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하는 놀이
새내기부문 2등작
부정하는 놀이
한병철, 『피로사회』
이어진
최초의 부정
이번 학기에 내가 듣는 어떤 수업들은 자신의 주체적이고 또한 논리적인 사유의 영역을 형성했을, 혹은 형성할 것을 요구한다. 전적으로 독창적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는 내 고유한 접근과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이 요구는 내게 있어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영역은 자아와 타자의 존재를 전제한다. 나와 나 아닌 것은 어떤 지점에서고 대척점을 가지게 되고, 새로운 외부 자극은 하나의 질료로서 색인이 매겨져 내 인식 체계와 지식 구조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제껏 내가 수행해왔던 과업은 ‘나’의 무한정 팽창에 가까웠다. 이전의 나의 세계에서 ‘내 것’이 아닌 지적 대상들은 내가 섭렵하고, 이해하고, 언젠가 포섭해야 할 정복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입장에서 내 자아의 ‘접촉면’은 바깥을 향해 개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옳고 그르다거나, 흡수의 대상이 될 지식이 과연 어느 부분에서 비판받을 수 있는지는 관계없었다. 사실 그것은 내가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었다. 그런 식의 ‘학습’을 요구받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나 또한 그 방식에 저항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러한 지적 기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저항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은 곧 비용이었던 까닭이다.
‘집어삼키는’ 공부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고 성과가 있었지만, 여하간 최근 개인적으로 맞닥트린 ‘성찰하는’, ‘거리를 두는’ 공부에의 요구는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되어왔던 참이었다. 그러던 내게 책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시선을 떼기 어려운 것이었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책 48쪽
이러한 텍스트조차,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활동의 연속이자 과잉된 주의로 나는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천박함을 비판하는 글을 천박하게 읽고 있는 역설이었다. 나는 여기서 이야기할 거리를 뽑아내야 하고, 무언가 나의 사고와 충돌시켜 그 파동을 글로 풀어내야 한다. 여기엔, 어쩌면 면역학적인 ‘내 영역’이 전제되어 있다. 충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질성이다. 외부 세계가 단지 ‘미래의 내 영역’으로 존재할 때, 다시 말해 지금 내가 가진 것과 그 밖에 펼쳐진 것들이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상정할 때 학습은 ‘흡수’가 된다. 이는 책이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수동적인 자기 개방’에 가까울 것이다. 자아의 접촉면을 닫아 밖에서 들어오는 지적 자극을 판단하고자 할 때, 때로는 중단하고 거부하고 비판할 때 비로소 공부는 사색적인 것이 되며 충돌할 수 있게 된다. 책의 논리에 따르자면, 그것이 ‘정신’일 것이다.
그러나 ‘아니라고 대꾸’하는 것조차 ‘아니라고 대꾸’했던 과거 없이는 어렵다. 부정하고 비판한 적 없는 ‘천박한’ 지성으로는 내부가 존재하는 자기의 영역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충돌하기 위해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었다. 내 머릿속에 나 스스로가 자아낸, ‘나의’ 지식과 사유가 과연 있던가? 과연 그러한 최초의 부정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성과 사회와 머무르는 것의 두려움
인용한 글에서 책은 즉각적인 반응성을 병이자 몰락이자 탈진으로 진단하고 있다. 과잉 활동하는 성과주체의 시선은 조종을 포기한 채 외부의 자극에 ‘내맡겨져’ 있다. 자극을 처리하는 주체의 프로세스에서 저항을 거세하면, 보고 듣는 것들을 부정하지 않고 천착하지 않으면, 처리 속도는 빨라진다. 효율을 단위시간당 자극의 처리량으로 산정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지극히 효율적인 방식이다. 책은 이와 같은 주의의 끊임없는 전환과 폭넓은 대상에의 분배를,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책 30~31쪽)으로 이해한다. 즉 존재의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는 주인이자 노예이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책 27~28쪽 참조). 책에 따르면,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는 성과사회에 이르러 철저히 자기완결적, 자기관계적인 것이 된다. 세계와 더불어 성과주체의 자아 역시 맥락에서 잘려나가 탈서사화(Entnarrativisierung)되었다. 관계적 의미를 잃은 삶은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다. 성과주체는 ‘호모 사케르’이지만, 그가 속한 신은 이제 ‘자기 자신’이다. 규율에 의한 착취가 역할을 다한 자리에 호모 사케르의 자기 착취, 지배 없는 착취가 남은 것이다.
성과사회에서 한 자리에 진득하니 머무르는 것은 특별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계속 생각해나가기(Fortdenken)’에 익숙하며 또한 그러기를 ‘스스로로부터’ 장려 받는 성과주체들의 행위구조는, 나아가는 게 아니라 머무르는 데 용기가 필요하도록 만든다. 모두가 나아가려는 세상에서 멈추는 것은 휴식이나 재충전이라기보다는 퇴보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 아래 머무른다는 것, ‘돌이켜 생각하는(Nachdenken)’ 것은 종종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주로 개인의 능력 부족에서 기인한)필연적인 것으로 이해되거나, 비생산적이며 따라서 무가치한 것이거나, 행동에 종속된, 즉 또 다른 나아감을 위한 것으로 치부된다. 소진되는 것, 피로한 것은 그러므로 꺼내놓아 남들과 공유할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가 된다. 이 피로는 자폐적이다. 이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킨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피로는 폭력이다.”(책 67쪽) 이러한 ‘분열적 피로’는 우울증을 불러온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도 없다.” -책 95~96쪽
우울증은 내향적이다. 책은 우울증의 외부단절적 특징을 가리켜 ‘아무런 중력이 없다’고 했지만, ‘무언가를 향해 끌려간다’는 지점에서 우울증의 중력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작용한다. 그 중력장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수 없기 때문에 주체는 끊임없는 자신에 대한 관심이라는 굴레 속에서 소진(Burnout)되어간다. 우울증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긍정적 힘의 극단적 연장선상에 있다. ‘이를 악무는’ 것은 마지막 긍정적 힘까지 짜내려는 시도이다. 부정적 힘은, 머무르는 것은, 장려되지 못할 뿐 아니라 성과주체에게 있어서는 주목받지조차 못한다.
너를 향해 지치는 피로
책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트케의 주장을 상당히 전향적으로 인용한다. 핵심은 ‘우리-피로’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인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그것은 막간의 시간Zwischenzeit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책 71~72쪽
여기에서 ‘피로’는 중의적이다. ‘긍정적인 힘의 피로’라고 할 때 여기에는 힘의 ‘부재’ 내지는 ‘소진’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반면 ‘부정적인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는 부정적 힘을 ‘가진’ 피로, 능력있는 피로에 가까운 것이다. 전자의 피로가 우울이고 자폐라면, 후자는 “세계를 신뢰”하며 그러므로 이원적이다. 세계가 온통 ‘나’ 혹은 ‘확장된 나’로 점철되어 있을 때, 머무르는 것은 지극히 고독한 행위이다. 거기엔 나 이외 아무것도 없다. 사실상 멈춰 설 이유조차도 없다. 그것은 그저 비효율을 초래하는 낭비의 일종인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느슨히 할 때, 거기에 세계가 스며드는 것을 허락할 때, 나에게 타자가 있고 나 또한 누군가의 타자일 때, 비로소 멈춰서면 보이는 것들이 생겨난다. 놀이를 할 수 있고 우애를 나눌 수 있다. 무위의 피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종속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 있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우리-피로는 나아가는 것에 지친 것이다. 자아 피로가 그것을 긍정적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피로는 부정적 힘을 발휘함으로써 지침을 인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피로한 사람은 성과주체로서 자신의 착취에서 잠시 벗어난다. 그는 아이에 가깝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책 70쪽)
이러한 우리-피로를 한트케는 아주 멋진 말로 표현한다.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책 71쪽) 피로는 나와 너를 하나로 묶는다. 착취받지 않는 나의 옆에는 너라는 타자가 있고, 우리는 피로한 가운데 서로를 향해 있다. 중력은 내 안을 향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향해, 혹은 세계를 향해 펼쳐져 있다. 한트케는 이러한 피로의 공동체를 ‘오순절-사회’라고 명명하는데, 최종장에 이르기까지는 예상치 못하게도, 책의 제목 『피로사회』는 바로 이것, 미래에 도래해야 할 ‘이상적 피로의 사회’를 의미한다. 피로사회는 현실에 대한 진단도, 미래의 전망도 아니다. 나아가야 할 당위인 것이다.
부정하는 놀이와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
충돌을 위해서는 부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 내 사유의 공간을 뚜렷이 세우고 싶다는 욕구에 근거하여, 현대사회에서 ‘부정’이 어려운 이유와 그 해결책에 대한 책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다시, 어떻게 부정의 첫발을 뗄 수 있을까?
역설적이지만 저와 같은 문제의식과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목적 아래서의 부정은 중단이라기보다는 나아감의 일환이다. 나만의 지평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은 온전히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색에는 어느 정도 시선을 자유롭게 부유시킬 필요가 있다. 목적을 갖고 대상을 보면 생각했던 것들을 찾을 수 있지만, 마음을 비우고 호기심으로 대상을 접하면 생각지 못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 완전히 머무르지 않으면 깊이 파고들어갈 수 없다. 책 식으로 말하자면 잠시 나에 대한 착취를 멈추는 것이다. 사유는 활동보다는 놀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사유는 곧 부정하는 놀이이다.
이는 결국 지적 자극이든 주변의 사람이든 경험이든 관계없이, 대상에 대한 예민한 관심을 쏟아야 가능한 것이다. 관심이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로만 향한 사람은 ‘외부’가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모른다. 어느 지점에서 나와 타자가 대립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책의 성찰이 현대사회에서 어느 정도 실천적으로 증명된 것이라고 간주한다면, 적어도 지금은 개인이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 자신의 성과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관심이 전제되어야 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경색된 영혼에 살아있는 생동의 빛을 불어넣기 위하여, 사람은 ‘주변’을 둘 필요가 있다. 지쳐서 향할 수 있는 곳, 머무는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하다. 타인이 있어야 머무를 이유가 있고, 머무를 수 있어야 놀이할 수 있으며, 놀이할 수 있어야 사색할 수 있다.
충돌에 이질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면, 그 이질성은 자아의 양보를 통해서만 깃들 수 있다. 나를 줄이고, 나에 대한 관심을 놓음으로써 오히려 내 영역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의 의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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