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로부터 현실을 탈취하기: 억압된 종말과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일반부_흰속물떼새상(공동수상)

현실주의로부터 현실을 탈취하기

억압된 종말과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오학준


‘후쿠시마 원전’이라는 징후

2011년 3월 13일,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지진의 여파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었다. 이 사건은 ‘관리’의 상징인 일본에서 벌어졌다는 점과 사건의 여파가 광범위했다는 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체계적인 매뉴얼을 갖추고도 일본정부는 사건의 규모를 축소하려고만 했을 뿐, 원전에서 누출되는 방사능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사건 발생 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원자로의 멜트다운 현상이 발생하는 등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건에 대해 호들갑을 떨던 한국 언론들은 어느새 관심을 끊었고, 동시에 한국에서 이 사건은 빠르게 기억 너머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 사건은 현대 사회의 모순들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징후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가 매우 통제하기 어려운 규모의 위험을 다루고 있으며, 그 위험의 규모가 인류의 전면적인 종말을 초래할 수 있음을 기습적으로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근원적인 어리석음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신앙과도 같은 맹목적인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화, 이데올로기 등 어떤 개념이든 상관없다. 어느 경우에도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는 신앙을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앙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관점을 구성하고, 이 세계관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사건들의 성격 역시 구성된다. 그렇다면 성장에 대한 신앙 위에서 짜이는 현실은 진정으로 ‘현실주의적’일까? 우리는 이 신앙 속에서 자연의 파괴를 당연시하고 그것을 방조하며, 우리 스스로를 파국으로 내던진다. 파국으로 향하는 역사의 기차를 멈추기 위해, 그러한 신앙의 비현실성을 지적할 수 있는 새로운 상식을 대중들이 공유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C.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이하 『성장』)는 이러한 파국을 앞두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며, 성장에 대한 신앙을 격파하기 위해서 지체 없이 대중들이 행동에 나서야 함을 역설하는 책이다.

C. 더글러스 러미스와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미스는 환경운동, 반전운동 등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실천가인 동시에, 이러한 사회운동을 이끌어 갈 주체로서 대중에게 올바른 정보를 주고 새로운 상식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론가이기도 하다. 러미스는 고학력자나 전문연구자가 아니라 언제나 다수의 대중이 사회운동을 이끌어야 하고 이끌 수 있다는 당위와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된 설득의 대상은 노동자, 농민, 학생, 주부 등 평범하고 주의에 다수 존재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장』은 독자를 고려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평이한 문체로 작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다루는 대상과 주제들이 부차적인 문제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평이함 속에는 사회적으로 치열한 쟁점이 되는 문제들이 상당수 녹아 있다. 이 책에서 러미스는 우리가 ‘현실주의’(reality)적이라고 생각하는 주장들이 실은 진정한 현실(the real)과는 무관하며, 억압되어 있는 현실을 현실주의로부터 탈취하여 그것에 기초한 새로운 상식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과 평화, 경제성장과 빈곤, 민주주의와 환경 등 민감하고 중요하지만 쉽게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는 문제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함으로써, 러미스는 그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도래할 종말을 진지하게 고려하며, 역사의 방향을 변화시키려는 실천을 대중 독자들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러미스는 구체적으로 우리 앞에 주어진 현실주의적 태도를 ‘타이타닉 현실주의’로 규정하고 그것의 특징들을 살피며(제1장), 일본헌법 제9조(이른바 ‘평화헌법’)의 의의와 보존의 당위성을 검토하며(제2장), 성장과 빈곤 사이의 관계를 전도시키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제3장, 제4장), 이러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피를 위해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검토하고 대중들에게 저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한다(제5장, 제6장).

구체적으로 러미스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러미스는 환경파괴로 인해 세계의 종말이 일어날 것이라는 수많은 학자들의 경고와 실제로 나타나는 위험(risk)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답이자 목적이라는 광적인 태도를 “타이타닉 현실주의”(15)라고 부른다. 러미스는 타이타닉호가 속도와 호화로움에 신경을 쓴 나머지 눈앞에 다가온 빙산을 알아채지 못하고 침몰했다는 사실과 현실주의자의 태도를 비유적으로 잇는다. 러미스가 보기에 여객선의 핵심적인 목적은 도착지까지 승객들을 안전하게 수송하는 것이지만, 오로지 더 빠르고, 더 크고, 더 호화로워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원래의 목적을 상실해버린 타이타닉호의 모습이, 인류의 생존이 절대적으로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어쩔 수 없다’며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현실주의자들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러미스는 현실주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이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이 전개되는 구체적인 주제들을 분석해나간다. 먼저 그는 ‘일본헌법 제9조’, 이른바 ‘평화헌법’(이하 ‘9조’)이 이상적이라는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대내적으로 독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국가의 폭력적 기구들의 힘이 강해질수록, 전쟁 특히 내전으로 인한 국민의 피해가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국가에게 그 힘을 독점하게 내버려두는 판단은 옳은 것일까? 러미스는 2차 대전이야말로 그 판단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주장하며, 그 참혹한 현실을 경험한 후 ‘9조’가 등장했음을 지적한다. ‘9조’는 러미스가 보기에 가장 현실적인 인식에 기초한 발상이었다. 왜냐하면 이 조항은 일체의 자위권을 포함하여 국가의 교전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9조’는 전범국인 일본이 평화에 대해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가지는 조항이다. 따라서 러미스는 ‘9조’의 수정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대중들에게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러미스는 이어서 ‘경제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구성한 세계의 허상을 폭로한다. 발전 개념은 원래 자기 자신의 완전한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변화의 과정을 뜻했다. 하지만 1949년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연설 속에서 발전 개념이 처음 등장한 이후, 이 개념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목적을 향해, 바깥으로부터의 힘을 통해 강제로 변화하는 과정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이는 성럽 국가의 발전된 상태를 모든 국가가 지향해야 할 목적으로 삼고, 그것에 도달하게 만드는 모든 과정들이 일종의 자연스러운 해방의 과정이라는 오해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개념 속에서 발전된 국가가 저발전된 국가에 행하는 모든 행위는 심지어 착취라고 하더라도 ‘도움’으로서 이해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형성한 발전 개념 속에서 모든 사회적 현실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저발전되고 빈곤한 상황은 그들 국가가 아직 발전이 덜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만약 그들이 성장한다면 빈곤은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사람들은 세계의 빈곤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러미스는 빈곤, 슬럼, 저발전 등의 개념이야말로 발전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빈곤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국가들의 존재에서 오는 상대적인 박탈감, 끊임없이 창출되고 조작되는 소비욕구, 발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정당화되는 착취관계로 인해 나타나는 부정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성장 이데올로기는 정당한 분배를 지연시키는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야 한다고 러미스는 주장한다. 이를 위해 러미스는 ‘대항발전’(101) 개념을 내세운다. 이는 진보의 방향을 타의적 소유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실현으로 트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행복이 중심이 되는 세계관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미스는 정치의 공간에서 사회적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정의의 문제가 다루어지는 것이 세계관의 전환과 맞물려있다고 본다.

러미스는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전문가에게 모든 결정을 유임하는 분위기를 걷어내고, 경제, 정치, 문화 영역에서의 민주화에 동참할 것을 대중들에게 요청한다. 러미스가 말하는 민주화란 자기결정이며, 경제, 정치, 문화의 민주화란 각각의 분야 안에서 등장하는 문제들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 주체로서 참여하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에는 부의 분배에 대한 요구, 노조활동, 시위, 투표, 대안문화활동 등 수많은 행위들이 포함되며, 러미스는 이러한 행위들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러미스는 이미 우리가 완전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처투성이의 “방사능이 있는 유토피아”(170)밖에 도달할 수 없지만, 더 늦지 않게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여전히 가능성 있는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러미스의 주장이 가지는 한계

러미스의 이 책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진정한 현실 인식을 방해하고, 동시에 이데올로기에 체념하고 순응하는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분석과, 이에 대응하여 진실을 알게 되어 열정적으로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체의 당위성을 연결하고자 시도하는 고전적인 사례다. 러미스는 여기서 주체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열정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앞서 말한 분석과 당위 사이의 접착제로서 사용한다. 전문가들이 스스로도 다룰 수 없는 위험에 손을 댄다 하더라도 대중들이 그것을 견제할 수 없게 되는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를 깨트리기 위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는데, 그것의 실현을 위해 대중들은 저항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러미스의 주장은 가장 이데올로기와 진리 사이의 대립과, 무지로부터 오는 순응을 지식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실제로 그의 책이 효과를 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분노하기도 하고, 사회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도 하며, 경제성장을 현실이 아닌 이데올로기로서 명확하게 인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소비자운동의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상품을 선택할 때에는 그 대의를 배반하는 합리적인 대중들을 계속해서 목격해 와다. 책의 종류의 다양성과 질적 향상을 위해 도서정가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도서를 오픈마켓에서 대규모로 할인해서 구입하는 태도를 보이는 독자들의 모습이 가장 적절한 예다. 러미스가 힘주어 말하는 환경운동 역시 다르지 않다. 자연의 파괴가 머지않아 인류에 강력한 위협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작은 실천들을 귀찮아하고 더 나아가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들의 물건을 스스럼없이 구매하는 이들에게 단지 우리는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당위를 제공한다고 해서 그들의 태도가 변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러미스는 이론이나 당위보다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이데올로기를 극복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냉소적이고 둘로 분열된 주체들을 열정적인 주체들로 변모시키는 방법을 새롭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중의 움직임에 대한 낙관, 지식이 행동을 추동할 수 있다는 순진함은 현실의 타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열정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폐기하고 오만하고 냉소적인 주체들의 태도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개별적 차원에서 개인의 안위를 내기의 판돈으로 걸고 행동을 촉구하거나 애초에 계몽된 집단이 대중을 선도하는 방법을 택해야 할까? 이러한 주장 역시 소수의 집단의 움직임 혹은 개인의 움직임을 대중 전체의 움직임과 연결시키는 데 실패했다. 9조의 가치를 지적하고 기존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여도 사람들이 쉽게 움직이지 않을 때, 이 순진함은 대중에 대한 혐오로 쉽게 변모한다. 사실 엘리트주의적인 생각과 대중에 대한 순진한 기대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양 극단을 벗어나서 고립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공적인 연대를 조직하고, 이데올로기를 떠나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이 글은 이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진전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올바른’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면 그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것에 따르면 대체로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증’이 붙어있기 때문이다.”(172)라고 그가 주장할 때 우리는 냉소적인 주체가 아닌 주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책의 독자 수준과 책이 가지는 실천적 성격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의문들에 정교한 대답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 책이 대중들의 지식과 실천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면, 이를 짚는 일은 간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결정의 시간

이 책은 그 분석의 날카로움과 비판적인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이중적인 주체들의 냉소적 태도를 파괴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또한 우리가 과거로 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욕망을 줄여야 하는 미래의 상황에 대한 세밀한 묘사 역시 아쉽다. 하지만 그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가 현재 어떻게든 지금의 경향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한다. 생존을 위한 결정이 긴급하다는 당위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제 문제는 이 책에서 획득하고자 했던 열정을 불어넣는 구체적인 기술들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것을 마련할 때에 이 책은 비로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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