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를 찾아가는 여정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나’와 ‘너’를 찾아가는 여정
정혜윤,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우금희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누군가를 떠올릴 때가 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얼굴을 내미는 계절이 시작되면 아침저녁의 찬바람 속에서 그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이 생각나고, 아주 오랜만에 들른 카페의 커피향기 속에서 그 집 커피를 좋아하던 누군가가 생각나고, 오늘이 무슨 날인 것 같은 느낌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의 그 전날이나 다음날 즈음은 내가 잘 챙겨주던 누군가의 생일인 것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주 사소한 것으로 남아있다. 이 책은 그런 ‘사소함’을 담은 책이다. 여덟 가지(혹은 마지막 비밀 질문까지 더한 여덟 가지 이상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통해 잊고 살았던 어떤 것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내고, 펼쳐보고, 다시 잘 싸서 담을 수 있도록 우리 삶의 아주 작은 단면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살면서 문득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 말은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까” 라는 말과 통하는 면이 있다. 인생을 살면서 죽을 때까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타인과 나, 나와 타인을 비교하며 늘 새로운 자괴감에 빠진다. 저자는 어쩌면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까” 라는 것이 바로 윤리가 아니겠냐는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윤리’라기 보다는 ‘각성’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라는 숨 돌릴 시간을 아주 잠깐이나마 갖는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각성의 시작이다. 그러한 각성이 생겨나면 잠시 숨을 고르려고 멈춘 것에서 더 나아가 되돌아온 길을 볼 수도 있고, 앞으로 남은 길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각성을 위해 결국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책이다. ‘책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보려는 데서 시작한다.’라는 말은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한 아주 통쾌하고 명료한 답이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일들, 말을 못하니 글로 풀어내고 싶어도 손끝에서 제자리만 빙빙 맴돌 뿐이던 그 말들에서부터 책은 시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에서 위로를 얻는다. 단지 책이 ‘슬퍼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라고 말해서가 아니라 책 속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들어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 같은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정의한 ‘마치 남의 일처럼 보는 내 이야기’라는 책의 정의에 담긴 뜻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각성으로 부터 얻어낸 위안은 불안을 잠재우기도 한다. 남보다 공부를 더 잘하고, 남보다 좋은 직장을 얻고, 남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은 것과 같이 무엇 하나라도 남보다 더 뛰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부터 생겨난 걱정은 우리를 ‘매일’ 이라는 감옥 속에 가둔다. 눈을 떠도 감아도 여전히 네모난 방 속에 갇혀있는 우리는 괴로워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괴리 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남을 보는데 급급하던 눈을 돌려 스스로를 보는 눈을 갖게 해주는 책은, 남과의 비교로부터 오는 불안을 남이라는 요소를 제외한 진짜 ‘나’와의 대면으로 해소시켜주는 존재일 것이다. 이 때 스스로가 본 ‘나’라는 존재가 돈을 잘 버는지, 사회적으로 성공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먹고 살기 바쁘고, 책 읽는 능력이 없고, 삶이 불안한데도 진짜 ‘나’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가장 값진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나’에 대한 인식을 하고 나면 우리는 ‘남’을 남처럼 보지 않는 눈을 갖게 된다.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 결론을 내리다 보면 결코 다른 누군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마주서서 끊임없는 경쟁을 해야만 하는 사회 구조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마주서서가 아닌 나란히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책 속에서 발견하는 ‘나’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혼자서 마음껏 풀어내는 세상에 대한 외침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들어줄 누군가에 대한 소망의 외침일지도 모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길을 달리다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길의 앞뒤를 살펴보는 우리에게, 여태까지 텅 비었던 길 위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은 더없이 반가울 것이다.
카뮈는 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고독이 다시 결합시키는 순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극장에 가면 다른 관객들도 제각기 자신과의 대면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고 그런 생각을 하면 마치 관객 개개인이 다시금 형제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정혜윤, 『삶을 바꾸는 책 읽기』, 민음사, 2012, p.140.)
책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고독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고독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과 ‘공감’하는지를 보여준다. ‘나’를 발견하고 재구성하는 고독한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그 과정을 똑같이 겪고 있을 누군가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고 그러한 인식은 곧 공감이라는 소통의 수단을 만들어 준다. 사실 공감이라는 것은 단지 상대방의 얼굴에 드러나는 기분을 이해해고 말로써 드러나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주는 것만은 아니다. 진정한 공감은 다른 사람의 진짜 내면과 마주치거나, 혹은 그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내면과 마주하려 노력했던 과정의 흔적과 마주칠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쉬운 방법이 바로 책이다. 우리가 책에 담긴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나’를 발견했다면, 그 이후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사람의 내면까지도 품을 수 있게 되는 공감의 과정은 바로 책을 통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책의 후반부에 “네가 밥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라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문장이 등장한다. 밥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달라는 질문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에 분명하다. 질문을 확장시켜 결국 ‘하루 동안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묻는다면 우리의 답변은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대학생들은 학교도 가야하고 공부도 해야 되고 그 와중에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친구들도 간간히 만나 관계도 유지해야 하고, 하루 단위로 생각해보면 아침에는 머리감고 화장하고 나가기 위한 준비만으로도 왜 그렇게 바쁜지… 와 같은 생각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대학생들뿐인가 직장인들의 경우에는 아침 일찍 출근해 회사에서 끝없이 업무에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 먹고 씻고 나면 왜 이리 잠이 몰려오는지…와 같은 푸념으로 비참함을 맛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질문이 의미하는 것은 진짜로 하루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일들을 겪는 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책을 통해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너’를 발견했던 우리가 그를 통해 공감을 하고 위안을 얻고, 그리고 그 후에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통해 ‘나’를 발견했다면, 우리는 변해야 한다. 삶에서 아주 사소한 변화일지라도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에서 시작한 여정은 “이렇게 살아봐야지”라는 새로운 시작으로 맺을 수가 있다. 우리가 책을 펼침으로써 잠시 멈춘 길을 우리는 책 밖의 세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스스로 고독한 과정 속에서 발견한 ‘나’와 ‘너’, ‘우리’라는 공감의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조르바의 문장은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다. 힘들게 얻은 소중한 ‘나’를 우리는 현실 속에서 또 다시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면서도 다시 모르는 척 해버리려는 것은 아닌지. 진짜 내 모습을 다시 잃거나 감춰두고만 산다면 우리는 분명 확실한 세계, 이미 좋아하는 것들만을 보려하는 키치적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소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을 하나하나 담아온 느낌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진짜 ‘나’를 발견하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과정들로 이루어진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내보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저절로 바뀐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내가 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삶을 바꾸는 책 읽기란, 책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저절로 바꾸어 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삶을 바꾸는 책 읽기란 책과 책을 읽는 사람이 친한 친구처럼 허물없이 서로를 드러내고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