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원의 녹색 면죄부를 고발하다

일반부문 3등작

300원의 녹색 면죄부를 고발하다

헤더 로저스, 『에코의 함정』

전상희


“착함”을 팝니다

서울살이 6년 차에 지하철 2호선은 아직도 버거운 터라, 새로이 바뀌는 광고판들이 갈길 몰라하는 내 두 눈을 잡아두곤 한다. 그 날도 어김없이 올려다본 광고판엔 눈도 크고 코도 높은 미녀들 사이로, 생경한 흑인 여성이 원두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페루 나랑히요 조합의 공정무역 원두와 코코아 파우더 사용으로 저개발국 생산자의 자립을 지원하는 착한 마음, 마음까지 예뻐지는 커피” 마침 입도 텁텁하던 터에 한번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유기농법에 공정무역을 통해 만들었다니 아마 다른 커피 우유보다 300원쯤 더 비쌀 테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착한 소비자겠거니 싶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는 얼굴을 예쁘게 해준다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음까지 예뻐지게 해준다니, (돈만 있다면) 요즘같이 살기 좋은 세상도 없는 것 같다.

착한 소비? 차악 소비라도 되면 다행이지

어느 때부터인가 ‘착한 소비’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착한 소비’란 생태계와 인류의 공존을 생각하는 소비로 자연의 오염을 최소화하는 유기농법이나, 농민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공정무역 등을 통해 만들어진 제품들을 소비하는 것을 일컫는다. 자연이 강조되면 ‘녹색 소비’나 ‘친환경 소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소비자들이 무조건 싸고 양 많은 상품을 찾기보다 합리적인 생산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상품들을 선호하기 시작하였고, 기업들도 이에 발맞춰 각종 ‘친환경’, ‘공정무역’, ‘착한’, ‘아름다운’ 상품들을 내놓았다. 초등학교 표어 대회에서나 인기 있는 주제였던 자연보호나 인류공존과 같은 문제들이 특유의 고리타분함을 벗어나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를 잡아간 것이다. 생태계 보존에 기여하는 제품을 사고파는 차세대 환경주의는 심각하고 우울한 문제들에 대한 경쾌하고 세련되게 답하며 심각한 환경주의자 외의 일반 대중들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은 필요한 물건을 사고 기업들은 수익을 올리면서도 자연을 살리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다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으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착한’ 소비라 하겠다.

그런데 이 좋은 해법을 두고 『에코의 함정』의 저자 헤더 로저스는 딴지를 건다. 딱 잘라 말해 ‘녹색’과 ‘자본주의’는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착한 소비자라 뿌듯해하던 우리들에게 ‘게으른 환경주의자’라 일침을 가하고, 지속 가능한 소비와 성장은 자신을 희생할 마음이 없는 대중에게 안성맞춤이며 갈등을 피하려고 낙관주의에 파묻혀 버린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착한 소비라 믿고 있었던 ‘마음까지 착해지는 커피’는 실상 반자연적이고 반인류적인 결과를 이끄는 경우가 허다하여, 즉 차악의 선택조차 되지 못하는 소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광고판에 눈을 맡긴 채 덜컹덜컹 따라 가고 있던 나에게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시원하게 끼얹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신차려! 성형미녀가 ‘예쁨”을 팔든 흑인여성이 “착함”을 팔든, 모두 네가 지갑을 열길 바랄 뿐이야!”

전지전능한 프리패스권, 유기농 인증 표식

헤더 로저스의 비판은 소비 자본주의라는 구조 하에서 ‘친환경’이라는 수식이 녹색 허울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그는 이 쉽고 편리한 ‘친환경’ 해결책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결과, 이 해결책에 내재되어 있는 장애물, 친환경 제품 이면에 있는 정치, 경제, 환경, 사회적 폐해를 파헤친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측면은 크게 세가지로 식품, 주거, 운송과 관련하여 뉴욕에서의 인터넷 페이지 클릭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각각의 산업현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다소 충격적인 현장과 마주하게 된다.

먼저 그는 ‘유기농’ 산업의 숨겨진 이면을 밝혀낸다. 그는 유기농 상품들이 생산지와 소비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 어떤 식으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기 어렵고 이를 이용하여 유기농이 품은 이상과 괴리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다른 먹거리 상품에도 적용되는 말이나, 특히 ‘유기농’이라는 말이 소비자와 생산자간에 상당한 해석의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소비자들은 유기농 인증 표식을 의심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소비자들은 유기농 인증 표식을 얻은 제품들이 생태 친화적이고 그 출처가 도덕적으로 순수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생산지에서 ‘유기농’ 규정을 임의로 해석하고 노골적으로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고, 유기농 인증표식이 진행 중인 파괴행위를 덮어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한 관계자는 개발도상국의 숲 개간을 촉진시키고 이에 가장 큰 압력을 가하는 것은 미국과 유럽의 유기농 설탕 수요라고 밝혔다.(책 p.106) 자연을 지키는 유기농 표식이 자연을 헤치는 전지전능한 허가증으로 통용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유기농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갖는 또다른 ‘환상’은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지역농민들에게 유기농 제품의 비싼 가격이 고스란히 돌아간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유기농법의 농민들은 경작 비용과 유통비용부족, 허점투성이인 식품 안전 규제, 해결할 수 없는 부채, 지나치게 낮은 임금등을 감당해내지 못한다. 자신이 생산한 식품조차 구입할 능력이 없을 정도이다. <세계 공정 무역 협회>에 따르면 공정무역 인증을 받은 농민이 제값을 받고 판매한 작물은 20퍼센트에 그쳤다. (책 p.102) 소규모 생산자는 정치, 경제, 규제적 도구가 든든히 방패막이 되어주는 대기업의 산업식 유기농법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다윗과 골리앗의 경쟁 속에서 공장식 산업 생산방식을 닮아가 허울뿐인 유기농만 남고 소비자들이 기대하는 먹을거리를 공급할 진정한 유기농 생산자의 미래는 요원하다. 사실상 유기농이 소비자, 생산자, 생태계에게 주는 유익함이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때때로 500%까지 차이가 나는 유기농 프리미엄 값을 기쁘게 혹은 뿌듯하게 지불한다. 이들은 이미 친환경’, ‘유기농’이라는 말에 상품보다 상품에 (내포되어있을 것이라 믿는) 윤리적 생태적 가치를 소비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값의 차이가 경제적 효율성 원칙에서 살짝 벗어난 자신의 선택을 더욱더 의미 있고 품격 있게 느끼게 해줄 뿐이다. 유기농, 공정무역 표식은 근사한 홍보수단임과 동시에 사회의식을 가지고 싶어하는 고객들에게 접근하는 상업수단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자연을 지킬 수 있는 비싼 특권, 친환경 주거

주거용 건물과 상업용 건물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로 인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는 각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미국은 약 40%, EU는 약 36%, 영국은 절반이다. 따라서 친환경 건물은 우선 건물을 사용하는 동안 에너지가 소비되면서 늘어나는 생태 발자국을 지금보다 대폭 줄일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다. 더욱이 새로운 환경주의는 불편과 고생을 감수할 필요 없이 생태계를 보호하면서도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다고 약속한다.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주택에는 끝내주는 녹색 가전제품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러한 친환경건물을 건설하고,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일반가정에서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라면 광범위한 변화를 가로 막는 근본적인 장벽은 그대로 남게 된다. 자연보호도 부유층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값비싼 특권이 된 셈이다. 앞선 유기농 파트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친환경 마크를 단 제품이나 건물은 그 값을 달리한다. 모두가 쉽게 소유하게 된 필수품에도 친환경 표식하나가 또다른 계급구매를 만들어내고 소비자의 계층화를 불러온다.

주거 측면에서 저자는 독일 친환경 주거마을 프라이부르크의 성공사례를 가져온다. 그는 무엇보다 제도적, 구조적 변화가 필수적이었다고 말한다. 친환경 주거에 대해 기술자들은 이래저래 못한다는 핑계를 대어왔으나, 막상 관련 법이 통과되니 하기 시작했다는 셈이다. 또한 녹색당이 창당되어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제3당이 되어, 친환경 운동이 강화되고 새로운 기획이 만들어진 점도 크게 뽑는다. 오늘날의 프라이부르크를 있게 한 마지막 사건은 1986년 러시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원자력기술의 최후를 보고, 다시금 생각해볼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일본 원자력 사고를 계기로 뒤늦게 녹색당이 출범하여 어렵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위기는 녹색사회를 꿈꾸는 하나의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프라운호퍼 태양에너지 설비 연구소> 연구소장 베버 교수은 미국이 재생에너지를 연료로 하는 녹색건축을 수용할 가능성에 대해 9.11사건이 일어났을 때와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답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위기에서나 사람들은 재생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책 p.150) 결국 인간은 고층 아파트에 떨어져서 바닥에 닿아 바스러지기 전까진, 닥칠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안전해지기 위해 위험이 필요하다.

노력하고 있으니, ‘당분간만’ 청정하지 않은 자동차를 타세요.

매체에서 나오는 친환경기술들은 대게 끝내주게 멋지나, 아직 상용화는 멀어 보인다. 저자는 매체들이 고의적으로 현실성이 떨어지는 신기술과 최근에 새로 등장한 기술만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여 앞으로도 계속 청정하지 않은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 밖에 없다는 통념만 강화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사실상 자동차업체에겐 수백 달러의 이윤이 남는 경량의 소형 자동차보단 수천 달러의 SUV를 판매하는 것이 이득이다. 그러나 친환경 소비에 대해 관심을 돌리고 있는 소비자들의 사회의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신호만 끊이지 않고 보내주는 것이다. 대중교통 이용, 녹색 에너지 차량과 같은 친환경 대안은 사실상 자동차 업체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제너럴모터스>의 주도 아래 세계적으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동차 업계가 전차망을 모두 매입해 용의주도하게 해체한 바 있다. 기업들은 이 치졸한 방식으로 승객을 운전자로 변모시켜 자동차 사업의 번창을 꾀하였다. 또한 초창기 자동차 업계의 거물들은 20세기 내내 휘발유-전기 하이브리드 자동차나 전기 전용 자동차 같은 대안 기술을 자체적으로 연구해 왔으면서도 시장에 내놓지는 않았다. 저자는 아직 청정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기업들의 주장에 일침을 가한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전기 전용 자동차는 이미 한 세기 전에 도입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기업의 이기심을 폭로한 저자는 이어서 탄소 상쇄권을 희대의 사기라고 소개한다. 탄소 상쇄 산업은 세계 최고의 낭비 국가들이 자신들의 죄책감을 사회적 의식으로 포장하여 발전하고 있다. 영국의 락밴드 콜드플레이는 자신들의 앨범이나 공연 등으로 인해 과도하게 배출된 탄소를 줄이기 위해 망고 플랜테이션의 나무들을 심는데 비용을 지불했고, 팬들은 그들의 의식 있는 행동에 환호하며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탄소상쇄비용은 녹색허울에 불과했다. 저자가 실제로 찾아간 플랜테이션의 나무들은 물이 없어 시들고 말라 죽어갔고 체계적인 관리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탄소거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탄소 거래에 대한 더반 선언’에는 300여 환경 단체, 민중 운동 단체, 학자 등이 동참했다.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은 ‘탄소 거래가 기후 위기를 멈출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며 탄소 상쇄권 거래 방식이 ‘잘못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토착 생태계를 보호하고 사회의 복리를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탄소까지 줄이는 사업이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그 생각 자체에 있다고 싸늘하게 지적한다.

궁극적인 도덕적 질문의 해결은 그 질문에 대한 사유의 종식이다. (앨런 브링클리, 미국 역사학자)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생태계와 인류 공존의 문제에 대한 편리하고 세련된 대답을 하나 찾았다. 어느 누구도 손해보지 않고, 불편할 필요가 없다. 예쁜 디자인은 물론, ‘친환경’이란 마크로 죄의식은 가려주고 사회의식은 채워주는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몇 백원 혹은 몇 천원쯤을 기꺼이 더 지불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게으른 환경주의자가 꿈꾼 ‘지속 가능한 생태계’는 갈수록 요원해지고, ‘지속 가능한 소비’와 ‘지속 가능한 기업’만이 날로 번성 중이다.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반환경적인 결과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녹색 제품이나 탄소상쇄권의 구매로 생태계를 보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면, 더 이상의 문제의식을 멈추어버린다는 데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해도 위와 같은 해결방식은 ‘소비’라는 메커니즘 안에 세워진 것에 불과하다. 듣기 좋은 수식어구에 현혹된 소비자들은 단지 소비만으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소비자들은 녹색 제품을 구매하며 자신도 사회를 위한 실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또다른 소비라는 돌파구를 찾아낸 기업들의 덫 안에 맴도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기업은 언제나 영리하다. 흐르는 강물을 마실 수 없도록 오염시킨 것이 기업의 공장이나, 죄를 물을 틈도 없이 청정한 생수를 만들어 되팔 뿐이다. 과도한 생산과 소비로 발생한 문제를 또다른 생산과 소비로 해결하려는 메커니즘 안엔 진정한 녹색 문제가 자리잡을 리 없다. 이는 문제상황에 대한 전면적 치료라기보다는 순간 마취에 가깝다. 오늘날 우리는 주사바늘이 주는 찌릿함만을 부담하며 당면한 아픔을 도외시 하고 있다. 이는 소비 자본주의 하에서 이윤추구를 포기할 리 없는 기업과, 손해도 보기 싫고 생각 없어 보이기도 싫은 소비자를 위한 편리하고도 꽤 근사한 방법이었다.

호박에 녹색 페인트 묻히면, 수박이 되나요?

이 책의 주된 포커스는 미국 사회의 녹색소비의 허울을 벗겨내는 데에 있으나,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도 그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는 어렵다. 우스운 예로, 88올림픽 시기에 하늘에서 바라다보면 친환경적인 국가로 보이게 하기 위해 민둥산이나 빌딩 지붕마다 녹색페인트를 뿌리던 일화가 있다. 이를 비웃는 오늘날 우리의 손에도 눈가리고 아웅식의 녹색 페인트가 쥐어져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5월 대한민국 새마을 박람회에서 “뉴새마을 운동으로 펼치고 있는 스마트 운동과 그린마을 운동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저탄소 녹색 생활 실천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의 녹색언사는 언뜻 들으면 친환경주의자와 다를 바 없으나, 사실상 이 대통령이 추구하는 녹색성장에는 88년대식 녹색 페인트가 뭍은 성장주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녹색성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장에 있다.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호하나, 어찌하였든 녹색생활실천을 이행하면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요지로, 자연을 고이 살피고 아껴서 더 써먹자는 말씀이다. 수박이 필요하면, 호박에 줄 긋지 말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노력이 필요할지라도 수박씨를 심어야 한다. 아니면 솔직히 호박을 가져오고 싶었다고 밝히던가.

15세기 로마 교황은 금전이나 재물을 봉헌한 사람들에게 죄를 면해준다는 이른바 ‘면죄부’를 사람들에게 교부한 바 있다. 언젠가 재물을 봉헌하려고 길게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 그림을 보고, 실소를 터뜨린 적이 있다.. 교회의 건립 비용이나 부족한 재정을 해결하고자 한 교황의 속뜻은 모르고, 돈 몇 푼으로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그 무지함이 놀랍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오늘날 우리도 몇 백원, 몇 천원의 녹색면죄부를 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에 반해 몇푼의 녹색면죄부로 얻게 된 생태계, 인류 문제에 대한 사유의 종식은 너무나 값비싼 대가가 아닐 수 없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생태계 안에서 살아갈 후손들에게 우리의 착한 소비는 이해 받을 수 있을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상희야,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어린 시절, 잘못을 저지르고 걱정 반 두려움 반에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보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상희야, 잘못을 했으면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한거야. 조금 아프고 힘들어져야 하는 게 맞는 거야.” 따스하게 안아주고 어떻게 하면 그 무서운 일을 피할 수 있을지 속삭여주지 않는 엄마가 당시 나에겐 너무나 약속하고 가혹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날의 어머니 덕분에 문제를 마주하는 태도를 제대로 배우게 되었다. 모든 일엔 제 값을 치러야 한다. 담담하게 따라오는 아픔을 감수하고,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헤더 로저스는 일부 환경주의자들이 진정한 해결책을 구석에 밀어 놓은 채 기존의 권력 구조를 거의 위협하지 않는 해결책만을 시행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렇듯 생태계 문제의 해결책도 당연한 불편을 피하지 않는 데에 있다. 단지 300원을 더 지불하고 뿌듯해하는 소비가 아니라, 그 동안의 과잉 소비와 무분별한 생산이 만들어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가를 정당하게 치러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이고 법제적인 노력과 계획이 있어야 하겠고, 이에 따르는 재정적인 손해와 일상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함이 당연하다. <오거닐 밸리>의 성공은 경영에 따르는 농민 조합원들이 스스로 정한 생태적 기준과 사회적 기준을 충족시키는데 따르는 이윤의 손실을 기꺼이 감수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즉 농민 조합원들이 새로운 경제논리를 구축해낸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국가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에 세금을 물리고, 책임 있는 유기농 인증체계를 만들어내고 이를 감시할 기관도 필요하다. 탄소세를 도입하여 배출 규제와 연비 규제를 강화하며 거둬들인 탄소세를 재생에너지 개발에만 재투자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일들을 ‘힘들고 어렵지만’ 이루어내야 한다. 유럽은 미국과 달리 탄소세 형태로 유류세를 부과하여, 미국도로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더 작고 더 가벼운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영국과 유럽 자동차 산업의 기준이 되었다. 생태계에 이로운 방향으로 규제가 이루어지면서 진정한 친환경문제의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정치구조와 경제 구조에 대한 재성찰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 발생한 우리나라 녹색당의 등장도 반갑다. 다만 경제영역에서 버젓이 자행되었듯이 정치영역에서도 녹색이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더욱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각 지역마다 다양한 생태 문제는 각각의 사회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생태계보존과 인간의 삶은 단순히 이분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마존의 숲을 보존하고자 생사길에 내몰린 인디언에게 무조건 도끼를 뺏는 것이 능사가 아니듯, 생태계를 보호하는 일은 인간과 생태계의 연관성을 철저하게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자연을 순수한 그 원형대로 박제해 박물관에 고이 모셔두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다. 자연을 최대한 덜 망가뜨리며 살아가기 위해 인간과 자연이 진실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익숙함에 낯설어지는 연습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분명 생각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항상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과 조우할 때만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익숙함은 손쉽게 사유를 쉬게 하고,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생각과 의식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한다. 익숙함에 낯설어지자. 기업의 녹색 손길에도 의식적으로 생각을 깨우고, 익숙한 소비 메커니즘으로 이끄는 ‘착한 소비’의 해결책에 낯섦을 느끼자. 기대하지 않았던 참혹한 결과를 목도하고 그제서야 깨어나 후회하는 타이타닉의 승객이 되지 말고, 적어도 그보단 먼저 깨어있자. 운 좋게도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나, 안타깝게도 항상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오늘의 소비와, 생산과, 정치와, 경제에 다시 한번 되물어보자. 당신은 오늘도 생태계와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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