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인터뷰집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읽고

일반부문 3등작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집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읽고

홍준기


#들어가며-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기

현대 한국사회에서 ‘혁명’이나 ‘근본적인 변혁’을 입에 담는다면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 글쓴이가 예상컨대 십중팔구 현실을 도외시하는 책상물림이라는 가벼운 핀잔에서부터 잠재적인 반사회 세력이라는 적극적인 의심의 눈초리에 이르기까지 그 강도는 다양할지언정 필경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글쓴이는 이 다양한 반응 중에서 가장 극적으로 이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잡아채는 반응은 이들에게 ‘현실 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과연 불가능한 것을 상상한다는 말은 정말로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소위 ‘패배자’들의 넋두리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이란 고착화된 것으로,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어서 개개인의 미약한 힘으로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거대한 대상이다. 현실과 개인 사이에 괴리와 갈등이 발생할 때, 그들은 종종 바뀌어야 하는 것은 세계가 아닌 개개인이라고 주장한다.

취업 활동이 여의치 않고 미래가 불투명한 젊은이들에게 현실의 엄중함을 체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타개책으로서 제시하는 방안은 무척 간단하다. 개개인의 경쟁력을 더욱 높이고 더 열심히 발품을 팔아 인간 시장, 즉 취업 시장에서 ‘나’라는 상품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게 ‘스펙 권하는 사회’를 확고한 현실로서 아무 의심 없이 수용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더욱 노력하면 언젠가 지금보다는 나은 삶이 찾아오리라고 자신을 설득하고 납득시킬 수 있을까?

글쓴이는 소위 이야기하는 급진-좌파의 주장에 그다지 공감하지는 않는 편이다. 언젠가 젊은 층들 사이에서 잠시 잠깐 회자되었던 “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식의 과격한 냄새가 풍기는 언설 역시 선뜻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 산적해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현실, 즉 우리들이 마주하고 있는 구조의 변혁 없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급진적인 사상가들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지젝의 주장을 대하는 글쓴이의 태도는 지극히 양가적이다. 선험적이고 미리 규정된 것은 없다고 이야기하며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을 비판하는 부분에는 공감하면서도 자본주의를 강하게 부정하는 부분에서는 어떠한 구체적인 대안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미심쩍기도 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통상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치부되며 일단 선택지에서 제외되고 마는 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통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사유 방식을 단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멀리하는 것은 한 가지 가능성을 영영 사장시켜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혁명

루소는 민주주의를 풍자하며 “선거 당일만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체제”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단순히 가벼운 이야기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이 말에서 민주주의가 태생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는 어떤 한계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여기 민주주의를 정치 체제로서 수용한 국가가 있다고 하자. 평상시에 아무리 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해도, 명실상부하게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이 쥐어져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오직 정치적으로 가장 유동적이고 불확실성이 큰 선거일뿐이다. 유동성이 잦아들고 다시금 일상적인 통치 체제가 효력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정치판에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헌법은 일상적인 정치 활동에서 사실상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시민들이야말로 주권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민주사회의 구성원인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자연스러워보일지 모르겠지만 시대와 관점을 바꿔보면 충분히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는 상황이다.

지젝이 오늘날 유럽 정치무대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세력들이 극우파라고 규정할 정도로 극우 세력이 발호하고 있는 것은 이런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에 스펙타클함이나 독보적인 카리스마가 부재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곧 역동성과 유동성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종주의나 신나치주의와 같이 이미 오래 전에 사형 선고를 받은 가치관들이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유럽 사회에서 다시금 세력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달리 표현하면 이런 위험한 극단주의들에는 제도권 민주주의에서는 이미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이 남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적/윤리적으로 어떤 것이 옳은지 논리적으로 판단하기보다 자기 몸을 거리낌 없이 던질 수 있을 만큼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이들이 그만큼 늘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체제의 진부함과 이 체제가 붕괴됨으로서 발생하는 역동성의 대립은 사실 민주주의만이 안고 있는 딜레마는 아니다. 혁명 역시 이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혁명이 성공하는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주며 막을 내리지만 정작 글쓴이가 궁금했던 것은 ‘그 다음’ 이야기였다. 비윤리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 왔던 정부가 붕괴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 바꿔야 한다’는 정서가 팽배해 있는 혁명 세력이 장악한 영화 속 영국이 맞이하게 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십중팔구 오래된 기억의 반복일 것이다. 머지않아 혁명이 열어젖힌 역동성과 유동성의 열기가 식어가고 다시금 안정된 삶을 바라는 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자기들이야말로 혁명이 초래한 권력의 표류를 안정시킬 수 있는 ‘확실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다. 나폴레옹 쿠데타, 4.19, 12.12, 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생했던 이집트를 위시한 아랍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 시나리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리지도 않는 것처럼 역사 속에서 끝없는 자기 복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역사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본주의와 저항

자본주의는 뼛속까지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가장 강력한 대타자이다. 설령 심정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가족을 먹여 살리고 안정적인 삶을 구축해 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자본주의가 구축해 놓은 거대한 톱니바퀴의 일원이 되는 것을 기꺼이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본주의가 없는 세상, 즉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보다 이미 내면화되어 있는 자본주의를 더욱 철저하게 체화(體化)하는 것이 더 영리한 세상살이라고 자연스럽게 믿게끔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믿음과 헌신이 실질적으로 노정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한계까지 감출 수는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소외되고 추방된 이들, 즉 지젝이 ‘프롤레타리아적 상황에 놓인 이들’이라고 언명하는 이들을 낳는 체제다. 다만 그 양태와 면면이 시대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뀔 따름이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어린 아이들과 여성들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이었다면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들은 간단하게 일원화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고향에 처자식을 남겨놓고 돈을 벌기 위해 대우가 형편없는 외국 공장에서 일하는 제 3세계 출신 노동자일수도 있고 선진국 대도시의 슬럼가에서 태어나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흑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현대판 프롤레타리아들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구조적인 그늘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시야를 돌려서 선진국의 잘나가는 CEO가 저지른 금융 범죄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경영인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 이를 비판하는 관점은 종종 개인의 부도덕함을 비판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렇지만 이런 접근 방식은 어떤 병리적인 현상의 원인을 특정한 개인에게 귀속시킴으로서 개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구조, 즉 자본주의를 비판의 시야에서 지워버리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는 어디까지나 피상적이고 일회적인 비판에 그칠 뿐, 결코 심도 있는 고찰로 발전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 내지는 ‘저항’을 시작한다고 할 때야말로 자본주의가 얼마나 거대하게 삶 속에 침투해 있는지를 실감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가 너무나 거대하고 특정할 수 없기에 저항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진정한 무서움이다. 그렇다면 이 덫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지젝도 언급했던 간디의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지젝은 간디의 비폭력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폭력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간디는 영국의 지배에 대한 피상적인 저항이 아니라 애초부터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 체계 자체를 근본적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지젝은 간디의 한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바로 상대방에게 일정한 윤리적/도덕적 의식이 엄존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만 이런 방식의 투쟁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는 나치의 탄압에 대해 유대인들은 대규모 자살로 응수해야 한다는 간디의 의견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이 한계는 자본주의를 상대할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폭력과 비폭력 모두 효과적인 대응 수단이 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일까?

#모든 경계를 넘어

이 책 최대의 아이러니이지만, 지젝은 이렇게 각종 문제들을 망라한 끝에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공부와 사색이라고 이야기한다. 명색이 가장 급진적인 철학자라고 평가받는 사람이 시급하게 생각하는 과제는 지금 당장 책을 덮고 거리로 뛰쳐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론적 틀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그는 고정된 가치가 지배하던 과거의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 서서히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또 솔직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토로한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젝은 선험적으로 민주주의가 항상적인 선의 자리에 위치하고 20C 전반기를 풍미했던 극단주의가 악의 위치에 위치했던 지난 수십 년간의 정치 구도가 점차 흔들리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최근에 노르웨이에서 발생했던 ‘브레이빅 사건’은 이 추세가 확고한 흐름을 이루고 있음을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전쟁과 냉전을 체험한 세대가 점점 사라지는 추세에 발맞춰 인류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 겨우 깨닫게 된 교훈들을 매장하고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움직임 역시 가속화될 것이다. 이 흐름을 억제하고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참상을 망각의 동물인 인간에게 영속적인 기억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는 사색과 성찰이 필수적이다. 오직 이 방법만이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고 언명했던 야만적인 시대의 재래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혁명에 대한 언급 역시 특기할 만하다. 지젝은 혁명이 극적으로 들춰내는 권력의 폭력을 응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혁명이 없는 곳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이고 소리 없는 폭력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심각한 문제가 없는 사회라는 지레짐작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북한을 들 수 있다. 지젝은 북한이 외부에 정상적인 사회로 보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탕진하는 동안 북한 주민들의 삶은 가장 초보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에 포섭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북한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지역에도 이 시각은 적용될 수 있다. 흔히 좌파를 ‘공연히 문제를 일으키는 시끄러운 집단’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 시각을 불식시키고 좌파가 제기하는 문제의 타당성을 보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연마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지젝이 제기한 문제의식은 결국 한 가지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경계들의 총체적인 재설정이 시급하다는 문제의식이다. 과학의 발달, 세계화의 진전,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한 전통적인 도덕관념의 침식 등 우리가 기존의 틀을 고수한다면 결코 이해하지 못할 현상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먼저 좌파부터 문제 설정을 완전히 다시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전통적인 좌파의 핵심 개념인 프롤레타리아의 개념 변경이 대표적이다. 그는 ‘노동자가 곧 프롤레타리아’라는 좌파의 유구한 관념 자체가 오늘날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서 지젝은 이 모든 경계와 개념의 재설정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총체적으로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글쓴이가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일견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현상들을 엮어 그 밑에 있는 어떤 기층적인 흐름을 꿰뚫어보는 지젝의 탁월한 식견이었다. 특히 북한 민중들의 삶은 곧 어떠한 사회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던 초창기 자본주의 사회 하층민들의 삶과 흡사하다는 주장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표층적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 그의 열린 사고방식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정해진 것은 없고 그것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들이며, 미래는 열려 있다’는 지젝의 결론은 흔해빠진 실존주의적 색채를 띤다. 누구나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게 장황한 여정을 거친 듯한 기분도 든다. 그렇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해도 어떤 과정을 통해 발화되었느냐에 따라 그 말에 실리는 무게는 전혀 달라진다. 지젝은 다양한 사례들과 진중한 문제의식을 통해 극단의 시대를 피하기 위해서, 또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주체들이 회의를 품고 당위적인 것은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기에 그가 도달한 결론-동시에 새로운 출발지점-은 독자에게 진지한 각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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