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일반부_본선진출작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양기원
“며칠 정도 뭄바이에 머무를 예정이다. 이곳은 인도 최대의 항구도시다.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여행객이 거리에서 뒤섞인다. 인도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배경이 되는 엄청난 규모의 슬럼가가 존재하는 곳이다. 식민지 시절 지어진 철도역의 화려한 불빛 아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걷고 있다. 이곳의 첫 인상은 그런 강렬한 대비로 새겨졌다.
단순히 여행자였던 나는 그런 슬럼 지역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그곳에 전혀 개입할 수도 그들을 변화시킬 수도 없음을 느꼈다. 가판대에 걸린 신문 1면에는 인도가 올해 8% 경제성장률을 달성할 것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그 앞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행복하지 않았다. 왜?”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읽고 나는 몇 년 전 인도여행의 기록들을 다시 들추어보았다. 인도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의문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데 사람들은 왜 더 행복해지지 못하는가?’ 여기에 이 책은 이렇게 대답한다. ‘진정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멈춰야 한다.’
이 책의 첫 장은 우리의 경제 구조를 타이타닉에 비유한다. 환경위기가 닥쳐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을 계속해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빙하에 부딪혀 침몰할 것이 예상되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려나가는 타이타닉호의 모습과 같다는 뜻이다. 배를 멈추거나 진로를 수정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배를 계속 나가는 것, 즉 경제성장을 계속해야한다는 주장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타이타닉호의 선원들은 일하는 것이 행복해서 배를 계속 움직이는 걸까? 딱히 그런 것 같지 않다. 배를 그대로 운행하는 것은 앞에서 적었듯이 빙하와의 충돌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왜 배에서 일하는 것, 즉 경제성장으로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 우리들은 어째서 배를 멈추려고 하지 않을까? 과연 무엇이 이 타이타닉호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끊임없는 성장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중독적인 환상이다. 저자는 그것을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이름 붙인다. 여기에 가려지는 것은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상식, 그리고 환경은 무제한적이지 않다는 상식이다. 너무나 강박적인 성장숭배 관념이 우리를 지배하면서, 예전에 당연했던 이러한 ‘상식’들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저자의 뼈아픈 지적이다.
따라서 저자는 현실에서 유리된 ‘타이타닉 현실주의’를 극복하고, 잠자고 있던 상식을 깨우 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파국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고, 환경과 인간까지 끌어안는 ‘진정한 현실주의’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성장을 멈추면 우리는 환경을 파괴하지 않을 것인가? 지금까지의 경제 시스템은 자연환경과 다른 인간을 ‘착취’하고 파괴하면서 작동해왔는데 그 규모가 더 커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한 파괴가 멈출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너무나 거대하고, 우리가 소모하는 물건들은 너무나 많기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결국에는 엄청나게 환경을 파괴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타이타닉호’를 완전히 멈출 수 있을까?
질문에 대답하듯 저자는 제로성장을 넘어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을 논의한다. 대항발전은 물질적인 부를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사회 전반의 풍요로 환원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대항발전을 통해 환경과 인간을 파괴해온 경제구조를 바로잡으면서, 더 나아가 풍요가 행복으로 연결되는 진정한 발전을 위한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대항발전은 단순한 경제 성장의 정지가 아닌 일상생활과 사회 전반의 변혁을 필요로 한다. 우선 저자는 환경이 지속가능한 수준까지 우리의 물질적 소비와 환경 파괴를 줄여야함을 주장한다. 즉 여기서 우리는 대항발전 개념이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growth)’ 개념의 재해석이면서, 최근 사회 운동으로 등장하고 있는 다운쉬프트(Down-shift) 운동의 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환경오염의 축소와 더불어 소외되었던 인간성의 회복과 부의 정의로운 분배를 추구해야함을 역설한다. 이는 빈곤을 재생산해왔던 그동안의 경제성장 방향을 뒤집어야함을 의미한다. 기존의 경제에서 우리는 사용가치는 거의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다는 우월감을 일으키는 상품을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는 거꾸로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데도 사회 전반에는 역설적인 빈곤이 만연하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대항성장의 경제에서 우리는 빈곤을 극복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나눌 수 있는 생산과 소비를 추구해야한다.
이와 같은 대항발전의 사례를 한 가지 찾아본다면, ‘적정 기술’을 들 수 있다. 이는 소수의 부유층만을 위한 값비싼 첨단기술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되도록 사회 전체가 누릴 수 있는 기술을 뜻한다. 따라서 적정기술은 되도록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사회 전반에서의 대항발전이 가능하기 위해서 저자는 더 나아가, 정치부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을 이끌어내는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제의 근본적인 변화에는 시민들의 결집된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이러한 움직임은 민주주의라고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엘리트 중심의 선거 공화제’를 ‘시민 중심의 참여 민주제도’로 바꾸는 일이다.
저자는 제도적 변화와 동시에 일상생활에서 무시되어온 민주주의 원칙을 회복시키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지적한다. 그동안 사회의 개인들은 조직 효율성의 원칙으로 개인을 통제하는 회사와 군대의 압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주의적인 조직들을 위해 희생하는 동안, 사회적으로 시민의 의사가 결집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은 돈이다’라는 프랭클린의 원칙을 뒤집는 ‘돈은 시간이다’라는 원칙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저자는 조직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우리 스스로 활용하는 여가와 사색의 시간으로 바꾸기 시작할 때 진정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하며, 이로써 진정한 풍요를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임을 주장한다.
이 책이 제시하는 대항발전은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무시하던 환경과 인간성의 회복이며, 이것들까지 끌어안는 진정한 현실주의로의 귀환이다. 저자가 애초에 이 책 제목을 ‘21세기의 상식을 위하여’라고 지으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제성장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이면에 숨겨져 있던 상식을 회복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지금 이곳, 한국에서 대항발전은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저자가 언급한 수많은 사례들은 한국의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강력한 산업화 신화 아래서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을 하고, 그로 인해 개인적인 여가를 보낼 여유조자 없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이러한 환경 아래 성숙한 시민사회가 자라날 사회적 토양은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는 생활 전반에서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개방적인 민주주의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주적인 시민의 의사를 받아들이는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논리적인 귀결에 가깝다.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수많은 과제 앞에서 무력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치료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이 책이 제시하는 상식의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미 성장의 굴레에 얽매인 자신을 돌아불 계기를 얻은 것이다. 노자가 ‘성인이 병들지 않는 것은 그가 병을 병이라 여기기에, 이 때문에 병에서 벗어난다.’(도덕경 71장)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 손에는 이제 방향타와 브레이크가 쥐어져있다. 빙하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이들에게도 고개를 들어 바다와 빙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되도록 타이타닉이 가라앉기 전에 시작해야한다.
덧붙여서 성장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파고드는지 더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클라이브 해밀턴의 ‘성장숭배’(김홍식, 바오 출판사)를 추천한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