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일반부문 3등작

페미니즘,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정수환


1. 페미니즘, 어떤 과잉

2012년, 서울대에서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에 얽힌 것은 2012년 총학생회를 수권하고 있었던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학생위원회 관악분회(이하 사노위)”, 그리고 2011년 총학생회를 수권하여 본부점거를 이루어냈던 “서울대 학생행진(이하 행진)”이라는 두 개의 학생정치조직, 그리고 옛 관악여모가 해체된 이후 그 공간을 이어받아 활동하고 있던 “여성주의 자치모임 공간(이하 공간)”이었다. 이 정도면 서울대 학생사회가 거의 다 연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1년 하고도 수개월을 이어오던 세 조직의 대책위원회 활동은 결국 전 사회대 학생회장의 사퇴라는 파국적인 형태로 끝났다. 세 조직과 대책위는 이와 관련된 입장서 및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건들을 공개했는데, 이를 전부 합치면 거의 150페이지에 가까운 양이었다. 최근 수 년 동안 학생 사회에서 발생한 단일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내부 문건이 공개된 전례는 없었다. 이후 스누라이프를 중심으로 대책위, 특히 행진과 공간에 대한 비판 여론이 크게 분출했으며 관련인의 ‘신상털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학내뿐 아니라 사회적 반응도 폭발적이어서, 여러 미디어와 논자들은 이 사건을 두고 피해자 중심주의가 잘못되었다느니, 지나친 페미니즘의 문제니, 극단적인 반성폭력 운동이 상식과 유리된 일이니 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풍자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건이 공개되고 몇 주가 지난 지금도 페미니즘은 계속하여 조롱을 받고 있다.

학내에서 사회로 시선을 돌려봐도 “지나친 페미니즘”에 대해 우려와 비판, 심지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는 경우는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셧다운제나 아청법과 관련하여 여성가족부나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심지어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건 ‘남성연대’라는 단체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아직까지 남성연대의 규모는 작지만, 디씨인사이드나 일베저장소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후원금의 규모 등에서 성장하는 중이다. 지금은 여성상위 시대이며 오히려 남성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시대라고 한다거나, 여성이라는 성이 벼슬이냐는 비아냥은 인터넷 공간에서 너무도 흔하게 들려온다. 이러한 글들 중에는 여성들이 작성한 글도 종종 있다. 그녀들은 소위 “꼴페미”와 자신들 “개념녀”는 다르다고, 자신들은 “꼴페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녀들은 모두 이야기한다. 페미니즘은 이제 지나치다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들의 어머니 세대면 모를까 지금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그러한가? 페미니즘은 ‘과잉’인가?

2. 페미니즘, 어떤 결핍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돌려봐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억압의 문제는 여전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앞에서 관악의 예를 들었으니 다시 한 번 서울대의 예를 들어보자. 올해 서울대에서는 대학원생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한 서울대 대학원생이 논문을 도와주던 선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를 어렵게 고소했으나 학교 측에서는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응징’했다. 지도교수는 가해자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했으며, 누구보다도 그녀를 도왔어야 했을 학교의 성폭력 상담소는 그녀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다고 매도했다. 이 사건은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자의 치유와 공동체 복귀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법원, 학교, 심지어 성폭력 상담소까지 피해자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학내가 페미니즘적인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워 보인다.

그뿐인가. 아까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눈을 사회로 돌려보자. 우리사회의 여성들이 처한 현실은 아직도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국제기관의 남녀평등지수 순위를 논외로 하고(일부 조사에선 너무 높게, 일부 조사에선 너무 낮게 나온다. 가령 교육기회의 평등을 높게 평가한 지표에서는 한국은 대단히 평등한 국가로 나오지만, 출생 과정에서의 불평등을 높게 평가할 경우 한국의 성별 불평등이 지나치게 과대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한 번 우리사회를 바라봐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통계적인 연구들은 아직도 우리사회의 성별 임금격차가 크며, 우리사회의 여성들은 경력단절의 문제로 인한 M자형 취업률 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여성들이 많이 취업하는 분야 중 상당수는 저임금 업종이 다수이며, 심지어 국가에서 여성 고용을 위해 제공하는 일자리들 중 대부분은 가사노동과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다. 경제적인 면뿐인가.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아직 우리사회가 평등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 수많은 연구와 통계자료들이 존재하지만, 이 서평에서 논하고자 하는 범위와는 떨어져 있기에 일단 논외로 한다. 어찌 되었건, 아직까지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위치가 다양한 차원에서 크게 차이나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학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여성억압은 현실이며 페미니즘의 목소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간혹 나오는 페미니즘적인 목소리는 “꼴페미”라는 비난과 조롱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아직,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이 결핍된 공간이다.

3. 어떤 과잉과 어떤 결핍의 사이에서: 여성의 현실에 집중하라!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보는 관점은 이처럼 상호 모순적이다. 혹자는 우리 사회를 페미니즘이 너무 많은 사회라고 비판하는 반면 또 다른 혹자는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이 너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비판한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상반된 관점 속에서 여성의 삶은 표류하고 있고, 여성 억압의 진실은 오히려 물신화되고 있다. 페미니즘에 부여된 너무 다른 의미는, 페미니즘 자체가 원래 복수라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만큼 다양해졌다. 그리고 그 의미들 중 여럿은 서로 상충된다. 사뭇 혼란스럽고 모순되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진실은 의외로 간단하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많은 것도, 페미니즘이 부족하다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현재의 페미니즘이 여성 억압의 실체를 정확하게 타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여성 억압을 정확하게 타격하지 못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가장 필요한 곳, 고통받고 어려운 여성들의 곁에는 페미니즘이 부족한 반면, 어떤 곳에서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말만 무성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어떤 식으로 무너졌는지를 잘 안다.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억압의 개념을 남발하고, “동조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억압의 진정한 근원인 사회 체제는 건드리지 않”(토니 클리프, 『여성해방과 혁명』, 이나라·정진희 역, 서울, 책갈피, p.282)으면서 점점 더 고립되어갔다. 또한 이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황에 주목하는 대신 중간계급에 의한, 중간계급을 위한 이슈들에만 주목하여 운동의 동력을 잃어갔다. 결국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마지막 순간에 대중과 만나서 활동할 운동적 동력을 상실하고 몇몇 소수에 의한 ‘그들만의 모임’으로 전락했다가 사려져갔다. 이러한 운동의 역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면 우리는 페미니즘이 과잉이면서 동시에 결핍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 무엇을 참고로 해야 하는가? 이 점에서 주목하고 싶은 여성활동가가 있다면 그녀는 바로 벨 훅스다. 벨 훅스는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여성의 현실에 주목할 것을 주장했다. 그녀는 여러 권의 저서 속에서 젠더 관계와 계급, 인종이 만나는 부분에 관심을 집중하고, 고통받고 있는 여성의 현실에 주목하여 그 지점에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성을 적대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여성성에 집중하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페미니즘 운동은 성차별적 억압·착취·차별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여성의 행사하는 권력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민중여성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벨 훅스,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 윤은진 역, 서울, 모티브북, p.156) 라는 벨 훅스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여성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성차별적인 억압과 착취, 차별에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구분과 여성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여성을 지나치게 피해자화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는 것 자체를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현실과 전혀 다른 그림이다. 전체로서의 “여성”과 “여성성”, “여성 억압”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성들(과 남성들)에 주목하고, 그/녀들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역량을 쏟는 것.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이 다시 한 번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옳은 길일 것이다.

4. 여성의 현실에 천착하기 위해,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펼쳐라”

여성의 현실에 주목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여성과 계급 사이의 접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시장 구조이론에서 흔히들 “2차 노동시장”이라고 불리는 곳에 속해 있으며, 성으로 인한 억압 못지않게 계급 차이로 인한 억압을 겪는다. “여성성”에 대해 집중하고 여성 일반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억압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미국의 초기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현재의 페미니즘 조류 속에서는 이러한 지적을 부정하거나, 이러한 지적에 적대감을 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론적인 부분뿐 아니라 구체적인 이슈로 들어갈 때, 아직까지도 “여성성”과 “남성성”을 논하고, 소위 “명예 남성”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참고로 삼을 만한 책 중 하나가 바로 낸시 홈스트롬이 엮은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35명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쓴 글들을 모아둔 책이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는 페미니즘 운동의 조류를 구분할 때 사용되는 범위보다 더 넓다. 책에서 사용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젠더 관계에서의 억압과 계급 관계에서의 억압이 모두 존재함을 인정하고, 양자 모두를 철폐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폭넓게 가리키는 말이다. 편자인 낸시 홈스트롬 역시 서문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 계급과 젠더로 인해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현실의 여성 억압과 소외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35명의 저자가 참여한 책이니만큼, 책의 내용은 좋게 말해서 다양하고, 나쁘게 말하면 일관성이 없다. 약간은 백과사전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떤 글은 자전적인 내용이고, 어떤 글은 현실에서의 여성 억압을 분석하는 내용이며, 페미니즘 고전들의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고, 이론적 조류를 소개하고 이를 비판하기도 한다. 내용의 범위도 다양하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들이 쓴 글들을 그대로 소개하는 부분부터 시작하여 노동, 가족, 성, 나아가 자연에 대한 주제까지 다루고 있다. 질적으로도 상이하다. 어떤 글은 날카로운 분석을 선보인 반면, 공감하기 어려운 글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 하여 35명이 기고한 글 하나하나를 서평에서 이것은 좋았다 혹은 이것은 나빴다고 평가하기는 무리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의 글들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가 존재한다. 이것은 바로 여성들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억압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다양하게 그려내고, 하나의 단일한 “여성”과 “여성성”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올바르지 못하며 폭력적인 상을 거부한다. 또한 그/녀들은 서문에서 낸시 홈스트롬이 이야기한 것처럼, 추상적인 이론을 단호히 거부하고 현실의 구체적인 여성 억압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녀들은 경제적 현실과 사회적 억압, 그리고 젠더가 만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구조적 맥락 속에서 이를 파악한다.

어쩌면 혹자는 이러한 분석을 진부하게 여길 지도 모르겠다. 좌파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혹은 신자유주의)의 잘못으로 환원시킨다는 피로감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 억압과 자본주의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를 파악하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여성 억압의 양태를 자본주의의 구조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본주의 사회 속 현실에서의 여성 억압은 봉건제에서의 혹은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여성 억압과 크게 다르다. 여성 억압은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변모해왔다. 또한 대학 교육을 받은 상층 계층 여성의 현실과 빈곤층 여성의 현실 사이에서는 크나큰 차이가 존재한다. 이처럼, 현실에서의 여성 억압은 자본주의적 여성 억압이며, 이는 역사적인 것으로 그리고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하는 것으로 파악할 때만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여성 억압 사이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먼저 여성 억압을 초역사적으로 파악하는 오류임과 동시에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여성 억압을 탈맥락적으로 파악하는 오류일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의 저자들이 견지하는 태도는 옳다고 생각된다.

5. 결론: 우리 사회, 그리고 학내에서의 페미니즘을 위하여

앞서 언급한 것처럼,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는 우리가 ‘참고’로 삼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참고”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받아들여야 할 대상이라는 뜻임과 동시에, 이 책이 그대로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의 현실은 서구와도, 제3세계와도 비슷하면서 다른 우리만의 맥락이 존재한다. 가령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는 흑인과 백인, 히스패닉을 관통하는 인종적 맥락이라기보다는 코시안들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사이의 관계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분명 존재하며, 이 차이를 간과하는 것은 앞서 비판한 탈맥락적인 오류를 조금 다른 형태로 재현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에서 얻어가야 할 점은, 여성 억압의 현실에 주목하고, 젠더와 계급 사이의 교차점을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파악하는 자세와 함께, 그 과정에서 참고로 삼을 지침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직접적으로 받아갈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제, 즉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여성 억압의 양태를 관찰하고, 이를 적절한 언어로 파악하고 비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물론 수많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고 그/녀들의 활동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더 관심을 갖고 고민해야 할 지점들이 많다는 것 역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적고 싶은 것은, 현재 몸담고 있는 공동체인 서울대 학생사회에 특히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현실에서의 여성 억압을 직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앞서 페미니즘의 과잉과 결핍을 논하면서 서울대 학생사회에서 올해 있었던 일과, 한국 사회의 현 상황을 함께 논한 바 있다. 올해 서울대에서 발생한 일들은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일들을 매우 닮아있다. 또한 여기서 발생한 페미니즘의 한계와 이에 대한 학우들의 비판마저도 닮아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부터 이를 고민하고 해결해나가며, 추상적인 형태의 언어나 이론보다는 우리 속의 구조와 그 속에서 발생한 폭력의 구체적인 맥락과 현실을 고민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현재 학내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해 거대한 비판이 가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학내에서조차도 젠더 간의 권력 관계가 없다고 결코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이 (비단 최근의 사건에 대해서만은 아니더라도) 학내에서 발생하는 여성 억압과 성폭력을 인식하고 개념화하며 비판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측면이 있었음을 인정함과 함께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 측면이 존재함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만들어진 피해들에 대해서도 역시 인식하고 반성해야 한다. 또한 그동안 학내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이 (학우) 대중과 맺었던 관계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고쳐갈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우리들 속으로만 침잠한 측면이 있지 않은가?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유리시킨 측면이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고민들을 떠올려볼 때, 2012년의 우리들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어쩌면 개인적일 수도 있는 것에서부터 고민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진부한 말이지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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