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폭력은 어디까지인가

새내기부문 3등작

국가의 폭력은 어디까지인가

박노자,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이상환


민주국가에서의 국가의 권위는 법적으로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의 국가 권위는 홉스(Hobbes, Thomas)의 왕권신수설을 기본으로 하는 왕정국가나 절대국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국가의 권위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복종을 요구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국가의 실체를 모르며,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국가의 권위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국가 폭력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며 시류에 편승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국가의 폭력이 합리화되고 낭만화되어 온 과정은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우리는 우리들을 몹시도 불편하게 하는 국가의 비합리적이고 정의롭지 않는 모습들을 언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의 대부분은 국가의 만행을 마냥 지켜보기만 할까? 해답은 너무나 진부하지만 명확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국가의 ‘어떠한 것’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걸며 자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은 ‘합리적 조절자’로서, 혹은 ‘제정자’나 ‘교정자’로서의 국가의 포괄적인 역할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가지는 기대의 종착점은 대부분 허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국가에 거는 기대는 과연 합리적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는 절대로 자국민들을 위한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받는다고 ‘착각하는’ 이득은 국가의 더 큰 채찍질을 위한 일종의 눈속임용 당근에 불과하다. 흄(D. Hume)은 사회계약론자들과 다르게 국가의 존립 근거를 상호간의 ‘혜택’에서 찾는다(박효종, 『국가와 권위』, 2011. 흄(D. Hume)에 따르면 ‘정의의 규칙’ 또한 일단의 계약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일정한 공동의 이익이 엄존한다는 점에서 출현한 것이다) 국가는 마치 이러한 혜택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한 채 자국민을 상대로 권력과 권위를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은 ‘표면적’으로나마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생활을 영위한다. 그렇다면 ‘비국민’을 향한 국가의 태도는 어떠할까.

대부분의 개발도상국과 많은 선진국에서조차 비국민은 홀대받는다. 많은 국가에서 비국민은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표면적’인 측면에서조차 대접받지 못한다. 물론 비국민의 기준은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 포괄적으로 봤을 때 비국민은 ‘타국민’을 뜻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타국민은 물론 ‘사회적 빈민’ 또한 비국민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는 이러한 비국민의 자유권과 재산권은 물론 생명권까지 ‘합법적’으로 빼앗는 권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합리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국살’은 많은 경우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의 방관과 자본주의의 폐해가 야기한 노동자의 죽음이나 학교 체벌의 피해자를 향한 사회 전체의 반응은 잠시 반짝이다 사그라질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미시적 차원의 ‘합법적’인 국가폭력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있다. 우리의 의식이 그렇다 한들 국가의 권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국가의 역할에는 합리성과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일종의 ‘폭력’이다. 우리는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동시에 사회 전반의 ‘합리적인 조절자’로서의 국가에 일말의 기대를 건다. 국가가 과연 ‘합리적’으로 사회의 조정문제를 조절할 수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다. 물론 국가가 가끔 민심수습 차원에서 옳은 일을 하고 사회적 생산력에 박차를 가하는 등 사회 전반에 기여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도 합리성과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인 조절자로서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지배주의적 사고를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에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정경유착은 지배계급의 ‘사무총국’ 역할을 하는 국가의 모습을 여실히 들춰내는 작은 부분일 뿐이다. 대기업의 임원들은 포괄적으로 지배계급, 혹은 국가고위층이라 칭할 수 있으며 이들은 국가정사에 종사하는 고급관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국가의 전반적인 합리적 조절자로서의 역할은 정경의 ‘쌍두마차’가 관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계급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한 국정은 ‘옳고 그름(是非)’이 아닌 ‘이해(利害)관계’에 따라 운영될 수밖에 없다. 물론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행동이 ‘옳다’고 ‘주장’하기는 한다.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지배계급의 논리는 결국 자본주의로 귀결된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안녕과 존속을 위해 폭넓은 분야에서 권위를 이용한다. 바로 근대 경찰이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근대 경찰은 치안 유지라는 ‘겉모습’을 지니며 지배계급의 특권과 권력을 보호하는 임무를 지닌다. 어떠한 국가를 예로 들어도 근대 경찰의 ‘속 훤히 보이는’ 임무는 명백하다. 노동 운동은 자산가들, 즉 지배계급의 재산 증식을 가장 직결적으로 위협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근대 경찰은 이러한 노동자의 운동에 유난히 예민하고도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용산 참사 사건만 봐도 그렇다. 국가는 노동 운동의 현장에 특공대를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강경하게 진압했다. 자산가들의 소득원은 ‘무조건’적으로 보호 받고 사회적 빈민의 권리는 잔인하게 짓밟히는 것이다. 용산 참사 사건에 대해 ‘주류’라 칭해지는 보수 언론들은 ‘이등 시민’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라 칭하였다. 강경 진압을 거행한 근대 경찰에 형사책임 추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사실은 꽤나 불편하게 다가온다.

국가의 상시적인 폭력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심어줄 여지가 다분하다. 더 큰 ‘채찍’을 준비해야 하는 지배계급으로서는 이것이 상당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피지배자를 ‘순한 양’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사람들을 동화시키려 채택한 대표적 수단이 바로 학교이다. 교과서에 ‘당연하다시피’ 적혀 있는 지배계급의 ‘진리’는 교육자에 의해 학생들에게 ‘교육’된다. 학생들은 교육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국가의 폭력을 정당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학교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한 우리는 국가의 폭력을 불쾌하게 느끼기는 하지만 이내 국가 권력에 순응한다. 일제가 가장 강력한 식민화 도구로써 교육을 활용한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소수의 의식 있는 독립 운동가를 제외한다면 일제의 식민 교육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일제 체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졌다. 교육은 비단 일제뿐만 아니라 전근대 사회에서 유럽 열강들의 식민화 도구로써 유용하게 쓰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교육은 지배층의 논리를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이다. 교과서가 비추는 역사 속 인물들의 대부분은 전쟁에서 빛을 발한 ‘영웅’들이다. 영웅들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지배계급은 또 하나의 국가사업을 사람들에게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킨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다. 국가는 교육이라는 훌륭한 제도를 통해 자국민을 ‘병기화’시킨다.

오늘날 많은 국가는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한다.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로 서구에서는 대체로 평화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세계 대전과 같은 큰 범주의 전쟁은 ‘아직까지는’ 일어나고 있지 않으나, 주변부에서의 ‘작은 전쟁’들은 전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전 세계 군사 지출액은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무용지물’의 무기를 만드는 것은 자원 고갈에 일조하고 있다. 국가는 군사력을 증진하기 위해 사회의 많은 부분들을 조종한다. 저자가 언급한 군-산-언-예-학 복합체라는 개념만 보아도 이는 명실상부하다. 무기를 만드는 군수업체는 군대와 함께 전쟁 준비의 중심축에 서있다. 이와 더불어 언론은 전쟁 준비를 더욱 부추긴다. 연예인들이 군복을 입고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은 군 복무를 준비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고무시킨다. 언론에서만 그러한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학교에서의 교육이라는 제도 또한 전쟁 준비를 돕는다. ‘간접적’으로 군 복무를 부추기는 사회에서 군 복무를 부정하는 젊은이들은 극단적으로는 ‘이단’, ‘반동분자’라고까지 멸시받게 된다.

전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속적으로 지도자들이 필요로 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국가는 정치적 부담 없이 약탈할 기회를 획득했다. 이것 역시 자국민이 아닌 비국민에 대한 국가 폭력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타국민을 목표로 한 약탈을 통해 자국민에게 ‘당근’을 쥐어주는 것이다. 또한 전쟁은 국가 주도의 기술 발전을 촉진해왔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많은 무기들이 전시 상황에서 폭발적인 생산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컴퓨터를 비롯한 많은 발명품들은 전쟁에서의 잔혹함의 산물인 동시에 기술 발전의 산물이었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합리적으로 전쟁을 강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해냈다. 그 중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적군의 ‘악마화’이다. 적군을 절대적 ‘악’으로 상정했을 때 비로소 아군의 단결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국가는 전시 상황에서의 성폭행, 노예화, 그리고 살인 행위를 정당화한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국가는 사람들의 인간 본연의 가장 추악한 본성들을 여과 없이 들추어내는 것이다.

종교 역시 국가, 전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국가는 종교의 힘을 빌려 전쟁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킨다. 기독교의 경우, 초기 기독교는 비타협적 평화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배계급과 손을 잡은 기독교는 오히려 전쟁을 옹호하는 태도로 돌변했다. 군목은 군인들을 ‘신의 이름’으로 세뇌한다. 군목의 설교와 희생은 전시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도록 ‘만들어’지며 적군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한다.

불교 역시 전쟁을 부추기는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했다. ‘불살생’을 기본 원리로 하는 불교가 결국 전쟁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종군 승려는 ‘어쩔 수 없는’ 폭력은 불가피하다며 국가적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처럼 종교는 신앙을 이용해 ‘정신적’으로 군인들을 조종했다.

전쟁의 ‘낭만화’ 역시 국가가 주도하는 전쟁 사업 중의 하나이다. 전쟁 영화는 전쟁을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비출 수 있게 유도한다. 전장에 뛰어드는 ‘용사’의 모습은 ‘초인’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을 ‘살인 기계’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지속적인 전쟁 영화에의 노출은 사람들의 무의식을 관장하고 지배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전쟁을 혐오적이고 불쾌하게 묘사한 전쟁 영화가 얼마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수많은 다른 나라들은 병영 국가이다. 이들은 국가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도모한다. 그렇기 때문에 병영 국가는 자국민의 평화 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다. 국내 기독교계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으로 취급된다. 여호와의 증인은 초기 기독교의 이념과 사상을 많이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군 복무를 거부한다. 전쟁과 군대에 가장 단호하게 반대하는 여호와의 증인을 국가는 ‘또라이’라 칭한다. 여호와의 증인에 속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농민이나 노동자라는 점도 국가적 탄압의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 외에도 사람들은 국가적 폭력, 살인, 그리고 전쟁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해왔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반전 운동을 거행해왔다. 각종 반전 평화 운동에 힘입어 많은 나라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쟁 혐오증을 가지고 있다. 더하여 ‘좌파적 평화운동’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인식시킨다. 전쟁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전 운동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불편한 인식을 건드리고 있다.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성과가 없더라도 그러한 시도 자체만으로도 용기 있는 반전 운동은 의의가 크다. 이미 넓은 대중성을 띠고 있는 좌파적 반전 운동을 봤을 때, 여호와의 증인과 국가 중 누가 ‘또라이’인지는 이미 짐작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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