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숭고한 단어를 숭고하지 않게 말하는 방식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가장 숭고한 단어를 숭고하지 않게 말하는 방식
슬라보예 지젝,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정재연
1. 사유를 재발명하라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의 곳곳에서 지젝이 ‘혁명’을 논할 때, 우리는 곧잘 그를 레닌에의 회귀를 꿈꾸는 이상적 공산주의자로 읽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다. 혁명은 오랜 시간 국가에 대한 저항이 존재하는 곳에 낭만과 숭고한 대의의 상징으로 표상되어 왔다. 그리고 지젝이 독자들에게 이제 그 흔하지만 멀기만 한 표상에 불씨를 당기자는 요청을 하는 것으로 본서를 읽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직접적 요청을 한 적이 없으며, 그러한 방식으로 그를 읽을 때 우리는 지젝을 오독하게 된다. 정확히 그가 요청하는 것은 각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향유하는 방식에 대한 전적인 재사유와 재발명이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사유의 재발명』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칸트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숭고’의 개념은 근대인이라면 누구나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는 시대의 사유이다. 그런데 이때의 근대적 숭고란, 언제나 안전한 지점에서만 가 닿을 수 있는 압도의 감정이다. 풍랑과 파도에 실제로 몸을 부딪혔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숭고라기보다는 순수한 공포 그 자체이며, 숭고는 언제나 투명한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창 밖에 몰아치는 풍랑을 바라볼 때에야 찾아온다. New york times에서 21세기에 세계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Window'를 선정한 것은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숭고에 물든 근대인에게 언제나 압도와 경이로서 묘사되어 온 것들은 창밖의 대상들이었다. 그것들을 묘사하는 그 자신은 안전한 곳에 머문 채로 말이다. ‘혁명’을 말할 때 우리는 쉽게 같은 방식의 함정에 빠진다. 우리 존재의 중핵, 즉 무의식은 안전한 곳에서 부동의 위치를 점한 채로 세계의 변혁을 묘사하며 그 거대함 앞에 압도되는 것이다.
이는 그간 정신분석학이 어째서 혁명에 대해 유보적이거나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왔는지 그 이유와도 궤를 같이 한다. 정신분석은 주체 차원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진실로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 알고 있으며, 주체가 욕망을 향유하는 방식이 변화하지 않을 때 변혁에 대한 그 모든 묘사들은 단지 숭고의 차원에서, 저 창밖에서 빛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2. 누가 주체가 될 것인가
주체 차원에서의 변화를 논할 때, 우리는 ‘누가 주체가 될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현대 정치의 대당범주는 적과 동지가 아니라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아감벤의 견해를 끌어와 지젝은 현 세대의 정치적 주체는 더 이상 ‘노동계급’이라는 이름 안에 온전히 묶일 수 없으며, 경계 밖으로 밀려난 벌거벗은 생명, 즉 ‘프롤레타리아적-입장’에 처한 이들 모두가 정치적 주체라고 단언한다. 이들은 지젝 식으로 말해서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는 자들’이다. 이들은 모든 지배적 주인 기표에서 한 발 물러서 있으며, 그럼으로써 정치적 주체가 된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속에 있다’는 선언을 통해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알튀세르가 말했을 때, 정확히 이것은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묘사이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 대한 묘사이다. 만약 우리가 이미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떠한 구조 속에 못박혀 있으며, 그 안에서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ㅡ기계가 인간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모형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원본임을 알 때ㅡ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임을 나타내 주는 표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기계와 완전하게 구분되는 초월적 자유를 구현하는 ‘인간’과, 구조 속에 못박힌 현실로서의 인간, 그 부정적 틈새에 머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정의일 테니까 말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원형일 수 있음을 폭로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계가 어떻게 주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의 리플리컨트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기계임을 알고 난 후,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기억들을 회상한다. 그 모든 것들이 주입된 것임을 알고 그가 느끼는 분열과 절망은, 정확히 그가 주체화되어가는 과정을 체현한다. 그는 자신이 ‘외래적 신체’ 안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외래적 신체의 ‘자기’에 내러티브를 삽입하고, 그럼으로써 자유를 획득한다.
칸트 역시 인간이 자신을 외래적 신체에 머물고 있는 이방인으로써 바라보는 한에서만 자유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에게서 인간의 정념과 오성, 순수이성은 ‘형식’으로 존재하며, 그는 그것들의 사실성에 대해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인간이 그것을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없음을, 즉 그것을 정초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확신한다. 그에게서 인간은 그저 조작되어 돌아가는 시계와도 같고, 그러므로 칸트의 윤리는 철저히 소외의 윤리이다. 몇몇 ‘인간주의’를 좇는 비평가들은 칸트의 이러한 윤리에 대해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쉽게 간과하고 마는 것은, 칸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 ‘외래적 자기’를 철저하게 ‘가장 자신인 것’으로 취할 때 비로소 자유가 출현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의 의미이다. 우리는 주체가 법칙적, 인과적 필연성에 발이 묶여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하나의 능동적 역할을 하는, 자유가 출현하는 바로 그 지점을 발견해야 한다.
3. 부정의 공간은 어떻게 가능의 공간이 되는가.
인간은 생각하는 곳에 있지 않다. 즉 사유와 존재는 불일치하며, 근본적으로 인간은 탈구되어 있다. 이것이 지난 시간 데카르트와 싸워 온 이들이 내세운 명제였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사유를 무의식의 차원으로 침잠시키며, 향유의 일부를 양보한 채로 사회적 질서로 삽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젝에게서 ‘부정’ 혹은 ‘결여’란 존재에 선행한다. 선행하는 부정으로 다시 돌아가 머무는 것은, 현실성에서 가능성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부정의 공간은 가능의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부정은 모든 것이 공백으로 남는 공간이며, 여기서부터 모든 ‘보편’은 재사유될 수 있으며 가능성의 전도가 발생한다.
‘환상을 횡단하라’는 라캉의 언명은 결국 ‘떠맡으라’는 요청과 같다. 필연적 인과법칙에 발이 묶인 자신을 진정한 자기로 떠맡을 때 이 기계-인간은 비로소 주체가 되고, 외래적 신체에 자유가 출현한다. ‘환상을 횡단하라’는 말에 뒤따르는 ‘그리고 나서 그 곳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주인기표에 거리를 둔 벌거벗은 생명들은 ‘무엇이 현실인가’를 묻기에 앞서 ‘무엇이 가능한가’를 다시 물어야 하는 공백 속에 있는 것이다.
지젝은 인터뷰 속에서 아주 은밀하게 칸트와 라캉의 논변을 뒤좇고 있으며, 그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공통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은 부정이 존재에 선행하며, 이것을 ‘떠맡을 때’ 자유가 출현한다는 사실이다. 지젝이 “희망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147p.)라고 했을 때의 ‘희망’은 ‘자유’와 호환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선이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곧 보편성을 다시 쓰고자 하는 노력과도 같다. 모든 것은 새롭게 쓰여져야 하며, 우리는 ‘보편’이라 부르던 것들을 재명명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이 재명명은 바로 지젝이 말한 것과 같은 ‘윤리의 정치화’ 작업이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의 윤리들을 실현하기에 앞서 무엇이 보편의 윤리가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서 지젝은 그간 그의 저작들을 읽어오던 독자들이 예상했을 난해함의 장벽을 깨고, 주장의 토대가 되는 이론적 설명들을 과감히 생략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지젝이 본서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모든 것을 새롭게 사유하라”는 주문은, 그가 처음 한국 정치 철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때부터 지금까지 펼쳐 온 모든 이론적 작업을 응축하고 있다. 주목할 만 한 것은, 그가 단 한번도 ‘어떻게’와 관련하여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무책임’이라는 말로 일갈한다면 그의 논변을 잘못 읽었음을 드러내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를 ‘안다고 가정된 주체’자리에 놓고자 하는 유혹에 빠졌음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다. 그가 “우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이 ‘알지 못하는 주체’ 자리에는 지젝 역시 포함되며, 그는 가장 솔직한 제스춰로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으나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그 ‘어떻게’의 답을 그가 애써 제시한다면, 이는 그 자신이 ‘윤리의 정치화’라 부른 길과 정확히 배치되는 길일 것이며, ‘주체 차원에서의 변화’와도 상관이 없는 길이 될 것이다.
4. 정치는 윤리에 선행한다.
‘윤리의 정치화’와 관련하여 지젝은 “정치는 윤리에 선행한다”는 말로 그것을 정의한다. 이것은 그가 부연 설명하고 있듯이, 결코 정치를 위해서라면 윤리가 폐기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로, 윤리는 오로지 정치를 통해 복원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공리주의자의 ‘공동의 선을 위해 행위함’이 내포하는 오류를 역전시키는 것이 ‘윤리의 정치화’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것은 정언명령을 하나의 텅 빈 장으로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실제로 칸트는 정언명령을 하나의 ‘형식’으로서 제시할 뿐, 그 형식의 내용은 텅 비어있다고 말한다. 칸트주의자를 자청하는 이들이 ‘나는 공동의 선을 위해 행위했다’고 말함으로써 칸트에 대한 오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경우를 우리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칸트의 윤리는 정확히 내용이 텅 빈 정언명령이라는 장에 스스로 무언가를 써 내려 가는 실천 그 자체이다. 순수이성을 사실성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없다고 말하며 소외의 윤리를 개진하는 칸트가 동시에 ‘자신의 기질마저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라고 말할 때 발생하는 역설 속에서 우리는 정언명령이 ‘가능적인’ 공백으로 남는 바로 그 장면을 목도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텅 빈 장일뿐이며, 이 장은 철저히 선험적인 공간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곳에 무언가를 써 내려 가는 행위 그 자체, 그리고 그 안에 기입되는 내용은 온전히 우리의 정치적 선택이다. 이것이 ‘윤리의 정치화’이며, 알렌카 주판치치가 말하는 ‘실재의 윤리’이다.
책의 후반부에 부록처럼 따라 붙은, 그러나 공동선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기는 알렌카 주판치치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실재’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한다.
“실재란 현실 자체가 갖는 적대의 모순이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말하자면 현실이 순조롭게 기능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은폐되어야 하는 지점인 겁니다. 그래서 실재란 현실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안에 내재하는 모순입니다.” (289p.)
실재를 단지 ‘상징계 너머의 정의될 수 없는 차원’ 정도로만 인식하던 이들에게 주판치치의 정리는 놀라움일 수밖에 없다. 실재가 현실 안에 내재하는, 그러나 현실이 계속해서 흘러가기 위해서 은폐되어야만 하는 공간이라면, 실재와의 만남은 가장 치명적으로 외상적인 조우가 될 것이다. 일찍이 지젝은 ‘실재와 마주치면 죽는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 말을, 실재와 마주치기로 결단함은 죽음에 대한 결단과도 같다는 말로 바꾸어 볼 수 있다. 뒤이어 지젝이 ‘성공적인 행위는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성공적인 행위는 자살이다’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실재와의 조우가 ‘가장 성공적인 행위’에 해당함을 보여준다. 실재와 조우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결단과도 같이 주체에게는 치명적이다. 우리는 그 외상적 조우를 계속해서 회피하기 위해 우리가 현실에 참여하여 ‘무언가를 하고 있음’을 역설하려 부단히 애쓴다. 그러나 우리는 부정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 곳에서 우리의 부자유를 인식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공백 속에서 윤리를 다시 써야만 한다. 이것이 지젝의 요청이다.
지젝의 주장이 지식인들 사이에 지난하게 이어져 온 이데올로기 비판 차원에서 머물며, 실천적 측면에서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과 실천에 가하는 손쉬운 이분화이다. 이론이 완결된 인과관계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실천은 필연의 사슬로 완성된 듯 보이는 인과관계를 중지시키는 행위이다. 지젝이 요청하듯이 기존의 보편이라 여겨지던 인과관계를 중지하는 것이 ‘벌거벗은 생명’인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라면, 그 과제의 수행은 이미 그 자체로 급진적인 하나의 실천이다.
5.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지젝은 ‘운동을 위한 공간을 지탱하는 국가 장치가 없이 운동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국가 권력의 영역 밖으로 스스로를 빼내고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려는 시도의 유효성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그는 많은 구좌파들의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그는 어떠한 자유주의적 준칙들이 지켜져야만 하는 경우들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공통의 것’을 논할 때 그는 철저히 공산주의자로 남는다. 그가 현대의 정치적 주체를 ‘노동계급’이라는 이름에 한정하지 않고 ‘배제된 자들’로 명명했을 때, 그것은 맑스주의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외연의 급진적 확장이다. 더 이상 우리는 가진 것이 ‘몸뚱이밖에 없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의 외연에 함축되지 않는다. 일반적 지성은 지적 재산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몸뚱이는 유전 공학의 기형적인 발전으로, 자연이라는 공간은 생태적 파괴를 통해서 사유화되고 있다. 모든 것을 빼앗긴 후에도 공통의 것으로 남아 있으리라 믿었던 것들마저도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닐 때, 우리는 철저히 ‘나는 생각한다’의 차원에서만 간신히 실체를 보존할 수 있는 호모 사케르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지젝은 여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몸과 정신, 자연적 공간이라는 상징적 지탱물마저 모두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이들은 단지 가난한 자들만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공간에서 유동적으로 살아가는 이들 모두이다. 그리고 이 위기에 예방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은 첫째로 그 벌거벗은 형상을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외상적 만남 이후, 불가능으로 가장한 채 우리를 기만하려던 많은 것들이 공백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공백에 무엇을 써 내려가야 할 지, 무엇이 우리의 ‘공동선’이며 ‘보편’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결국 지젝은 많은 이들이 가장 절실히 그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개인주의로의 환원이라는 오명을 쓰게 될까 섣불리 말하지 못했던 그 말, ‘주체 차원에서의 변화’를 본서에서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혁명이라는 가장 숭고한 목적을, 가장 숭고하지 않은 차원에서 실천하는 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야말로 우리는 창 밖에서 빛나던 혁명이라는 단어를 실재에서 길어 올려 우리 앞에 가져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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