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그들이 각성하길 바래?」를 읽고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정말로 그들이 각성하길 바래?」를 읽고
원동은
불현듯 1년도 더 전에 읽었던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국·내외의 영화들을 통해 대한민국의 인권 현실을 되돌아보는 내용의 책인데, 지면의 일부를 자본가들, 그리고 그들과 한통속인 국가에 의해 짓밟히는 ‘노동자 인권’에 관한 것으로 할애하고 있다. 저자의 시선이 맑스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현재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병폐를 적절히 짚어주고 있는 듯했다.
저자가 노동자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소개한 영화는 1984~1985년 영국에서 일어난 탄광 파업의 전후(前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빌리 엘리어트」와 「브래스트 오프」였다. 1984년 당시 영국의 석탄 산업은 국영기업인 석탄 공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나, 적자가 누적되자 마가렛 대처는 수익성이 낮은 탄광들을 폐광하기로 결정했고 치밀한 준비 끝에 노조의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영국에서 당시 가장 강력한 노조였던 전국탄광노조가 대처 총리에게 항복을 선언하게 된 이 사건은 이른바 ‘영국병’을 치유한 상징적인 사례로 지금도 널리 인용되고 있다(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창비, 2010, p.167.). 그러나 당시 대처 총리가 파업을 무력화시킨 것은 노조의 동지애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단결력에 금이 가도록 만드는, 몹시도 악랄하고 비인간적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체제 유지를 위해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였다. 「빌리 엘리어트」와 「브래스트 오프」는 지배계급의 ‘빛나는 승리’ 뒤에 감추어진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 그리고 결국 패배하는 현실을 그려낸다.
현재 대한민국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다를 뿐이지, 본질은 영화 속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 노동자들이 뭉치는 게 두려우니까 각종 구별과 차별들로써 노동자 간의 분열을 조장하고, 근로기준법에서 천명하고 있는 ‘정당한 해고’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힘드니 얼토당토않게 법을 개정해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채용을 단행한다. 근로기준법이 ‘근로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지 오래되었고, 그러다보니 노동법이 해를 거듭하며 개선이 아니라 ‘개악’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유연하고 탄력적인 노동시장’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을 하지만 실상은 노동자들의 숨통을 조이는 것들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힘없는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자본가에게 제대로 된 입장 표명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 현실이며, 자신들이 유일하게 자본가에게 판매할 수 있는 노동력 상품은 해마다 평가 절하된다. 석탄 형성과정을 설명하던 지질 선생님이 탄광은 탄광 소유자의 것이라고 말하자, 아이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탄광주가 석탄을 만든 것도 아닌데 왜 석탄이 탄광주의 것이냐?”라고 힐난하는 「빌리 엘리어트」 속 한 장면에서 「정말로 그들이 각성하길 바래?」와 교차점이 생긴다.
「정말로 그들이 각성하길 바래?」는 기본적으로 저자 박현욱이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자본이나 국가 권력이 아닌 노동자 민중에게 본질을 꿰뚫어보고 제대로 된 행동을 할 것을 소리 높여 촉구하는 책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이러한 외침은 자본과 국가 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비판, 그리고 노동 해방에 대한 염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피를 토할 기세로 투쟁하다가도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머리띠를 풀고 사측 간부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함께 하는 노동조합 지도부에게, 그리고 진짜 적과 진짜 아군을 구분하지 못한 채 끝까지 사장은 ‘님’이고 정규직은 ‘놈’이라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그리고 ‘노동 존중’과 ‘자본가 각성’을 원하는 이 땅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쓴 소리에는 누구보다도 노동자를 걱정하고 아끼는 저자의 진심이 담겨있는 듯했다. 반면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몹시도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도 그럴 것이, 2012년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는 것 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한 가족’임을 내세우는 기업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파업이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수십 명의 사람들은 목숨을 잃는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인정하는 하에서 최소한의 정상적인 노동력 재생산비를 요구하는 이들의 지극히 당연한 외침이 언제나 그렇듯이 국가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혹은 탄압을 받거나, 그것도 아니면 언론에 의해 조롱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실로 정상적이라 할 수 없다. 맑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가치가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가치의 실체가 노동이라는 소리이다. 이는 비단 맑스 혼자만의 견해가 아니었다.「통치론」의 저자인 로크도, 자연이 제공한 것에 인신의 연장인 ‘노동’을 가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노동이 부가한 무언가로 인해 타인의 공통된 권리가 배제되며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존 로크, 『통치론』, 강정인·문지영 옮김, 까치글방, 1996, p.35.) 맑스와 완전히 일치하는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더라도 ‘노동’에 관해 유사한 인식을 하고 있는 학자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로 노동력의 재생산비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은 받을지언정, 자신이 생산해낸 상품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그에 맞는 보상을 받고 잘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치를 창출해낸 자가 정작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당연하다는 듯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남는 음식이 너무 많은데, 그와 정 반대에 있는 다른 한 쪽에서는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고 있어야 한다. 한 쪽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하지 않아도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일 년에 설날과 추석 이틀 빼고 363일을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도 여전히 궁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인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철저히 모순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에 기반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서문에서 밝힌 할머니와의 일화는 너무나도 뼈아프다. 저자의 할머니는 척추 뼈 하나가 아예 삭아 없어져버릴 만큼의 노동력을 투입해 가치를 생산해냈는데, 그토록 숭고한 행동이 대우받기는커녕 ‘어디 가서 얘기하지도 못할 창피한’ 이야기로 취급받는다. 생산수단의 소유를 이유로 진짜 노동을 하지 않는 이들이 노동하는 사람들 위에 군림해 그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려면, 또 그러한 지배가 정당화되려면, 어쩔 수 없이 노동은 창피한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분노하고 이 책을 통해 그를 낱낱이 고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지지 않기를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당부한다.
자본이 생산수단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하는 것에는 생산수단, 즉 자본과 노동력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상품 생산 과정에서 자본가들이 가져가는 이윤의 원천인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은 노동력뿐이다. 자본은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를 상품에 이전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시초 축적이라고 불리는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오늘날의 자본가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휘하에서 노동력을 발휘한 결과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노동자를 더욱 잘 착취할 수 있을까만 연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적반하장인 현실이다. 실제로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를 늘리기 위해 노동자로 하여금 연장 근무, 야근, 특근 등을 밥 먹듯이 하도록 만들고, 그 와중에 만신창이가 되는 노동자의 삶의 질과 건강은 관심 대상에 두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노동 강도를 견뎌내지 못하는 노동자는 그저 해고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갖지 못해 생존을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절대 다수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렇듯 노사 간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최소한의 노동력 재생산비 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면서 장시간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자본가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주기를 간곡히 외치는 것이 바로 파업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에게는 그런 노동자들이 그저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뿐이다. 그들에게 노조란 그저 귀찮고 애 먹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노조의 힘을 무력화할 수 있는, 즉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교묘히 이용한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제도를 만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그들 사이에 동질감을 떨어뜨려 사실 그들은 서로 힘을 합해야 할 ‘노동자’이고, 진짜 적은 ‘자본가’임을 잊도록 만드는 것이다. 혹은 성과급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유대를 약하게 만들고, 임금수준은 더욱 떨어뜨리며, 그러면서도 ‘자본이 문제’라는 생각 대신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더욱 열심히 해야지’하는 생각을 갖도록 만드는, 일석 삼조의 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종종 이러한 연봉제와 성과급제 하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성공한 노동자의 모습이 이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슈’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한 노동자가 거의 없다는 반증임을 나타낸다. 저자는 자본가들의 각종 악랄한 수법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말고, ‘노동해방’이라는 명확한 지향점을 위해 움직일 것을 노동자들에게 당부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하기는, ‘최저생계비만 가지고도 황제 같은 생활을 했다’는 국회의원(최영훈, 「차명진 의원 “최저생계비 6300원으로 황제생활 체험”」, 『서울신문』, 2010.07.27)이 나오고, 이에 더해 ‘야근은 축복’이라고 말하는 한국은행 총재(디지털뉴스팀, 「“야근은 축복”이라는 한국은행 총재…직장인 짜증 폭발」, 『경향신문』, 2012.09.18)가 존재하는 세상이다. 도대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싶으면서도, ‘평생 단 일주일도 최저생계비만으로 살아본 적이 없고, 온 몸에 이상 신호가 올 만큼 장시간 스트레스 받는 노동에 시달린 적이 없어 그러나보다’하고 귀를 닫는다. 이에 더해 40년을 일하고 받은 돈이 고작 11만 원인 인도의 여성 노동자가 ‘최저 임금 노동자’로 기네스북에 오른다고(라이프팀, 「전 세계 최저 임금 얼마? 印 여성, 40년 일하고 11만원 벌어」, 『한경닷컴』, 2012.10.28,) 하니, 비단 대한민국의 문제만은 아니고, 전 세계에 뿌리박힌 자본주의 전체의 문제인 듯하다.
요즈음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경기 침체와 불황들이 자본주의에 적색경보를 발령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면모를 빨리 깨우치고 ‘각성’하든지, 아니면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갇혀 자신들이 그토록 유지하고자 했던 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일 안 하며 월급 받는 니들은 유죄’라며 사장을 향해 쓴 소리를 내뱉는 한국의 한 힙합 래퍼의 노래 가사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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