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유토피아를 ‘잠정적’으로 만드는가
일반부문 3등작
무엇이 유토피아를 ‘잠정적’으로 만드는가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2011)
양준용
1. 비그포르스, 오래된 미래
홍기빈의 2011년작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이하 『비그포르스…』)는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성립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인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를 조명한 책이다. 비그포르스에 대한 논문이 두세 편에 불과할 정도로 비그포르스는 한국의 대중에게 생소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최근 자주 논의되고 있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의 본보기로 비그포르스를 지목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비그포르스가 수많은 실패한 유토피아들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장기적으로 지속된 ‘대안적 체제’로서 스웨덴 모델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만성화된 경제 불안 속에서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부상하는 한편으로, 세계 곳곳에서 극단적 내셔널리즘이 발현하는 현 상황은 1930년대라는 오래된 악몽을 떠오르게 한다. 과거 자유주의가 그러했듯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종말이 예정된 수순이라 할 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대안적 체제의 발견은 진정 절실한 문제이다. 저자는 여기서 대안적 체제의 문제를 두고 공상에 사로잡히기보다는 현실에 존재했던 경험들을 되돌아보기를 택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그포르스를 발견한다.
저자는 비그포르스를 전방위적으로 뛰어났던 인물로 묘사한다. 20세기의 ‘르네상스 맨’이었던 비그포르스는 실천이나 이론의 측면에서 모두 출중했는데, 특히 이 둘을 결합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비그포르스는 ‘나라 살림의 계획’으로 구체화되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주장하였으며, 스웨덴 노동대중의 삶으로부터 대중운동을 거쳐 정당 정치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비그포르스는 민주적 가치라는 인류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합리적인 대안을 찾고 실천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사회경제적 난제에 직면하여 좌우를 막론하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비그포르스는 분명 상당한 울림을 갖는다.
2. 허상과 무기력을 넘어: 능동적 인간을 위한 정치경제학
『비그포르스…』의 서술방식은 저자가 번역하여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초중반의 (정치)경제사와 경제사상사를 복합적으로 서술하면서, 주장의 구체적 근거를 특정 국가의 지식 엘리트들로부터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거대한 전환』이 자유주의의 파멸-파시즘으로 이어지는-이라는 ‘잠정적 디스토피아’를 예견했다면, 이 책에서는 반대로 희망으로 눈을 돌려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라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그려내고 있다. 또한 폴라니가 신고전파 경제학의 대안으로 ‘실체경제학’을 제안했다면, 저자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길잡이로 삼아 고전적 제도주의의 유산을 계승하는 지구정치경제학을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특정한 학문 혹은 사상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본서는 사회제도의 변화와 새로운 학문을 위한 방법론으로서 요강要綱에 비견될 수 있다. 물론 『비그포르스…』를 비그포르스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로 읽거나, 작중 소개된 정책의 타당성과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 독해하는 것은 분명 나쁜 접근법이 아니다. 그러나 본서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그러한 독법들에 한계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비그포르스의 실천의 궤적 앞뒤로 사상사적 맥락을 배치함으로써, 독자가 비그포르스를 비그포르스 자체로 읽기보다는 독자가 처한 현실에 비추어보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비그포르스…』를 비그포르스의 삶과 사상을 준거로 한 가이드북으로 읽는 것이 적합하리라 싶다. 저자는 비그포르스에 비춰보아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사상들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를 밝히고,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해답으로서 ‘잠정적 유토피아’를 제시한다. 이처럼 비그포르스가 시비를 가리기 위한 기준으로써 기능하기에, 이 책은 결과적으로 비그포르스가 무엇이 아닌지를 이야기하는 데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한편으로 독자에게도 비그포르스가 무엇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데, 특히 저자가 비그포르스를 묘사하면서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저자는 비그포르스의 사상을 설명하면서 제도주의적 전통이나 사회민주주의, 경제적 민주주의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 용어들은 전반적인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을 뿐 충분히 구체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비그포르스가 아닌 것들의 공통된 특징을 갈무리함으로써, 그 안티테제로서 비그포르스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비그포르스는 자유주의가 아니다. 비그포르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나 사회계약 같은 느슨한 가정들을 거부한다. 비그포르스는 비록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긴 했으나 마르크스주의 또한 결코 아니다. 특히 변증법적 유물론을 위시한 결정론과는 거리가 멀다. 비그포르스는 케인즈주의로 자주 오해받으나, 오히려 케인즈주의가 비그포르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그 역으로 볼 수는 없다. 좌파 진영이 자주 오해하듯 비그포르스를 베른슈타인 류의 수정주의로 볼 수도 없는데, 이는 비그포르스가 대안적 체제라는 이념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비그포르스가 국가를 인정하고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그를 생디칼리즘과 같은 주의주의나 무정부주의로 여기기 어렵다.
저자는 비그포르스가 넘어서려 한 사상들이 가치와 사실을, 윤리와 과학을 혼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비그포르스(와 저자)가 보기에 이와 같은 혼동은 이 사상들이 택하고 있는 이론적 방법들이 비과학적이며 또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본서에서 비과학성은 이데올로기로, 비현실성은 형이상학으로 대표된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전제들을 설정하고 이를 강요한다. ‘이기적 개인’이나 노동가치론 등은 이데올로기로 인해 강요된 전제의 전형이다. 심지어 형이상학은 사유의 대상을 경험적 현실에 없는 무언가로 설정한다. 그러면서도 형이상학을 통해 현실의 제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막무가내로 진행되는 형이상학의 유희 속에서 대중의 삶은 기이하게 재구성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된다. 헤겔의 변증법이나 알튀세르의 과학을 가장한 구조주의는 그 좋은 예이다. 비과학성과 비현실성은 인간이 사회적 현실에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노정하기에 지배자들의 지배를 강화하고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 위기에 속수무책이었던 자유주의의 자유방임이나 마르크스주의의 ‘대기주의’는 곧 이데올로기와 형이상학이 낳은 파국이었던 것이다.
실패한 사상들의 오류를 이와 같이 분석하기에 비그포르스는 반이데올로기와 반형이상학을 지향한다. 비그포르스는 철저히 지각 가능한 현실에 초점을 맞추며, 과학자인 동시에 ‘이념정치가’라는 중첩된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가치와 사실을 별개의 것으로 파악한다. 이처럼 윤리와 과학을 분리했을 때에 비로소 유토피아라는 핑계로 뭉뚱그려진 방관이 아닌, ‘나라 살림의 계획’과 ‘잠정적 유토피아’의 자리가 나타난다. 새로운 종류의 과학을 통해 객관적으로 수립된 ‘나라 살림의 계획’이 국가의 청사진이라면, ‘잠정적 유토피아’는 ‘나라 살림의 계획’에 명분을 부여하는 정치적·윤리적 지향이자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나 결코 동일한 것은 아니며, 서로 나름의 역할을 맡은 채 관계 맺고 있다.
그렇다고 ‘나라 살림의 계획’과 ‘잠정적 유토피아’가 유토피아를 완전히 기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비그포르스는 ‘원 샷’의 방법론이 아닌 점층적인 방법론을 지지할 따름이다. 그의 궁극적 이상은 인간을 신비화된 ‘법칙’으로부터 꺼내어 움직이는 사회적 주체로 세우는 데 있다. 비그포르스에게 인간은 인간의 현실을 개척할 수 있는 매우 능동적인 존재이다. 인간에게 세계란 곧 지각 가능한 세계로서 유물론적이다. 자연환경 및 기술 발전 등으로 인한 환경의 변화는 인간이 제도를 만들어 대응할 것을 촉구하게 되는데, 그 본질적인 목표는 사회 공동체의 유지이다. 이는 인간의 생존과 자아실현이 곧 사회 공동체의 유지발전에 근본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도의 마련 과정에서 사실과 당위라는 두 축을 살펴야하는데, 이 때 사실은 객관적 과학을 통해 확인 가능하며 당위는 인간 공동체의 평화적 존립이라는 목표에 근거한다. 이렇게 마련된 제도는 대중운동을 거쳐 국가를 통해 실현된다.
저자가 비그포르스를 통해 주장하고자 한 사상을 한 마디로 과학주의와 공동체주의,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의 결합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를 두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자 모두를 지양하는 비판적 근대성의 귀환이라 부르면 좋으리라 싶다. 비그포르스는 이데올로기와 형이상학 속에서 통합된 구분들-구조와 개인, 지식인과 대중, 자연과 인간, 사실과 당위, 공동체사회와 이익사회 등-을 다시 분명히 하는 한편으로 그 관계를 재정립할 것을 요청한다. 비그포르스의 세계가 이분법적이며 합리적, 또 자연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제안은 철저히 근대적이다. 그러나 비그포르스가 분할된 요소들이 맺고 있는 기존의 관계들을 부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는 비판적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
저자가 이야기하는 비그포르스의 곳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흔적이 발견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체적 덕성으로서 아레테와, 인간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실천으로서 프락시스 개념이 비그포르스에게서 20세기의 판본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적 방식으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근대국가와 과학이 더욱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큰 변화라고 볼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에 더욱 집중하고 있기에 미숙하나마 충분히 ‘과학주의’적이다. 한편 스웨덴 사민당의 ‘국민의 집’ 개념은 그네들이 상정하는 국가가 하나의 사회공동체를 상정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주의 윤리가 주목받고, 대선 후보들이 너나할 것 없이 정치의 목표를 공동체의 안녕에 삼고 있는 상황은, 오늘날 대중의 상식이 (천민)자본주의의 대당으로서 공동체를 옹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폴라니와 베블런, 콕스를 거쳐 비그포르스로 이어지는 저자의 작업은 공동체에 대한 대중의 열망에 적절한 이론적 언어를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저자는 비판의 언어로 여겨지던 이론들의 무능력을 폭로하며 그 시효를 끝내는 한편으로, 대중의 목소리를 이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데에도 상당한 성과를 보인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자신의 사유체계를 통해 무기의 비판과 비판의 무기를 동시에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과연 객관적 과학이 가능하냐는 과학철학의 물음은 차치하고라도, 저자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공동체주의에는 분명한 결함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비판이론가이자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우만의 책은 『비그포르스…』보다 11년 앞서 있으나, 마치 『비그포르스…』를 예견한 듯한 주장들을 담고 있다.
바우만과 저자의 현실인식은 거의 동일하다.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하던 시기는 생활세계가 체계를 잠식하는 시대에 자리를 넘겨주었으며, 대안 세력들은 일상에도 정치에도 다가가지 못한 채 무능하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점차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저자와는 달리 바우만은 공동체주의를 사회의 문제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아닌, 문제상황으로부터 태어난 사생아로 본다. 바우만은 공동체가 붕괴된 만큼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많아지지만, 궁극적으로 공동체는 욕망에 대한 언어일 뿐 현실성은 없다고 지적한다. 개인의 자유와 안전이 합리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위험사회에서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개인의 고통을 ‘힐링’하는 일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힐링’의 과정에서 더욱 심각해진다. 공동체는 개인들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보듬으면서 유지되는데, 바우만이 보기에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과정은 곧 여타의 공동체를 억압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공동체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와 다른 것들-차이에 대한 ‘마녀사냥’이 행해지며, 마녀사냥을 피하기 위해 개인은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자신이 공동체 외부에서 겪은 고통을 전시하게 된다. 결국 공동체가 내세우는 공공선은 하나의 상징으로 전락하게 되며, 공동체는 공공선이라는 전시물을 관람하며 자신을 위안하는 정신병자들의 집합소가 된다.
저자가 '잠정적 유토피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바우만이 공동체가 변화를 가로막게 되는 이유를 차이의 기각과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상실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바우만에게 디스토피아·유토피아는 공적인 사회문제의 징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질문이며, 차이는 대안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존재로서 해답이다. 비그포르스가 대안으로서 ‘잠정적 유토피아’를 말 할 때, 바우만이 보기에 그는 해답과 질문을 도치시켜 유토피아라는 질문을 기각하고 있는 셈이다. 바우만이 "공동체주의가 내놓는 해답은 정의를 비롯한 진정 핵심적인-공적인 문제들을 해소하기보다는 회피할 뿐"이라 지적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더 나아가 해답으로서 공동체는 차이라는 진정한 해답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대답을 넘어서 파괴적인 존재이기까지 하다.
바우만의 지적은 1930년대에 해답으로 오인되었던 공동체들 중 하나가 파시즘이었음을 상기했을 때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저자가 바라보는 스웨덴 모델과 파시즘을 두고 동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비그포르스는 이미 바우만의 비판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준비해놓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드러난 바 가치와 사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본서에서 유토피아와 일상의 균형이라 부르는 종류의 ‘변증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동체의 한계를 수정하고 변화해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제 비로소 문제는 “왜 그런가?”를 넘어서 “어떻게 할 것인가?”로 향하게 된다.
4. 질문이 되는 질문으로서 ‘잠정적 유토피아’
이론과 실천 혹은 과학과 가치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낯익은 물음이다. 그 방법으로 베버 식의 분리가 제안되기도 했고,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대답이 등장하기도 했다. 비그포르스는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통해 이 둘의 결합을 꿈꿨는데, 이는 개혁이 문제가 아니라 개혁을 혁명과 대립시키는 것이 문제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유토피아로 끊임없이 나아가기 위한 개혁, 이상과 일상의 건설적인 관계를 세우는 방법으로 룩셈부르크가 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면, 비그포르스는 나름의 고민을 통해 ‘잠정적 유토피아’를 제시했던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이 유토피아를 ‘잠정적’으로 만드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이론과 실천은 그저 과학적인 이론과 헌신하는 대중을 통해 자연히 매개되는가? 저명한 노동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 엠마 골드만이 지적하듯 저항하는 자들의 현실성, 곧 유토피아의 ‘잠정성’은 그네들이 가진 이론의 탁월함이나 자원의 양보다는 대중운동의 역동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의 역동성이야말로 실천과 이론을 매개하는 핵심적인 연결고리이다. 저자가 스웨덴 모델이 가능하게 된 외교정치적인 배경으로서 러시아 혁명에 대해 침묵할 때, 노동운동을 정책 수립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할 때, 그는 단지 사실 묘사의 여부를 넘어서 ‘잠정적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제도 밖 정치 혹은 ‘갈등정치(contentious politics)’를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언술이야 말로 저자가 ‘어떻게’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다.
물론 저자는 이 ‘어떻게’에 대답을 내리려 시도하는 과정에서 대중운동을 비롯한 너른 의미에서의 ‘정치’의 중요성을 충분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가 비그포르스를 비롯한 엘리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에, 그의 주장은 종종 최장집의 자유주의적이고 상명하달식인 정당론과 혼동된다. 저자가 단지 안티테제적인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테제로서 ‘잠정적 유토피아’를 주장하는 데까지 확실히 나아가려면, 본서에서 추상적으로만 드러난 ‘어떻게’의 영역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저자가 생각하는 나머지 한 축인 가치-사회공동체의 윤리가 무엇인지를 밝히면서 시작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의 이론이 단지 개인주의적 대중의 안전에 대한 열망이 아닌, 공동체적 덕성에 근거한 저항의 생명력을 체화한 이론으로서 실천의 가능성을 확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비그포르스…』는 해답이라기보다는 잘 던져진 질문에 가깝다. 저자는 질문도 되지 않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상들을 비판하면서 진정 중요한 물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중요한 물음이란 유토피아를 잠정적인 수준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가이며, 저자는 그 중 한 축으로 ‘나라 살림의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독자의 몫으로 실천론 혹은 윤리학이라 부를만한 부분을 남겨두었다. 본서에서 밝힌 저자의 최우선목표가 ‘나라 살림의 계획’ 혹은 지구정치경제학을 정립하는 일임을 상기할 때, 실천의 정교화라는 나머지 짐은 한동안 독자들이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 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지그문트 바우만, 이일수 역, 『액체근대』(2009)
- 칼 폴라니, 홍기빈 역, 『거대한 전환』(2009)
- 홍기빈,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2001)
-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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