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부터
일반부_표범장지뱀상
지금, 여기부터
상산고등학교 국어교사 구설영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기사 아저씨와 한 할머니가 옥신각신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젊은 버스 기사는 할머니가 그렇게 많은 짐을 옆자리에 부려놓으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앉느나며 할머니에게 호통을 쳤다. 할머니는 애걸하듯 한번만 봐달라고 하고 있었지만 버스 기사는 막무가내였다. 한참이나 꾸중을 듣던 할머니는 한 아주머니와 학생의 도움을 받아 버스에서 내렸다. 커다란 보퉁이 하나, 박스 하나, 수레 하나. 할머니의 굽은 허리로 저 짐을 혼자서 가지고 어디로 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졌다. 보퉁이 사이로 행상 때 팔려고 조금씩 비닐 포장을 한 떡들이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민망한 표정으로 땀을 닦는 할머니의 얼굴이 멀어져갔다.
할머니는 어쩌자고 자신이 감당하기도 힘든 짐을 이고 길을 나선 것일까. 할머니는 오늘 하루, 저 보퉁이 속에 담긴 떡들을 과연 얼마나 팔 수 있을까.
할머니가 딛고 선 도로 앞으로는 유리 벽면이 반짝거리는 새 건물이 서 있고, 할머니가 타고 온 버스 안에는 시원한 에어컨이 가동되어 우리의 땀을 절로 식혀주고 있는데.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 할머니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아닌가?
어른들은 “세상 참 좋아졌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하시는데 나는 과연 무엇이 얼마나 좋아진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물론 과거에 우리나라가 직면하였던 절대적 빈곤의 상황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절대적 빈곤의 상황에서 탈피한 것은 또 아니다. ‘발전하고 있는’ 이 세계에는 분명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예의 할머니와 같은 이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등학교라도 졸업하면 어디든 찾는 곳이 많았던 시대에서, 지금은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찾아주는 곳이 없어 박사학위를 따고도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시대로 변화하였다. 어디서든 물 한바가지 떠서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 이상할 것 없던 시대에서, 지금은 돈을 주고 물을 사먹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방사능으로 오염되었다거나 머리가 빠질 수 있다는 이유로 비가 오는 날은 몸에 비가 닿는 것조차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분명 ‘발전’하고 있는 세계라고 여길 수 없는 모습들이다. 혹시 우리가 생각해온 ‘발전’의 개념 자체가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들려주는 책이 바로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였다.
그렇다면 ‘발전’이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언제부터 우리는 ‘경제발전’에 사활을 걸게 된 것일까? 우리는 일단 ‘발전’의 어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develop’이라는 말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이 말의 본래의 반대는 ‘envelop’, 요컨대 ‘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어의 문맥에서 말하면 수건이나 종이로 싼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develop’은 그 반대의 행위인 ‘푼다’라든가 ‘꺼낸다’, 즉 종이나 천에 싸여있는 무언인가를 꺼낸다는 의미가 됩니다. (중략) 예를 들면, 꽃망울이 꽃이 된다든가, 씨앗이 점점 성장하여 나무가 된다든가, 혹은 아이가 어른이 된다든가 해서 주로 생물의, 생명 있는 것의 성장을 말합니다. 그것은 어느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바뀌어간다고 하는 변화입니다만, 기본적으로 전 단계 속에서 뒷 단계가 모종의 형태로 잠재돼 있거나 내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 단계의 가능성이 다음 단계에서 실현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저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삼림을 벌채하고 산을 깎아내어 무언가를 만들고 짓고 하는 행위는 본래의 발전의 의미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것을 절단하여 전혀 다른 인공의 것을 가미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용되고 있는 ‘발전’이라는 개념이 국가적 기치로 내걸리게 된 시점은 언제부터인가? 저자는 그것을 1949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취임 연설 이후로 본다. 트루먼이 ‘미개발’의 나라들에 대해 기술적, 경제적 원조를 행하고 투자를 하여 ‘발전’시킨다는 국가 정책을 발표한 이후로 그 용어는 ‘미개발 국가’, ‘근대화’와 함께 점차 그 사용빈도수가 증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트루먼이 내세운 ‘발전’은 자국이 아닌 ‘미개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앞서 살펴본 ‘발전’의 어원을 보아도 어떤 대상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어색한 개념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자기네와 같지 않은, 즉 유럽이나 미국의 경제제도에 들어와 있지 않은 국가들을 ‘미개발 국가’로 지칭하며, 그들을 ‘발전’시키겠노라 선언해버린 것이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미개발’이란, ‘야만’의 완곡한 표현에 불과했다. 즉, 그들은 자기들과 같지 않은 다양한 존재들 안으로 자신들의 경제제도를 침투시키고 거기서 경제적 이익을 취하겠다는 야욕을 공공연히 밝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국이나 서구식으로 변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성장해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교육비의 상당부분은 그들의 언어를 익히거나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는 데 소요된다. 동사무소가 아닌 ‘주민센터’야말로 ‘글로벌’한 시대환경에 걸맞은 이름이라 여겨왔으며, 각 지방자체가 내세우는 구호들도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영어로 제작하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세계화’라는 개념 역시 지극히 위험한 이데올로기임을 설파한다.
수년 전부터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만, 세계화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사실은 식민지주의나 제국주의도 세계화였습니다. 다만 식민지주의나 제국주의의 시대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보다 조금 정직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이것은 착취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이들이 아무리 ‘계몽’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새로운 시책을 발표해도 그것이 그들을 착취하기 위한 방편임을 쉽게 간파한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교묘한 개념은 손쉽게 상대를 식민지화하면섯도 정작 대상으로 하여금 그것이 ‘발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자발적으로 그것을 원하게 한다는 데 그 함정이 숨어있다. 즉 우리는 타동사의 대상이 되어 노예처럼 일하면서도, 자동사의 주어가 되어 내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점은, 유럽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임금노동이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꼭 직장에 나가고 싶어서가 아니더라도, 생활하자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직장에 가야 하고, 또 여가를 어떻게든 줄여 좀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대부분 생각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하는 노동을 모욕적으로 생각할 줄 알았다니. 우리가 ‘좀더’, ‘열심히’ 노동에 매진함으로써 얻은 바가 무엇이고, 잃은 바가 무엇인지를 헤아려보게 되는 대목이었다.
또한 저자는 제3세계 사람들이나 지구 남반의 국가 사람들이 유럽 경제를 보고 그것에 홀려 스스로 자신의 문화를 버리고 미국이나 유럽 방식을 원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통념이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유럽인이 와서 가게를 열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또는 하루 정도 일하고 그것을 살까 하는 정도였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년 내내 일할 만큼 갖고 싶은 물건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일과 소비. 이것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쉼 없이 돌아가며 우리를 채찍질한다.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저 사치품으로 여겨지던 물건이 지금은 생활의 필수품처럼 여겨지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우리에게 필수품이라 여겨지는 그 물건들을 사기 위해 우리는 노동의 강도를 높여야 하고 정작 우리가 누리고 싶었던 여가와 행복은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 간다.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해주는 기계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수많은 기계의 힘을 빌려 일하고 있으면서도 훨씬 장시간 일을 해야만 일용품들을 조달하여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발전’한 세계의 한숨과 그림자는 그래서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경제발전의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 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물건을 찍어내고 그것을 소비하는 데 삶을 탕진하는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올 수 없게 된다. 저자의 지적처럼 TV 광고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물건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라.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라면, 굳이 수고스럽게 홍보를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매년 경제성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 하에서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도 많이 만들어서 어떻게든 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간디는 “대지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구미를 통해 이식된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우리 환경에까지 재앙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주변의 직장 동료들은 나에게 왜 차를 사지 않느냐고 핀잔 섞인 질문을 던지곤 한다. 직장 근처에 살기 때문에 차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면, 차를 구입하고 나면 다 쓸 데가 생기게 마련이라며 뭘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소비가 소비를 부르는 시스템에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슈마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도 근대 경제학의 수량에만 집중하는 태도에 기대어 에너지 공급 문제를 단순히 수많은 문제들 중 하나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중략) 수량에 집중하는 태도는 질적 이해를 가로막으며, 심지어 ‘크기 순서’(orders of magnitude)의 질조차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실상 근대산업사회의 에너지 공급 전망에 대한 논의가 일반적으로 현실성이 없는 이유도 대체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석탄이 고갈되고 있으며 석유로 대체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될 경우 이미 알려졌거나 예상되는 (즉 아직까지는 발전되지 않은) 원유 매장량이 빠르게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하면, 그 사람은 ‘아주 빠르게 원자력 시대로 넘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특히 화석연료의 보존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시큰둥하게 답변한다.
1970년대 사람들의 생각이 지금까지도 큰 변화 없이 이어져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동안 경제발전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우리의 환경이 얼마나 큰 재앙을 입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책에 나온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세계의 모든 가족이 자동차를 한 대씩 가진다고 하면 석유는 불과 수개월 만에 바닥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이 남아있는 한 무언가 새로운 대체재가 나올 것이라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성장 속도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은 현재 지구가 처한 긴박한 상황에 대해 느슨한 긴장감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영역인 생물권(biosphere)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경제든 과학이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환경에 의지하여 일구어낸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제 더 이상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새로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터. 저자는 그것을 ‘대항발전’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대항발전이란 물건을 조금씩 줄여가며,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가진 능력을 발전시킨다는 뜻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기계를 줄이고 도구를 늘립니다. (중략) 그리고 사람이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키웁니다. 돈은 시간이라 할 때의 그 시간은 더 생산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고 관리되고 있지 않은 시간, 자유시간,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시간, 혹은 다르게 표현하면 돈의 교환과 무관한 시간.
저자가 제시하는 대항발전, 제로성장의 개념은 그저 멈추어 서자거나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중지하자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한 채,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를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정신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매순간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야말로 ‘참다운 의미의 풍요를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라야만 우리는 환경, 그리고 우리 자신을 마모시켜가는 거대 구조의 압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콜럼버스가 카리브 해의 섬에 도착하여 만났던 원주민들의 이야기로 끝을 맺을까 한다. 이 이야기는 현대 사회의 거대한 경제 신화에 종속되기 이전 인류의 본래 모습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파괴되었을 때의 마지막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모색하자. 우린 아직 늦지 않았다.
이 섬에는 ‘타이노’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와 함께 왔던 당시의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 거기에 도착했을 때 콜럼버스와 그 일행은 어쩌면 에덴동산으로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토록 자연이 아릅답고 또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성서 속의 낙원, 에덴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물건을 별로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더위 때문에 옷도 별로 입고 있지 않고, 거의 벌거벗은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농경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뛰어난 농법이었습니다. (…) 따라서 밭에서는 일주일 중 몇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 그러면 무엇을 하면서 지내느냐 하면, 무엇보다 음악이 중요하였습니다.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시간, 악기를 가지고 음악을 연주하는 시간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혹은 이야기꾼이 모두에게 이야기를 하는 시간. 혹은 장식물을 만드는 시간. 그들은 대단히 솜씨가 뛰어나서 머리장식이라든가, 목걸이라든가, 귀걸이라든가, 다양한 것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즉 예술활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인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것은 그들의 성행위였습니다. 연인이 한몸이 되어서 이러저러한 온갖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을 별로 숨기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 실제로 콜럼버스는 여기에서 노예쩨를 만들고,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였습니다. 타이노족은 무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칼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 그러나 타이노족은 노예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자꾸 죽어갑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병으로 죽거나 또는 버티고 앉아서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 울화병으로 죽기도 하고, 또는 아이들을 낳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노예로 사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이노족은 백년 사이에 전멸했습니다. 지금은 단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