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남겨진 과제들
새내기부문 1등작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남겨진 과제들
공지영, 『의자놀이』
김서경
0. 기억.
2012년 4월 어느 날, 대학 새내기가 되고 처음으로 쌍용자동차 사건 관련 집회에 참여했다. 평택으로 향하면서 다양한 감정들을 느꼈다. 처음 쌍용자동차 사건을 접한 것은 이미 몇 분이 목숨을 잃으신 후였기에 가장 먼저 비장함이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 비장함은 곧 신문기사나 다큐멘터리로만 접하던 쌍용자동차 사건 해결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다는 일종의 벅차오름으로 바뀌었다. 그곳에서는 대학 입학 이후 가슴으로 접하지 못했던,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그 빗속에서도 빨간 머리띠를 하고 목이 터져라 쌍용자동차 사건 해결 촉구를 외치는 분을 보았다. 수많은 깃발들도 보았다. 금속노조의 파란 깃발과 각 정당들의 깃발은 물론 몇몇 대학교 총학생회의 깃발, 이름조차 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집단들의 깃발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 깃발들 사이에는 희망찬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패색이 짙었다는 표현을 써야할 정도였다. 그날은 지난 3월 희생되신 또 다른 분을 기리고, 그 분의 관이라도 공장안으로 들여보내고자 했던 날이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공장 문을 뚫기 위해 집합해있었다. 공장안에는 경찰들이 배치되어있었다. 그들은 물총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확성기를 통해 어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러분, 경찰은 여러분의 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말을 반복하며 사람들을 향해 최루액이 섞인 물을 물총으로 쏘아댔다. 그날 집회에 가서 느낀 것은 두 가지였다. 이곳은 전장이구나. 이곳에는 이제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짙어졌구나.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1. 쌍용자동차 사건의 무서움 – 폭력과 무관심
‘의자놀이’는 쌍용자동차 사건의 절박함을 잘 보여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사건이었다. 의자놀이를 통해 본 국가와 자본은 지독히도 무서웠다. 그 전에도 쌍용자동차 사건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전말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입은 피해의 심각성을 보며 그 무서움을 더욱 더 절감했다. 민주주의 국가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강도의 국가로부터의 폭력. 국민을 지켜야 할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공권력을 행사해야 할 곳은 살기위해 공장 안에 들어간 이들이 아니라 무책임한 정리해고를 감행하고 용역까지 동원하며 무지막지한 폭력을 쓴 악랄한 이들일 텐데 말이다.
분노하며 책을 덮었을 때, 또 다른 원인의 무서움이 갑자기 몰려왔다. 그것은 이 사태를 관전하는 이들에 대한 무서움이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불우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방영하면 너도나도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정 많은 사람들이 왜 쌍용 노동자들에게는 무관심한 것일까. 불우이웃돕기에 성금을 내는 사람의 숫자만큼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최소한 귀를 기울여 주기라도 했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많은 분들이 목숨을 잃어갔다.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연대’이다.
사람들이 노동자들에게 무관심한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지만 스스로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동자이지만 쌍용차 노조원들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에, 노동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학생들이 노동문제에 무관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이다. 대학생이라고 하면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자유로운 사고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쌍용자동차 사건을 비롯해서 수많은 노동문제들은 좌파냐 우파냐를 따지는 사상의 문제라기보다도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학생들이 노동자의 ‘노’자만 들어도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선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삶을 되찾아주자는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임에도 이런 이야기를 교내에서 알리려는 사람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힌다. 그러니 연대는커녕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는 것조차 힘든 현실이다.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빨갱이로 낙인찍혔던 것도 이러한 대학의 분위기가 사회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학생들 대부분이 자신들은 노동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노동문제를 자신들의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한다. 물론 그들 중에는 CEO와 같은 자본가를 꿈꾸는 이들도 있겠으나 많은 경우 노동자를 가난한 공장직원에 국한시켜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 많은 대학생들이 간절히 염원하는 회사취직 역시 노동자가 되는 길이다.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라는 ‘괴물’ 앞에서는 누구든 정리해고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설령 자신이 노동자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사회는 혼자서 살아가지 못하며 노동자가 있어야 자본가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2. 왜 그곳에는 절망이 있었는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연대가 절실한 상황이다. 무관심한 사람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내부 반성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도입부분에서 지난 4월에 참여했던 쌍용자동차 집회에 대한 감상을 언급했다. 그곳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는데 형식적 연대와 무기력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집회현장에는 수많은 깃발들이 있었다고 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깃발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단상에 올라가 여러 발언을 했다. 그 발언들 중에는 진정성이 담겨있는 발언도 있었던 반면, 진정성이 결여되었다고 느껴지는 발언도 있었다. 특히 정당들의 대표가 발언을 할 때 그러한 점을 느꼈다. 물론 그 대표자들 개인이 가진 진정성,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를 자의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발언 내용은 희생자에 대한 형식적 추모의 말로 시작하여 ‘저희 당을 뽑아주십시오’로 끝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을 감히 ‘형식적 연대’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노동문제 그 자체보다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연대의 장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집회현장에서는 또한 일종의 무기력함이 감돌고 있었다. 필자가 처음 제대로 된 집회를 경험했던 것은 2008년 촛불집회였다. 그날들에도 수많은 깃발들을 보았다. 그 깃발들 사이에는 희망이 있었다. 믿기 힘들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도 했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집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쌍용자동차 사건 해결을 위한 집회는 그때 경험했던 희망찬 집회와는 성격이 아주 달랐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서는 희망 가득한 믿음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책임감’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나약해서, 혹은 사회운동을 별로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쌍용자동차 사태를 너무나 잘 알았고, 운동이 어떤 것인지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무턱대고 희망을 가질 수도, 쌍용자동차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 촛불집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도 큰 책임감을 느끼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평택에 모인 이들은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동지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크나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무기력함의 더 큰 원인은 의자놀이에 언급된 것처럼 아무도 무엇을 향해 소리치는지 모른다는 점일 것이다. 상하이차, 마힌드라 어느 쪽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해서 모이지 않을 수는 없기에 그저 모이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다는 굳은 믿음에서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모이는 집회에서는 희망보다 큰 절망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있는 한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3. 사태 해결을 위하여
연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단기적, 장기적으로 함께 주장해나가야 갈 것들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정리해고법의 엄격한 준수 수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이들은 정리해고 자체를 철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어떤 이들은 정리해고가 현행대로 유지되더라도 재고용의 기회를 늘린다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각자 생각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이것을 통일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정부나 기업에 분명하게 전달할 최소한의 합의점은 도출해야 한다. 이를테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법의 느슨한 적용에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하므로 이것에 대해 국가차원에서 충분히 보상해준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피상적 문제해결이라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제 2, 제 3의 쌍용자동차 사태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당장 고통 받고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방치해 둘 수는 없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각 단위가 힘을 합하여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고 장기적으로 사회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 될 것이다.
이 연대에는 절대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쌍용차 사태 피해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접근이다. 그동안 정리해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감정적 슬로건과는 달리 피해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접근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개개인의 상처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들의 피해가 갖는 정치, 사회적 함의에 상대적으로 집중했다는 것이다. ‘쌍용자동차’란 말을 듣기조차 힘들 정도로 상처받은 이들이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치유될 수 있을까. 정혜신 박사가 쌍용자동차 사건 피해자들에게 집단 상담을 제의하고 진행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피해자들이 드러내놓지 못했던 상처들을 조금씩이나마 드러내게 하고 극단적 선택을 막아내는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숫자’로 희생자분들의 죽음이 표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의자놀이 49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러자 그들이 이미 우리와 다른 세상으로 떠나갔다고 해서 그들을 이렇게 숫자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들을 숫자로 밖에 모른다.
12번째 죽음, 20번째 죽음 하는 식의 숫자표현은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죽음이 더해지고 있는데도 안타까움이 커지지 않고 오히려 무덤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또 한 분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또 일이 일어났구나.’ 정도로만 반응했던 자신에게 크게 놀랐던 적도 있었다.
4. 그래도 희망은 있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노동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고 사람들의 무관심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분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고 살아남은 분들 역시 심각한 정신적 고통에 빠져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쌍용자동차 사태는 이미 다 끝나버린, 쓰라린 패배의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히 ‘희망’을 말해보고 싶다. 동지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 등이 없을 수 없지만 지금도 투쟁하려는 이들이 있다. 어떻게든 쌍용자동차 사건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려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희망을 버리려 한다면 이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아무리 상황이 악화되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일이다. 다시는 살아서 땅을 밟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희망버스를 중심으로 한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 목표, 힘 있는 연대가 있다면 쌍용자동차에 대한 패배의 기억이 희망의 기억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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