는 이전의 자본주의 틀 내에서의 위기와는 본질이 다른 위기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연 비그포르스가 꿈꾸었던 ‘나라살림의 계획’에 기반한 스웨덴 복지국가는 오늘의 ‘잠정적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혹여 20세기의 복지국가 체제가 21세기에는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급급한 ‘단편적 사회공학’으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오늘의 ‘잠정적 유토피아’를 모색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틀은 일국적 틀에 한정시킬 수 없다. 세계적인 불황,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오일피크를 지난 석유자원의 고갈 등은 근대의 체제를 전복시킬만한 위기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복지국가’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잠정적 유토피아의 상’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구적 규모 차원의 위기들에 대한 해법이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 ‘복지국가’와 함께 지구적 규모의 위기에 대한 해법이 함께 모색되지 않으면 ‘복지국가’ 체제는 비그포르스가 비판했던 ‘단편적 사회공학’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교조화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잠정적 유토피아’를 제시한 비그포르스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매우 유효하고 적절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에 기반한 잠정적 유토피아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비그포르스의 시대와 다른 오늘날 당면한 위기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늘에 당면한 위기와 현실 속에서 새롭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일국적 틀 속에서의 해법인 복지국가에 더하여 세계적 틀 속에서의 해법인 α가 필요하다. 이 α는 아직 흐릿하지만 칼 폴라니의 ‘지역적 계획경제’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듯하다. 또한 세계체제론적 문제의식을 안고 있는 창비 진영에서 제시하는 ‘동아시아 공동체론’도 세계적 틀 속에서의 해법 α를 고민하는 있는 흔적이 보인다.
오늘날의 ‘잠정적 유토피아’를 찾기 위해서는 학자들 간의 연대를 통한 잠정적 유토피아에 대한 이론 구축과 국가들의 연대를 통한 지역블록에 대한 모색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즉, ‘잠정적 유토피아’를 이루어가기 위한 ‘상호보완’과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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