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한 말의 목에서 밧줄 끌러내기
일반부문 2등작
자살한 말의 목에서 밧줄 끌러내기
김영하, 『너의 목소리가 들려』
전기화
1. 말 같지 않은 말
“이 씨팔 새끼가 어른 말이 말 같지 않아?(202쪽)"
말 1.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기호. 곧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목구멍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나타내는 소리를 가리킨다.
“어떻게? 졸라 폭력적으로. 말로 하면 안 되냐고? 안 돼. 왜? 우리는 말을 못 하니까. 말은 어른들 거니까. 하면 자기들이 이기는 거니까 자꾸 우리보고 대화를 하자고 하는 거야.(163쪽)”
'말'은 화자와 청자를 가정한다. 아니, 필요로 한다. 만약에 나의 말을 '말'로서 들어줄 청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말 같지 않은 말'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쓰이는 이 음성 기호를 평등하게 부여받았을까, 자신의 말을 '말'로서 들어줄 청자들을 가지고 있을까. 소설 속 십대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그들에게 ‘말’ 같은 것이 없다. 그들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는 타인의 귀에 다가가 '말'이 되어버리기 전에 부서지므로 그들의 말은 ‘말’이 될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토바이의 굉음을 목소리 삼아 성난 개떼처럼 폭주하는 것뿐이다.
폭주하는 그들의 머리 위로 자꾸만 말의 그물이 던져진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말’인양 위장하며 다가와 그들의 목을 조르며 흔들어댄다. 막히는 목구멍 사이로 아무리 '말 같은 말'을 뱉어내어도 왜인가, 그들의 소리만큼은 '말‘로서 받아들여지질 않는다. 속수무책 무력하기만 하던 그들 앞에 제이가 나타난다. 제이는 기존의 말을 지움으로써 자신을 포함한 폭주족들의 새로운 '말'을 구축하고자 한다. “요란한 폭음으로 뒤덮인 밤의 거리에서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엄청난 배기음과 경적 소리 때문에 대화는 가능하지 않았다." 기존에 구축된 말의 질서를 지우는 굉음으로 자신들을 포박하려 드는 말의 그물을 ‘뚫고’ 그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한다. 구호도 비전도 없이, 소음이 된 그들의 목소리는 세상을 향해 아우성친다.
2. 말 없는 자들을 위하여
“가난한 십대는 외국인 불법 체류자와 비슷한 급의 천민이었다. 최저시급을 받고 비천한 대접을 감수하면서도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들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164쪽)”
가출한 열 네댓 살의 여자 아이들은 원조교제를 해 벌어온 돈으로 남자아이들 방에 빌붙는다. 생일엔 “왜 태어났니 씨발아, 왜 태어났니 씨발아, 이 좆같은 세상에 왜 태어났니”라는 노래를 불러주고 밤마다 뒤엉켜 섹스를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사는’ 것이지 알 수 없는 절망의 무한궤도 속에서 여자아이는 임신하지 않기 위해 발을 모아 구르고, 정신 장애가 있는 아이는 감금당하고 담배빵 당하면서도 도망칠 줄을 모른다. 희망을 배태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구원의 밧줄을 비웃으며 스스로 돌아앉는 무력의 시공간, 그곳이 가출한 십대 청소년들의 세계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고 묻지도 않았(106쪽)”기에 그들에겐 서사가 없다. 그들에게는 '말'이 없으므로, ‘왜’를 바탕으로 한 그들의 이야기를 조직해내지 못한다. 어른들은 "어쩌면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절망의 수런거림을 들으면서도 못들은 체 스쳐간다. 듣는다는 것을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들의 말을 '말'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들어도 듣지 못한 체 무시하는 것이 상책일 테다.
"너희들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로 인해 아프다."며 홀연히 출현한 제이. 아이들은 자신의 고통에 공감하는, 자신들의 아우성을 '말'로서 들어주고 그것을 '말'로서 풀어내는 제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집 없는 길가의 고양이들처럼 수십 명씩 모여들어 제이를 둘러싸고 그의 '말'을 탐한다. 제이의 말은 세상의 말과는 다르게, 자신들이 겪는 것과 같은 고통에서 배태된 것이라 여겨졌으므로 제이의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소리는 최초로 맛보는 달콤한 '말'이 되어 그들 귓가를 적신다.
그러나 제이는 자신이 십대 가출 청소년들 내부의 통역자로 남을 경우 그것이 자위행위밖에 될 수 없음을 안다. 내가 내 목소리를 듣고 어루만지는 것은 가장 익숙하고 안일하므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자폐적인 소통방식이다. 말들의 발길질을 맞고 있으면서도 달콤한 위안을 찾아 안으로만, 안으로만 구부러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존재들이 부당하게 짊어지고 살아가는 고통, 그 자체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제이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돌아눕지 않으며, 오히려 ‘좆같은 세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끌어 모아 소리를 내지르며 스스로를 지켜야 함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었어. (...) 그리고 어떤 목소리도 들었어. 가서 그들과 하나가 돼라. 그들을 이끌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라. 뭐 그런 것이었어.”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십대들의 엉킨 말뭉치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풀어가는 대신 양손 가득 말 뭉텅이를 움켜쥐고 단숨에 힘을 주어 뜯어버리는 편을 택한다. 말하자면 정면 돌파. 제이는 구렁텅이에 빠져 뒹굴던 십대들의 명명되지 못하던 감정에 "분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럼 우리가 느끼는 건 뭐야? 분노야, 씨발, 존나 꼭지가 돈다는 거야. 그래, 우리는 열받아서 폭주를 하는 거야. 뭐에 대해서? 이 좆같은 세상 전체에 대해서. 폭주의 폭자가 뭐야? 폭력의 폭자야. 얌전하면 폭주가 아니라는 거지. 엄청난 소리를 내고, 입간판을 부수고, 교통을 마비시킬 때, 그제야 세상이 우리를 보게 되는 거야. 폭주는 우리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리는 거야. 어떻게? 졸라 폭력적으로.(162-163쪽)”
이름을 부여받은 아이들의 분노를 이끌고 단숨에 달려 나가는 것, 이것이 제이가 택한 자신들의 '말'이다. 제이는 수천, 수만의 오토바이들을 이끌고 ‘도시의 거리에 굵고 힘찬 붓질’ 함으로써 자신들의 ‘말’을 획득하고자 한다.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는 음성기호가 꼭 기존의 언어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에게 말을 쥐어주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말’을 창조함으로써 그대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해주겠다. 강제적으로 ‘청자’를 탄생시킴으로써 소음을 ‘말’로 바꾸려던 제이는 마침내 팔일오 대폭주에서 하늘로 사라진다.
3. 제이의 말, 동규의 말
제이는 듣는 자이자, 듣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말'을 잉태해 낸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기존 질서에 "위험한 놈"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나쁜 것이라며 훈계하는 어른에게 제이는 답한다,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고통을 외면하는 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해요.”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며 타이르려 하자 제이는 대답한다, “저는 제 판단으로 행동한 거고, 그러니까 아무 후회가 없어요.” 제이는 어른들의 말을 주워 먹지 않는다. 말의 형체는 그들에게서 배웠으되 그 내용은 제 속을 박박 긁어내 채운다. 그는 존재들의 ‘울부짖음’으로 섭생한다. 그 소리들은 듣고자 하는 자가 없기에 ‘말’이 되어 세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오직 제이만이 야산을 배회하는 개의 영혼에서, 화재 현장에 나동그라진 스쿠터의 영혼에서 '말'을 듣고 그들과 접속하며 고통을 느낀다.
“마음의 눈을 열고 주변을 깊이 살펴. 사람들이 하는 뻔한 말을 믿지 마. 그래야 너 자신을 구할 수 있어. 넌 소중하니까.(139쪽)”
이 말을 들은 십대 소녀 목란은 피식 웃는다. 그 말은 광고에나 나오는 ‘뻔한 말’이었으며 무엇보다도 ‘허벌창’인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이는 웃지 않는다, 그 말은 그의 진심으로부터 그녀의 진심으로 걸어가는, 살아 움직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목란은 제이의 말이 자신의 마음 앞까지 다가와 문을 두드리는 것을 느낀다. 이내 목란은 제이에게 감화되고 그를 경외하게 된다. 한편 제이는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 동규에게도 비슷한 말을 한다, “네가 이 우주의 중심이야.” 그러나 목란과 달리 동규는 제이의 말이 자신에게서 미끄덩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동규가 이런 반발심을 느꼈던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동규와 제이 사이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오래 전 동규는 물리적으로 말을 잃었던 함구증의 시절이 있었다. 삼촌이 조종하는 모형 헬리콥터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올 때 공포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동규는 그 즈음부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나의 언어로 나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공포의 맛, 흡사 ‘녹이 슨 쇳덩어리에 혀를 가져다 대는 맛’을 느끼며 사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건이 폭력적으로 동규에게 도래한다. 삼촌이 어머니의 뺨을 두 번 후려치는 장면을 목격한 것. 동규로서는 도저히 그 의미를 알 수 없는데도 도대체 왜 모든 것이 그토록 태연한 것인가에 대해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동규는 그 ‘말 없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또 하나의 ‘쇳덩어리의 맛’에 자신의 혀를 내어준다. 그러나 동규 옆에는 제이가 있었으며 제이는 기꺼이 동규의 욕망의 통역자가 되어주었다.
“내 마음 속에서 굳어가는 말, 입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한 채 종유석처럼 굳어가는 그 무엇을 제이는 즉각 알아차렸다. 제이는 나를 대신해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33쪽)”
그러나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동규는 다시 입을 열게 된다. 아마도 그때 동규는 자신과 제이 사이의 마술 같은 약속이 비참한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을 목도하느니, 차라리 그 전에 동규 스스로 ‘이 마술은, 이 약속은 이제 끝’이라고 선언하듯 도망쳐 나오는 편이 낫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후 제이는 시설로 보내지고 동규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제이와 떨어져 지낸 이 년의 세월을 거쳐 동규는 제법 스스로의 말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만난 제이는 동규를 압도했다. 하루에 한번 생쌀을 씹으며, 재활용품 처리장에서 주운 책을 읽고 조용히 생각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 온 제이는 ‘싯다르타’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동규의 차원을 넘어선 것만 같았다. 동규는 제이가 자신을 ‘읽는’ 것에 강한 반발심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제이가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란다. 동규는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말’을 잉태해 내지 못하고 있었기에 제이가 자신과 가장 밀착한 곳에서 동규만의 욕망의 통역자가 되어주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제이는 이제 동규 한 명의 통역자로 머무를 수가 없다, 그는 말 잃은 자들 모두를 이끌고 자신들을 옭아매는 말의 그물을 끊어내야 했다. 동규는 ‘자신이 떠나온 세상을 내려다 볼 위태로운, 필경 무너질 것이 분명한 탑’으로부터 스스로 제이를 끌어내리기로, 아니 구원하기로 결심한다. 제이가 추락하는 슬픔을 목격하느니, 차라리 제이를 추락시키는 편을 택한 것이다.
“요즘 들어 자꾸 제이 목소리가 들려요. (...) 새로운 말은 없어요. 예전에 걔가 했던 말이 마치 녹음기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다시 들려요. (...) 아주 생생해요. 자다가 깜짝 일어날 정도라니까요. 가끔은 길을 걷다가도 들어요. (...)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예요. (...) 뜻은 모르겠어요. 그치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제이가 저를 용서한다는 느낌이 들어요.(245-246쪽)”
제이가 죽은 뒤 동규는 제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마 동규가 제이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동규는 제이를,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받아 안아야만 하는 존재라 여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제이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기 시작한다. '말'의 그물 사이로 푹푹 빠져버리던 자신의 목소리에 '말'이란 것을 처음으로 덧씌워준 제이. 헐벗은 소리에 애써 입혀주려던 옷이 때로는 너무 낯설어 나의 '말'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게 흘러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동규는 어떤 연유에서든지 제이가 벗어두고 간 말의 옷을 주워들어 제 몸에 걸쳤다. 그러나 어쩔 텐가. 그 말을 '말'로서 들어줄 ‘청자’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동규는 제이가 벗어주고 간 '말'의 옷으로 밧줄을 꿰어 스스로 목을 맨다.
4. 말을 다루는 자의 윤리
소설 말미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한 ‘소설가’(이 ‘소설가’는 사실상 이 작가 김영하로 환치하여 볼 수도 있을 것이다)가 소설의 표면에 등장한다. 소설가는 제이와 동규가 남겨 둔 소음에 다가가려 노력하지만 낯설기만 한 소음을 견디는 것은 그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설가는 자신에게 익숙한 '말'을 휘둘러 그들을 정리해주고 정의 내려 해석해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냥 들어.”라는 충고가 그를 붙든다. “입을 다물고 그걸 듣는 거.” 듣지도 않은 채, 먼저 ‘너’를 평가하고, 꾸짖고, 추궁하는 목소리는 ‘너’를 고문대 위로 올려놓고 만다. 고문대 위에서 혹독한 말의 고문을 견디어낸 자만이 살아남아 말이 쥐어준 옷을 입고 이 사회의 ‘어른’이 될 것이다. 저항하는 자들은 죽거나 병신이 된다. 턱 끝에 밀어닥친 말의 칼날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소리를 지르다 스스로 찔리고 마는 사람들, 제 목소리로 무엇이라도 말해보겠다고 버티는 자들은 말의 그물을 교란시키는 자들이자 질서를 익히지 못하는 미성숙의 존재들이다. 제이와 동규 모두 성장하지 못하고 부서진다. 죽은 말들의 지배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이 졸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너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네가 저지른 일은 ‘단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고’ 또한 반드시 그래야 한다.(199-200쪽)”
이 소설은 완강한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다, 시점도 제각각이며 서사의 일부는 절제되고 도약된다. 소설가는 ‘말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목 뒤에 숨어 제이와 동규의 서사 진행에 있어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감추다가 소설 말미가 되어서 슬그머니 나타난다. 마치 자신이 여태껏 독자들과 같은 위치에서 이들 십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멀찍이 관람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소설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가의 조작 가능성은 배제해 둔 채 독자들이 소설 속 인물들과 직접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배치는 자극적이고 불친절한 소설의 내용에 대해 독자들이 갖게 되는 모종의 불편한 감정들을 완화해준다. 소설가는 독자들의 손을 잡고 자신이 독자들과 같은 눈높이에 있다고 속삭인다, “그냥 들어, 말하자면 이 소설 말이야, 그냥 들어주면 돼.”
이 소설은 소위 ‘말을 다룬다’는 소설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소설은 십대 가출 청소년들과 폭주족들이 잃어버린 ‘말’을 되찾아 돌려 줄 정도로 권능하지 못하며 ‘말’들을 평등하게 분배해줄 능력도 없다. 그저 살아남고 목도할 뿐이다. 소설은 ‘단 한 문장’으로 모든 이유와 사연을 삭제해버리는 죽은 말을 벗겨내고 그곳에 서사의 줄기를 부여하고자 한다. 비록 그것이 그들을 부활시키는 일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최대한으로 그 생동하던 숨결을 살려내어 이곳에 떠돌게 하는 것이 소설의 목표이다. 얼기설기 남겨진 서사를 완성하는 것은 소설가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5. 지금, 이곳의 윤리: 청자들의 탄생
독자들은 소설가가 구축해 둔 말의 얼개를 인내하며 그의 목소리를 들어주었다. 우리가 듣지 못하던 소리를 삼키고 뱉어낸 소설가의 목소리를, 마치 소설가가 제이와 동규의 목소리를 인내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묵묵히 듣는다. 이 소설은 딱 거기까지가 소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책을 앞에 둔 우리에게는 찝찝함이 남아있다. 말을 다루는 자의 최소한의 윤리로서 소설가가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과, 말의 칼날에서 살아남은 자의 최소한의 윤리로서 독자들이 소설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여전히 현실에서 말의 불평등 문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언론과 같은 거대한 말들의 횡포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소설은 그에 대한 답은 전연 제공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하여 ‘그저 듣는 방식’으로 제반의 문제들이 해결되리라는 성급한 전망도 제시하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살펴보자면, ‘말 없는 자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이미 죽은 자들’과 ‘지금 이 순간 죽어가고 있는 자들’. 소설은 전자의 목소리에 대해서 썼건만 소설을 읽은 독자들을 둘러싼 것은 결국 후자의 목소리이다. 전자의 운명은 비참했다. 만약 말 잃은 자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을 지속적으로 무시하거나 탄압한다면 후자도 곧 전자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이 폭주하는 비극열차를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열차를 멈추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만약 소음을 ‘말’로서 듣는 ‘청자’가 생겨난다면 말이다.
말을 쥔 자들의 횡포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을 핑계로 또다시 돌아눕기 전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청자’로서 재구성함으로써 우리는 말의 권력의 구도를 재편성할 수 있다. 거대한 말들 사이로 힘없이 추락하던 소음들도 애를 쓰고, 애를 쓴다면 기어코 들을 수 있으며 바로 그 순간 소음은 ‘말’이 된다. 그 작은 목소리들을 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 쓰러져 가는 말들의 어깨를 붙들어 흔들고, 맥없이 주저앉는 무릎들 곁에서 같이 버티어 주는 것, 그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말'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금 당장 ‘들어주는 것’, 그물 사이 허공으로 추락하지 않게 그들과 우리 사이의 말의 그물을 조금만 더 촘촘히 짜 보는 것은 “관계”를 더 촘촘하게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위에서 다시 살리는 말로써 살아 있는 말로써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작년, 어떤 사람들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위한 ‘청자’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거대 언론이 소음으로 치부하는 소리를 ‘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휴대폰을 두드려 ‘말’을 나르고, 그 작은 목소리를 죽은 말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던 것처럼, ‘청자’들이 탄생하는 곳에서 말의 그물은 유동하며 변할 수 있다. 우리는 그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역으로 우리를 촘촘히 얽어 멘 말의 그물이 우리의 몸짓 하나 하나에 의해 출렁일 수 있음을 뜻한다. 듣는다는 것, 그것은 출발이며 그 자체로 이미 완성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는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매체가 짜놓은 그물 사이로 걸러져버린 수많은 빈칸들을 찾아내어 스스로 그물코를 엮어낼 수 있다면 현재 이곳의 말의 지형을 바꿀 수 있으리라, 더디더라도 마침내.
“하루 종일 트위터를 했어요. 아침 밥 먹고 트위터 하고 점심 밥 먹고 트위터 하고, 잠시 운동을 하고 나서 나를 찾아온 손님들을 보고 손을 흔들고 전화 통화를 한 뒤 또 트위터를 했어요. 매일 저녁 7시30분에는 크레인 밖 건너편 도로가에서 날마다 문화제가 열렸어요. 그걸 지켜보고 난 뒤 잠을 잘 때까지 트위터를 했어요. 트위터가 없었다면 긴 농성을 쉽게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 2003년 김주익 열사에게 트위터가 있었다면 그렇게 목을 매지 않았을 거예요. 당시 2500명이던 조합원이 129일째 농성을 하면서 60명으로 줄었거든요. 김주익 열사는 절망감을 못 이겨 낸 것 같아요. (...) 농성을 풀고 동아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 다음 날 김주익 열사의 누나가 죽을 끓여서 왔어요. 제게 하는 첫 마디가 ‘우리 주익이도 살아서 내려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노’ 였습니다. 할 말이 없더라고요. (한겨레 신문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인터뷰, 201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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