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욥’의 초상
일반부문 1등작
우리 시대 ‘욥’의 초상
서준식의 『옥중서한』
김일환
1970-80년대 우리 시대의 ‘욥’
독재와 억압의 시대는 그에 굴하지 않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이 그 비극적 아름다움을 빛내는 시대이기도 하다. 서준식의 시대 또한 그랬다. 한국의 군사 독재는 그의 몸뚱이를 창살 아래 가두었고, 갇힌 몸을 인질로 그의 마음까지 쇠사슬로 창살에 묶어두려 했다. 17년. 그 시간동안 한 수인은 “1970-8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을씨년스러운 음지를 인간존재의 눈부신 고귀함으로 승화시키는 어떤 정신의 다사로운 양지”⑴를 길러내었다. 그리고 끝내 묶일 수 없었던 그 마음은 권력보다 오래 살아남아 지금 우리 앞에 남아있다.
『옥중서한』은 재일 교포 2세로 서울대 법학과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서준식이 1971년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 투옥되어 1988년 가석방될 때까지 17년 동안 옥중에서 쓴 편지를 엮어 책으로 낸 것이다. 수백 통의 편지 대부분은 부모님과 동생, 친지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들인데, 그 내용도 어린 시절의 경험, 자신이 읽고 있는 책, 일상 속의 심정들, 상대에 대한 충고와 조언 등이 대부분이다. 제한적이나마 알고 있던 한국의 급변하는 정치상황에 대한 생각도, 고문과 폭력, 인간적 모욕으로 점철된 감옥 내 일상도 검열의 벽을 넘지 못했다. 더군다나 거친 듯 하면서도 절제된 서준식의 어법은 그 자신의 적나라한 감정들을 드러내는 동시에, 많은 것들에 대해 완고하게 침묵하기도 한다. 때문에 『옥중서한』은 밝게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속으로 삼켜야 했던 젊은이의 초상이며, 그의 시대만큼이나 일그러져 있는 초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옥중서한』을 더듬어나가면, 단단한 벽에 둘러싸여서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나가고자 했던 그의 고집과, 고립된 실존을 넘어서 언제나 ‘시대의 밭에 결박된 농노’이고자 했던 결단을, 무엇보다 그의 ‘착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옥중서한』의 거칠고 직설적인 언어에는 故문익환 목사의 부활을 사는 예언자적 희망과, 신영복의 사색이 이른 까마득한 정신적 높이는 없다.⑵ 그는 차라리 구약성서의 ‘욥’을 닮았다.⑶ 불현 듯 닥친 고난 앞에서 처절한 고통과 지독한 회의를 숨기지 않는 그의 언어는 우리를 마음 깊숙한 곳의 욕심과 허위까지 들여다볼 것을 강요한다. 그의 삶을 고작해야 구경꾼처럼 들여다볼 뿐인 우리는 결국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의 시대는 왜 이리 잔혹한가? 이 커다란 고통을 이 사람은 왜 피하지 않는가? 이 고통을 끝내 이겨내고 전향을 거부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진실하고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는가?
‘행복한 시절’이었던 7년의 옥고
‘민족’과 ‘재일’은 서준식의 고난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하나의 열쇳말이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분단의 산물인 재일 교포 사회에서 자라는 서준식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회의 끝에 한국으로의 유학을 감행한다. 후일의 편지에서 서준식은 “내 자신 속에 깊이 깊이 박혀 있는 ‘일본’을 모조리 알콜로라도 말끔히 씻어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게 민족적인 것에 대한 추구는 어떤 국수주의적인 열망과 연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식민통치의 압제와 분단, 전쟁으로 고통 받았던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임과 동시에, 일본의 국민이라는 특권을 누리며 이웃의 아픔에 귀를 닫고 안락을 누리는 ‘근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82년 8월 12일) 이것이 유학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준식의 생각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우리는 반공의 성채였던 박정희 체제에서 벗어난 채 형성된 그의 민족의식이 60년대 한국의 가난과 억압에 허용된 것보다 깊게 파고들었으며, 냉전과 분단의 장벽은 너무 높게 뛰어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의 잘못이라면 그것 뿐 이었다. 민족의 고통의 뿌리를 잘 이해하고자 형 서승과 함께 감행한 8일 간의 방북은 71년 대선을 앞둔 군사정권에 의해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되었다.⑷ 두 형제를 제물로 삼아 유신체제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채비를 마친 것이다. 그것은 준식의 입장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싸움이었고, 그는 철저히 ‘희생양’이었다. 서승, 서준식 형제 모두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신념이 있었고, 교내의 반정부투쟁에 가담했을지언정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혹독한 고문과 형기에 맞는 싸움을 치르다 감옥에 간 것은 아니었다. 구약의 욥을 잿더미에 나앉게 한 고통이 갑자기 찾아왔듯, 서준식의 옥고도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형 서승은 무기징역을, 서준식은 7년형을 선고받는다. 서준식의 옥중 17년을 둘로 나누었을 때 전반부에 해당하는 이 7년간의 편지는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나마 차가운 돌과 같은 언어로 쌓아올린 편지들은 73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살인적인 전향공작과 고문, 그의 자살시도에 대해선 철저히 침묵한다.⑸ 다만 그는 “인간이 겪는 고난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고난의 무게에 눌려 비굴해지거나 비겁해지거나 야비해지거나 탐욕스러워지지 않을 정도로만 ‘혼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더 없이 훌륭한 인생의 스승인 것입니다”(77년 11월)라고 말하며 고문과 일곱 번의 겨울을 버텨낸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억울함을, 원망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는 이 시기를 “피의 폭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오기와 신념으로 가득 차 있던 행복한 시절”로 회상한다.(일어판 역자후기)
우리는 무엇이 20대 후반의 한 젊은이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떤 힘이 그를 자신의 억울한 멍에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하는가? 왜 그는 자신을 고문대 위에 올려놓은 조국을 저주하며 전향서에 도장을 찍는 선택지를 고려조차 하지 않는가? 이북 출신의 비전향장기수에게 전향은 고향에서 멀어짐을 의미하지만, 재일교포 서준식은 그것이 고향으로 돌아갈 지름길이 아닌가. 고집으로 똘똘 뭉친 서준식의 침묵에 우리는 존경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끼며,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안간힘을 쓴다. 후일 ‘풋풋하며 전투적인 유물론자’(87년 6월 23일)라 말한 그의 이 당시 신념이 그 답인가, 아니면 부당한 폭력에 절대 굴할 수 없다는 젊은이의 오기인가? 이 질문은 정해진 7년의 징역살이 이후 더욱 더 절박하게 제기된다. 그에게, 또한 우리에게.
보호감호처분과 ‘길고 긴 고뇌의 시대’
78년 5월 27일 서준식이 7년형을 마친 날, 서준식을 태운 호송차는 전주교도소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어머니와 동생 영실을 눈앞에서 그대로 지나쳐 청주보호감호소로 향한다.⑹ 더불어 감옥을 나서면 “쌀막걸리나 배터지게 마셔보자던 야망”(78년 7월 15일)도 어그러졌다. 이제 서준식의 삶은 주어진 형기를 이 앙다물고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선(전향) 얼마든지 자유의 몸이 될 수 될 수 있는 삶으로 바뀐다. 가능성이 있는 삶이란 때론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그것은 무엇 하나에 진득이 마음을 쏟을 수 없는 ‘임시의 삶’이며, 감옥 밖의 자유와 감옥 내의 투쟁이라는 비대칭적 선택지를 놓고 언제나 새롭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고뇌의 삶이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 시기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후에 서준식은 이 때를 “길고 긴 고뇌의 시대”, ‘회의의 한가운데선 매일같이 자살을 생각했던 때’라 고백한다.(일어판 역자후기)
이 ‘길고 긴 고뇌의 시대’에 쓰인 편지가 『옥중서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분명 ‘전향을 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나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를 직접 고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원칙에서 전향을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전향과 비전향 사이의 선택은 보다 근본적인 서준식의 ‘대원칙’하에 결정할 문제이기에, 심지어 “나가기 위한 전향은 조금도 절실하지 않다”(86년 7월 21일) 그렇지만 서준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놓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는지, 그의 내적 고통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편지는 찾기 어렵다. 다만 서준식은 스스로를 ‘지킬 박사와 하이드’(81년 12월 16일, 84년 11월 1일)에 비유한다. 그를 따라 우리는 거칠게나마 ‘지킬 박사'의 편지와 ’하이드‘의 편지를 나눠볼 수 있다. 그 둘 사이의 극면한 대조 사이 어딘가에 서준식의 고뇌가 숨어있을 터라 어림짐작해볼 뿐이다.
지킬 박사 서준식은 언제나 밝은, 그러나 진지한 언어로 착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의 내면에서 햇빛이 비추이는 양지를 보여주는 이 편지들은 언제나 그의 사촌동생들 차지가 되는데, 편지에서 사촌들은 정말 끈질기게도(!) ’착한 마음‘으로 살라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계속 들어야한다. 서준식이 그토록 강조하는 ’착한 마음‘은 언제나 불쌍한 이웃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에서 출발한다.(81년 12월 25일) 주위 사람들의 아픔에 눈 감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잘못된 우월감에 빠지지 않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며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는 것이 ’착한 마음‘이다. 책을 읽든, 음악을 하든, 일을 하든 간에 얄팍한 세상의 재주와 잔꾀를 배우지 말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하길(86년 1월 21일), 그 마음이 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컨 기다림으로 더 넓어지길 주문하는 ’잔소리‘(85년 2월 28일)는 수십 번이나 간곡하게 반복된다. 그는 그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것을 말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착하고 아름답게 세워나가고자 한다.(82년 12월 29일)
하이드 서준식은 정확히 그 반대편이다. 특유의 직설적 어법으로 내면의 눅눅한 그늘을 집요하게 헤집는 편지는 대부분 그의 동생 영실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가 매일 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악랄하고 비열한 모습에 대한 끝 모를 분노, 그 분노로 똘똘 뭉쳐져 이제는 눈 앞의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내면(85년 9월 7일), 속절없는 기다림에 지쳐 나가떨어진 자신의 나약함, 이 모든 것이 누구도 이해 못하는 자신만의 외로움이라는 쓸쓸한 자각. 서준식을 무너뜨리는 이런 것들은 감옥이란 환경에서 쉽게 버려질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을 착한 마음의 존재로, 존엄을 잃지 않은 양심수로 세워나가기 위해 더욱 더 추악한 것에 대한 분노로 뭉쳐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가 마주한 근본적인 괴로움이었다. 착한 것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으로 자신을 세우고, 마음 속 깊은 곳의 추악하고 비겁한 것을 들추며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을 반복하는 걸음은, 비틀거리며 막다른 곳으로 치닫는다.
이 비틀거림의 주위에는 언제나 전향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맴돌고 있다. 그의 고백대로, 수인의 모든 회의와 고뇌는 감옥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강력한 유혹 속에서 진행되며, 전향을 합리화하는 거대한 논변으로 귀착될 위험을 안고 있지 않은가!(1992년판 머리말) 마치 기울어진 경사면에서 도는 팽이처럼, 나사렛 예수를 통해 눈 뜨게 된 ‘실존’에 대한 관심은 이전의 유물론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로, 감옥의 엄중한 벽에 대한 자각으로, 그리고 ‘전향’에의 유혹으로 미끄러진다. 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내적 갈등이 극한에 이른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이렇게 토로한다.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는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는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모두’가 아니면 ‘없음’을, 빛나는 영광이 아니면 파멸을 원했던 나의 오만한 마음은, 이리하여 지금 ‘없음’과 파멸의 심연을 바로 눈앞에 보며 쓰러져 있다.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에 대한 증오까지도 나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고 나의 목소리를 쉬게 했다. 나의 마음을 비틀어 놓았다.“(85년 10월 20일)
극한의 지점에선 그는 매일같이 자살을 생각했고, 그는 전향서 대신 ‘준법서약서’의 형태로 일종의 타협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한다.(88년 3월 31일)
시대의 밭에 결박된 농노
서준식은 끝끝내 전향을 선택하지 않는다. 내적 파열 직전에 이른 그의 고뇌를 엿본 이들은 이제 ‘왜 전향을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 대신, ‘도대체 어떤 힘이 2년마다 변함없이 전향거부를 선택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는가?’를 묻게 된다. 이는 전향 문제를 대하는 서준식의 대원칙에 대한 질문임과 동시에, 옥중의 사색이 낳은 ‘서준식 정신’의 어떤 단단한 입각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서준식의 답은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나의 통념, ‘폭압적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끝까지 고수한 고집스런 지사(志士)의 상을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놀랍게도 서준식은 자신의 전향거부를, 자신의 자리에서 굳게 선 채로 80년대 중후반 불 붙고 있던 민주화 투쟁의 대열에 함께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비록 감옥 밖의 사람들과 어깨 걸고 싸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보호감호제라는 군사독재의 악법에 타협 없이 맞서는 자신만의 싸움을 계속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서준식의 바람이다. 그로써 그는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봄을 몰고 오는 수많은 제비 중 지극히 작은 한 마리의, 그것도 확실하게 봄을 몰고 오는 제비이고자 할 뿐”이었다. 그리고 외롭게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영웅이 아닌, “저 넓은 세상을 동경하지만 내가 속한 보잘 것 없는 땅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밭에 결박된 농노”이고자 했다.(1988년 2월 4일) 이 말 만큼, 서준식이란 인간을 잘 표현하는 말이 또 있을까.
그가 스스로를 농노로 낮추면서까지 결박되고자 했던 시대의 밭이야말로, 지독한 내적 고통과 회의의 늪을 헤치고 나갈 수 있었던 정신적 터전이 되어 주었다. 전향을 포함한 모든 문제에 대한 생각의 출발은 일본을 건너오면서부터 하나이고자 했던 사람들, 함께 시대의 밭에 붙박여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철저히 차단된 감옥에서,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단 소망은 하나의 맹목적 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꿈은 허상은 아니었다. 빈껍데기만 남아 어떤 업적도 이루지 못할 무능력한 인간이 되었다 절망할 때에도(86년 8월 6일), 비천한 ‘농노’일 줄 알았던 그의 자존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역사와 인간에 대한 강고한 유물론적 도식이 흔들릴 때에도, 역사의 복잡함을 직시하는 ‘리얼한 진보’를 꿈꿀 수 있었다.(86년 8월 30일)
착한 마음에서 비롯된 그의 정신은 지독한 고독의 시간을 거쳐 그렇게 넓디넓은 시대의 밭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보게 되는 한 수인의 정신이 일구어 낸 풍경은 얼마나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또 견고한가.
“‘벅찬 감격의 재회’의 상상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나는 하나의 큰 소망으로 벌써 가득 차 있었다. (중략) 만약에 이 새로운 소망이 깨진다면 나는 도저히 살아가지 못할 것 같은, 죽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하기까지 이르러 버렸다. 네가 심정적으로 결코 완전히 이해해줄 수 없을 이 소망이란, ‘이 땅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 이 땅에 사는 자들의 숨결과 체온을 바로 곁에서 느끼면서 이 땅에 사는 자들의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그리고 더러움이나 어리석음이나 편견까지도 나의 몸속에 간직하고, 이 땅에 사는 자로서 살다가 죽고 싶다’라는 것이다.”(87년 1월 9일)
“나가고 싶다. 아버지, 어머니의 묘 앞에 서서 실컷 울어도 보고 싶고...(중략) 그러나 영실아. 이런 모든 것들은 내가 두 번째로, 세 번째로, 네 번째로 해보고 싶은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것들을 자꾸만 기웃거리지 않겠다. 만약에 내가 이 저주받을 끈질김 때문에 쓸모 있는 두엄더미가 될 수만 있다면! 아침마다 요강에서 황금수를 달게 받아 마시고, 외양간 걸찍한 똥오줌도 받아 마시고, 죽은 쥐새끼를 받아먹고 똥개가 싼 개똥도 맛있게 받아먹으면서 열심히 열심히 썩고 썩고 푸욱 썩어서, 어두운 땅 속에서 혼자 땀 흘리고 정열을 불태우다가, 가을에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도록 도와주고는 싸늘하게 죽어가는, 그런 쓸모 있는 두엄이 될 수만 있다면!”(83년 10월 31일)
스스로 두엄이 되고자 했던 서준식은 87년 5월 민주화의 벽두에서 51간의 목숨을 건 단식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윽고 찾아온 시대의 늦봄에, 그는 소망하던 대로 수많은 제비 중 하나가 되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감옥 문을 걸어 나간다.⑺
2012년에 읽는 『옥중서한』
감옥에서 서준식은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축적’을 가능케 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소망한다.(일어판 머리말)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항의하여 다시 투옥되었고, 인권운동사랑방을 만드는 주역이었으며, 99년 인권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아 다시 구속된다. 그것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알리바이 삼은 전향과 과장된 참회의 바람 속에서, 언제나 시대의 밭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가 맡은 ‘두엄’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끝내 그는 2007년 머리말에서, 자신의 삶의 두 기둥인 ‘운동’과 ‘가정’은 한꺼번에 무너졌다고, 지금 자신은 독일에서 ‘피난’중이라고 되뇌게 되었다. 그의 삶은 그가 좋아했던 베토벤의 음악처럼 ‘고난에서 환희로’ 끝맺어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후일담을 곁들여 2012년에 『옥중서한』을 읽는 우리의 마음은 89년의 독자보다 어두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에게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을 거란 믿음을 우리는 계속 가질 수 있다. 조국이 그의 착한 마음을 배반하고 극한의 고통 중에 던져 넣었을 때에도, 시대의 밭에 붙들린 서준식의 정신은 따사로운 양지를 일구어 내었다. 이제 시대는 다시 그를 내쫓아 “폐허 위에 나앉게” 했지만, 밭을 떠날 수 없는 농노는 다시 생각하고 또 고뇌하며 자신이 서 있어야 할 곳을 또 다시 찾고야 말 것이라 믿는다. 욥이 고통의 끝자락에서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끝내 만나고야 말듯이 말이다. 그때까지는 서준식의 『옥중서한』도 아직 미완성이다.
이 두꺼운 서한집의 끝에 가서도 아직도 열려 있는 책의 결말은 우리를 다시 그가 묶여있는 시대의 밭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그에 비해 한참이나 어리석고 나약한 나도 ‘착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속한 삶의 자리에 서 있을 것을 감히 또 한 번 다짐해본다. 그렇게 계속 다짐하다보면 우리 삶도 조금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 거란 보증 없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미주>
- 고종석,「시대의 비천함, 인간의 고귀함_서준식의『옥중서한』」,『말들의 풍경』, 개마고원, 2012.
- 문익환, 『문익환』, 돌베개, 2003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1998.
- 「욥기」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희곡 형식을 띤 텍스트이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의로운 인물로서, 자신에게 찾아온 근원적으로 부조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고뇌한다. ‘인과응보의 신’을 대변하는 그의 친구들과 격렬하게 논쟁하는 가운데, 욥은 적나라하고 거침없는 언어로 자신의 고통이 전적으로 부당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 앞에 나타난 하나님을 독대하면서, ‘인과응보의 신’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극도의 내적 외적 고통 가운데에서도 굽힘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신과의 독대를 요구하는 욥의 모습은 구티에레즈와 같은 해방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욥기-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말씀』,나눔사, 1999. 욥기에 대한 좋은 소개로는 최형묵, 『반전의 희망 욥-고통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동연, 2009 이 있다.
- 1970년 서승, 서준식 형제는 각각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과 법학과 재학 중 불법적으로 7박 8일동안 북한을 다녀온다. 1970년 4월 27일 대선을 앞두고 ‘건수 올리기’에 열을 올리던 이후락의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선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해온 50여명의 학원 침투 간첩단이 적발된 것으로 조작하여 발표한다. 중앙정보부는 서준식의 형 서승이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의 집에 기거한 점에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 공산혁명을 기도했다는 사실과 김대중과의 관계 여부를 자백하라며 서승을 포함한 관계자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다. 서승은 이 때,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실토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분신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1권, 인물과사상사, 2002, 129-133쪽.
- 73년 6월부터 중앙정보부와 법무부는 대전, 광주, 전주, 대구 교도소에 전향 공작반을 설치해 비전향장기수 400명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을 시작한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직후에 검거된 좌익사범들로, 4.19직후 20년형으로 감형되면서 1974-75년에 출소할 예정이었다. 당시의 전향공작에 대한 증언으로는 서승, 『서승의 옥중 19년』, 역사비평사, 1999 을 보라.
- 사회안전법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에 대해서는 형기를 마친 후에도 ‘보안처분’을 통해 인신구속을 가능하게 한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악법이다. 법무부는 사상전향의 의사를 보이지 않는 수감자에 대한 보안처분을 2년 단위로 무제한 연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회안전법은 민방위기본법, 방위세법 등과 함께 1975년 통과된 ‘4대 전시입법’중 하나이며, 전 사회의 병영체제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서준식의 만기는 10년동안 5번 갱신된다. 강준만, 위의 책, 2권, 261-265쪽.
- 서준식의 형 서승은 무기징역에서 감형, 1990년 2월에야 19년의 옥중생활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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