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그리고 2011년의 오월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1980년, 그리고 2011년의 오월
『오월의 사회과학』 서평
김민수
들어가며
사람들이 광주를 생각할 때 흔히들 겪는 딜레마가 있다. ‘나는 5.18을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겪지 못했다. 그런 우리가 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5.18을 이해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서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기도 말하기도 힘들다.’ 이 딜레마는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혀왔고, 이 책의 저자 최정운 교수도 솔직하게 인정한다.(1) 1991년에, 그것도 머나먼 제주도에서 태어난 내가 5.18을 생각할 때 나를 괴롭혔던 질문도 바로 이것이었다. 제삼자인 내가 ‘광주’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을까? 차마 언어로 제대로 표현조차 하기 힘든 그들의 아픈 상처를 내가 보듬을 수 있을까?
사실 사회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직접 겪지 않고도 가벼운 의견을 내고, 그것에 대해서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5.18에 대해서 특별히 사람들이 엄격한 기준을 부여하는 까닭은 그 사건이 갖는 무게와, 현재성 때문일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5.18은 민감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5.18에 대한 해석은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졌고 양 극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5.18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로 진보진영에서 이루어졌고, 따라서 5.18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정치적 실천의 의미를 부여받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월의 사회과학』은 이런 맥락에서 5.18에 대한 순수한 이해를 시도한다. 그 순백의 표지처럼, 외부적인 시각들(정치적, 사상적 맥락)을 배제하고 5.18의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진실을 구성해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정운 교수는 막스 베버적 이해(verstehen)를 방법론으로 삼아 5.18 광주의 대변자가 되었고, 이전의 우파/좌파적 시각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이 관점에서 광주를 이해하는 중심 키워드는 ‘절대공동체’이다. 즉 5.18은 ‘절대공동체’가 형성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5.18은 좌파적 담론에서는 민중의 각성에 의한 민주화 항쟁으로 이해되었고, 우파적 담론에서는 특정 외부세력의 선동에 의한 폭동, 반란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이 두 시각은 5.18 광주의 ‘진실’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절대공동체’의 시각에서 비로소 5.18 광주는 진실을 드러내고,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전달하게 된다. 이 관점에서 광주는 내게 녹아들어 이해되었고 내 삶의 어떤 기억을 끄집어냈다. 바로 2011년 5월 서울대학교에 있었던 비상총회와 본부점거의 기억이다. 내가 보고 느낀 바로, 이곳에서도 ‘절대공동체’는 잠시나마 존재했으며,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스러져갔다. 이 글에서는 앞으로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절대공동체’ 형성과 해체의 논의를 따라가고, 그에 따른 나의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이를 통해 내 시각에서 재구성된 5.18 광주를 공유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1980년, 5월
그동안 5.18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왜 하필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그토록 강력하게 저항했는가?”였다. 한 해 전 부마항쟁에서도 공수부대의 강력한 진압에 시위대는 기가 꺾였고, 1980년 김대중이 체포된 이후에 김대중의 고향인 목포에서도 이런 대규모의 사건이 일어나진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1980년 5월, 광주에서 이러한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당시의 군부에게도, 이후에 5.18 정신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이 문제는 머리를 싸매도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당시 군부는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유언비어가 사람들을 자극했다는 ‘유언비어론’, 북한을 배후로 삼는 ‘북괴 음모론’,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서 ‘김대중 음모론’ 등을 제시하며 5.18 광주에 대한 프레임을 제시했다. 하지만 최정운 교수는 유언비어론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소문에 의해서 움직였다기보다, 소문을 듣고 거리로 나가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으며, 그 앞에 펼쳐진 광경은 소문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반박한다.(2) 또한 ‘북괴 음모론’이나 ‘김대중 음모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일축한다. “누구에게 공작금을 얼마나 받으면 또 얼마나 사주를 받으면 과연 공수부대와 맞서 싸울 수 있는가?”(최정운 2012, 85) 사료에 입각한 실증적인 근거는 아니지만 보편적 인간성의 관점에서 호소력 있는 문제제기이다.
이후 5.18을 연구한 많은 연구가들은 사회적 구조적 요인을 제시했다. 이들 연구에서 제시된 요인들에는 “우선 민주화의 열망과 그를 대변하는 학생운동, 둘째 호남 차별에 대한 불만과 원한, 셋째 민중적 저항운동의 역사와 전통, 넷째 경제적 구조, 다섯째 전통적 공동체 문화 등”(최정운 2012, 135)이 있다. 하지만 최정운 교수는 이런 객관적인 요인들은 독자적으로 5.18을 일으키진 못하며, 이들이 어떤 촉매에 의해서 폭발한 것으로 본다. 그 촉매는 공수부대의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탄압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느끼는 분노였다. 눈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벌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시민들은 두려움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내 눈앞에 펼쳐진 불의를 보고 용기를 내어 항거하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죄책감을 느꼈다. 이는 시민들을 다시 거리로 나오게 했던 것이다. (최정운 2012, 158)
공수부대에 맞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공수부대의 반인륜적,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진압 행위에 대해서 윤리적 판단을 내렸고, 죽음을 선택했다. 이것은 그들을 개인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다. 광주 시민들은 그들의 인간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 개인적인 가치를 희생했다. 죽음을 극복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은 ‘총’을 들었다. 당장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에서, 비폭력적인 방법만으로는 패배할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3) 이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민중들은 공수부대를 몰아냈고 승리를 축복했다. 너와 나와의 경계는 없었고 이름도, 계급도, 성별도 잊고 모두가 하나 되는 순간이었다. ‘절대 공동체’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해방 광주는 승리의 순간임과 동시에, 고뇌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곧 자신들이 들었던 ‘총’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홉스적 자연 상태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었다. 폭력적인 저항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사회적 기층민들이 많았고 이들이 해방광주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혁명의 분위기를 냈다. 하지만 민중들은 혁명으로 국가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불안해했다.
또한 사태가 소강국면을 맞으며 민중들은 개인의 삶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가족애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은 공동체적 삶 이전에 개인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새로 투쟁에 합류한 사람들은 개인의 죽음을 희생으로 절대 공동체에서의 삶을 지켜내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혁명이 아닌, ‘수습’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 것이다.
해방광주 앞에 놓인 것은 ‘삶과 진실’ 사이의 선택의 문제였다. 해방광주가 지속될 수 없다는 인식 하에,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었고 가족과 생계를 위하여 현실과 타협해야 했다. 이것이 삶의 선택지다. 하지만 동시에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이 ‘폭도’로 생매장되고, 광주가 ‘반역의 도시’로 기억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진실을 지켜내고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것이 진실의 선택지다. 광주 시민에게 이 선택은 “두 가지 죽음 중 하나를 고르는 일”(최정운 2012, 324)이었다. 결국 그들은 삶과 진실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는 선택을 했다.
이 선택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했다. 나쁘게 말하면 누군가 죽어 줘야 했다. 그래야 광주의 진실은 숱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26일 밤 기동타격대와 젊은 학생들은 도청에 남아 그 역할을 해냈다. “그들은 결코 미친 사람들, 싸움에 중독된 그런 비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적들이 진실을 영원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모든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생매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명정한 정신으로 그 자리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투쟁의 진실을 깊은 땅 속으로 감추어 자신들의 몸과 함께 언젠가는 우리 앞에 진실로서 부활할 수 있도록 화석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최정운 2012, 290) 그렇게 광주의 진실은 전해져 우리 앞에 왔다.
2. 2011년, 5월
5.18에 대한 이미지는 아직도 무겁고 부담되는 측면이 강하다. 앞에서 말했듯 다른 사건도 아닌 5.18에 대해서만 유독 발언권의 자신감을 잃는다. 이런 인식은 현대사에서 손에 꼽는 시민의 치열한 저항권 행사였고, 거의 유일하게 군대에 총을 들고 맞선 사례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5.18에 참여한 시민들을 부정적으로는 무장 폭도로 몰거나, 긍정적으로는 숭고한 대의에 목숨을 희생한 민주 투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두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광주 시민들과 자신을 타자화하는 인식에 기초해 있다는 점과, 어느 것도 광주 시민들 전체의 진실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앞에서 살펴본 ‘절대공동체’는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느끼는 죄책감으로 시작했고, 역시 인간으로서 당연한 외로움과 그에 따른 고뇌로 소멸했다. 때문에 5.18 광주의 핵심적인 정신을 내포한 ‘절대공동체’의 개념은 인류보편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얼마든지 확장시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식은 내 삶을 되돌아보게 했고, ‘절대공동체’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했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2011년 5월의 기억이었다.
2011년 5월 30일 2,441명이 아크로를 가득 메웠다. 그 중 1,715명은 한 목소리로 설립준비위 해체를 통해서 서울대 법인화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 수백 명이 본부를 에워싸고 문을 두드렸고, 진입에 성공, 본부는 학생들의 것이 되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전까지 총학생회가 진행하던 법인화 반대를 위한 활동에 일반 학우들은 시큰둥해 보였다. 다른 대학에서 학생총회가 성사되고 2000명, 3000명이 모이는 것과 상관없이 관악은 조용하기만 했다. 비상총회가 성사될 것이라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당시 우리는 빠르게 이루어져가는 법인화의 물결에서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무의식 속에 감추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던 것에 무기력함을 느꼈고, 목소리를 내지 않는 자신을 이기적이라 평가절하하면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을 토대로 비상총회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였고, 법인화 반대를 기치로 내건 공동체를 이뤘다. 본부에 진입해 들어간 순간 모두는 하나 되어 승리를 축복했다. ‘절대공동체’의 성립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우리의 무기는 광주에서의 ‘총’과 거리가 먼, 문화적인 힘이었다. 누가 생각을 해 냈는지, 각종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만들어진 플랜카드들이 본부를 뒤덮었다. 이제 언론은 서울대학교를 주목했고 여론도 호의적이었다.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본부에 와서 함께했고, 기부들도 줄을 이었다. 참여 단체에 본부 공간을 배분하며 점거는 질서 있게 진행됐다.
하지만 곧 이 ‘절대공동체’도 해방광주가 당면했던 고뇌에 직면했다. 첫째로 본부 점거를 계속한다고 해서 법인화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설립준비위원회 해체를 위해선 법인화법 폐지가 필요했고, 이는 국회 투쟁이 필요한 일이었다. 둘째로 수많은 입장이 난립하며 공동체에 균열이 생겼다. 활동가와 일반 학우, 본부 점거에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과 나중에 합류한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점점 본부 점거는 그 동력을 잃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본부를 벗어나 본래 개인적 삶에 돌아갔다. ‘절대공동체’는 완성되려는 그 순간 사라지는 모순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시 혁명보다는 수습을 위한 협상이 이루어졌다. 총학생회와 본부 간의 협상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총학생회는 ‘본부 점거 해제 및 국회 투쟁 전개’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학우들의 지속적인 참여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는 사실상 ‘투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삶’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버려졌는가? 그렇지 않다. ‘총장실 프리덤’, ‘본부스탁’, ‘반지성 프로젝트’ 등은 광주에서 있었던 희생과는 다른 형태로 특별하게 진실을 전하려 했고, 그것은 지금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았고, 민중에게 소중한 경험이 되어 6월 민주 항쟁에서는 시대정신으로 부상했다. 그렇다면 2011년의 5월은? 아직 모르겠지만, 본부 점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기억을 남겼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4) 절대공동체는 빠르게 소멸하지만, 그 흔적은 오랫동안 남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3. 2012년, 오늘
김대중 정권 들어 5.18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광주의 이미지는 왜곡되어 있다. 광주는 어떤 이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폭력적으로, 어떤 이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성역화된 측면이 있다. 처음 광주를 찾았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은 숭고한 감정보다는 좀 더 일차원적인 것이었다. 망월동 구묘지에서 수많은 이들의 무덤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이념의 논리에 앞선 삶과 죽음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주의 이야기가 비극인 것은 그들이 삶으로써 죽고 죽음으로써 살게 되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오월의 사회과학』은 광주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다른 논리들을 지워냈다. 그래서 찾아낸 ‘절대공동체’라는 본질은 말끔히 닦인 거울처럼 우리를 비추게 되었다. 광주의 정신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5.18을 통해 얻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뜻도 있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런 절대공동체의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찾아내는 데에도 있지 않을까. 이 관점에서 광주의 정신은 나와 적을 가르는 공격적인 논리가 아니라, 공동체 화합의 논리가 된다. 오늘날 광주를 기억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와 같은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각주
- “사실 필자는 5.18 참가자도 아니고, 근처에서 배회하던 사람도 아닌 주제에 5.18에 대해 책을 쓴다는 것은 좀 멋쩍은 감이 없지 않은 게 또 현실이다. 아직도 체험자들 나이가 40밖에 안 되었는데 제삼자의 글이 무슨 큰 의미를 갖겠는가 하고 나름대로 체념도 여러 차례 했다” (최정운 2012, 18)
- “그러나 그 말을 바로 믿고 흥분하여 시위에 참여할 만큼 미련한 광주 시민은 거의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사실인가 확인하려 했고 대부분 이를 위하여 길거리에 나갔다. 여기서 결정적인 부분은 길에서 공수대원들은 그 말이 거의 사실임을 행동으로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이다.” (최정운 2012, 87)
- “군부는 관객석을 봉쇄하고 광주에만 제한된 폭력극장을 만들었고 관객이 없는 이상 비폭력은 아무런 전술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최정운 2012, 194)
- “비상총회라는 사건은 우연적이었으나 비상총회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세대의식이 중요한 사회역사적 체험을 공유함으로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때,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했던 광장의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류연미 2011, 18)
참고문헌
- 류연미 외 2011, 『포트레이츠 Vol. 4』, 서울대학교 포트레이츠.
- 최정운 2012, 『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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