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비판의 미묘한 지점

일반부_흰속물떼새상(공동수상)

근대화 비판의 미묘한 지점

이상직


1. 들어가며

경제성장으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고 있다는 이야기, 경쟁원리에 따라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 돈이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을 장악해 사람들 간의 관계가 피폐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내게도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여러 서적들과 언론매체, 심지어는 광고를 통해서도 이런 이야기들을 거의 매일 접하고 있고, 일상을 통해 확인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고나 호소는 나에게 막연한 위기감만을 안겨 줄 뿐, 무언가를 하게 하는 동인이 되지는 못했다. 사실 위기론자들이 말하는 위기는 대부분 ‘전 세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반면, 진학이나 취직으로 매개되는 경제적 능력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다른 이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가정하면, 정확한 문제인식에서 도출된 ‘현실적’인 대안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이란, 머릿속으로는 무언가 불편한 생각을 가진 채, 몸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애쓰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온갖 매체에서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는 ‘현실적’ 방법들을 선뜻 수용하지도 못했다. 전등 끄기, 분리수거 등은 이미 상식이 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웰빙문화’로 불리는 생활방식이 유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친환경적’ 기술개발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착한소비’나 ‘공정무역’으로 불리는 소비방식이 주목을 받고 있다. 나는 이러한 기대와 방법들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를 완화시키기보다는 완화된 방식으로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닫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선적이라고도 생각했다. 많은 방식들이, 이미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 의해 권유되고,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러미스의 책을 발견했고, 그가 독자로 상정하고 있는 사람 ― 경제라는 요소에 구속되어 있는 학생이면서, 광고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소비자이면서도,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는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 ― 이 바로 나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던 막연한 답답함을 푸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내가 비슷한 종류의 책에서 가지게 된 편견을 깰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 책 역시 상투적이거나 위선적이진 않을까? 이런 기대와 의문으로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2. 러미스의 논증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상투적이지 않다. 그는 경제발전 논리에 의해 삶의 토대인 자연과 풍요로운 인간 홣동 및 관계까 끊임없이 파괴된 과정이 바로 20세기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경제발전이 언젠가는 모두에게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논리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 러미스에 따르면, 이러한 믿음은 허구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경제력으로 정의되는 오늘날의 풍요로움을 전 세계 인간이 누리고자 할 경우 지구가 견딜 수 없다. 둘째,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부유하지 않는 사람들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즉,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러미스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설득하는 방식은 신선하다.

러미스는 먼저 발전, 풍요로움, 진보, 국가, 민주주의, 이상주의, 현실주의와 같은 개념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상식’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발전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회의 내재적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닌가? 풍요로움이란 우리가 무언가를 직접 할 때, 혹은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얻는 어떤 고양된 느낌이 아닌가? 인간의 능력, 인간의 기량,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진보가 아닌가? 국민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군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인민에게 힘이 있는 상태가 민주주의가 아닌가? 현실주의란 현실에 토대를 둔 인식이 아닌가? 이런 방식의 질문에는 러미스 나름대로의 생각이 일정부분 개입되어 있지만, 대부분 수긍할만한 것들이다.

다음으로 러미스는 그러한 개념들의 기원과 역사적 변화를 추적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색안경을 끼고 달려왔는지 깨닫게 한다. 그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경제발전정책이란 것이 2차 세계대전 직후 노골적인 식민지지배가 수용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미국의 새로운 착취전략으로, 착취를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같은 의미에서, 경제발전은 “빈부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빈곤을 이익이 나는 형태로 고쳐 만드는 과정”이며, 제3세계 국가는 “발전되어 있기 때문에 가난하다(81쪽)”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20세기의 전쟁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살해된 전쟁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자국민 사이의 오랜 전쟁(35쪽)”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의 민주주의를 기초한 미국의 헌법이 실은 반민주주의적인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만일 놀라게 된다면, 그것은 러미스가 제시한 역사적 사실이 그와 함께 확인한 우리의 ‘상식’을 배반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그의 역사적 분석은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평생이었던, 따라서 당연시되었던 20세기의 사회를 하나의 역사적 형태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3. 러미스의 대안과 그에 대한 단상

나의 의문과 관련해 내가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대항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이었다. 그에 따르면 대항발전은 “경제는 성장하지 않아도 좋다. 극 대신 의미 없는 일, 혹은 세계를 망치는 일, 돈밖에는 아무런 가치도 나오지 않는 그런 일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109쪽)” 과정이자, “물건을 조금씩 줄여가며,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뜻(111쪽)”이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과 소비라는 상품화 과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향에 따라 그는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영역에서 가능한 구체적 활동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는 노동조합을 결성해 직장 내 언론자유를 위해 노력하거나 양심에 배치되는 일자리는 과감히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로서는 비윤리적인 기업의 상품을 사지 않거나, 광고상품을 사지 않거나, 대안화폐를 사용한다. 정치적으로는 다양한 정치활동에 참가한다. 문화적으로는 경제적 교환가치 이외의 가치를 인식하고, 창조하려고 노력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활동들은 “혼자서는, 한 나라로는 불가능(103쪽)”하다. 그렇다고 “남에게 시킬 일도 아니(104쪽)”기 때문에, 함께 할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 말이 러미스가 제시한 대안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러미스의 대안이 실현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딜레마 또한 보여주고 있다. 러미스 역시 인정하고 있듯이, 사람들이 돈 이외의 가치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대안적 활동을 실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이다(98쪽). 이러한 두려움은 러미스가 말하고 있듯이 물질적 궁핍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따라서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욱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안전이 보장된 사회(99쪽)”와 함께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제력을 중요한 가치로 보는 인식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한 안전보장은 사람들이 러미스가 말한 방식을 실행에 옮길 때에 가능하다.

생각해 보면 경제적 가치 이외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터전이 파괴되어버린 오늘날, 경제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이반 일리치의 분석은 시사적이다. 그는 한 에세이에서 경제적 가치로부터 혹은 경제성장의 폐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오늘날 특권계급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통근시간대를 피하여 통근할 수 있다면 당신은 성공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택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면 당신은 필경 엘리트 학교에서 공부한 것과 같다. 당신이 병들었을 때 의사에게 가지 않고 스스로 낫는다면 당신은 타인이 모르는 특별한 지식에 정통하고 있는 것이다. … 만일 당신이 오두막을 지을 수가 있다면 당신은 결코 가난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하층계급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반생산적인 물건들을 ‘반드시’ 소비해야 하는 사람들, 또 자칭 봉사자들의 봉사를 ‘반드시’ 소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특권계급이란 그러한 소비를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림자 노동』, 미토, p. 23.)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불의한 노사관계에 항의하는 노동자들도 러미스가 제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양심에 따라 일자리를 선택하고, 심지어는 그만둘 수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일리치가 말한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상품 구매의 기준은 ‘양심적인 기업’에 의해 생산되었는지의 여부나 광고에 등장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싼 가격이다. 한편으로, 근대화된 빈곤을 태어나면서부터 겪은 하층민들에게, 따라서 경제적 풍요로움의 ‘공허함’을 느껴볼 기회조차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경제적 가치 너머의 어떤 가치를 말하는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만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역설은 국제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국가의 ‘성장논리’에 대한 한국인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단지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 때문으로만 볼 수는 없다. 식민지 시기 일본에 대해 느꼈던, 해방 이후 미국에 대해 느꼈던 열등감 혹은 서러움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국가의 경쟁력이란 국가 위신의 상승을, 그에 따른 개인적 위신의 상등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들에게, 나아가 비슷한 역사를 겪은 제3세계 국민들에게 발전은 국가전체의 차원에서 서구인들에게 당했던 무시를 되갚는 것, 곧 ‘정의’의 실현일 수도 있다.

“남반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천루와 쇼핑몰, 기가와트와 성장률에 대한 갈망의 이면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살아 있는 공정함을 보고 싶다는 욕망도 있다. (…) 발전의 추구는 정의를 향한 갈망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 이 세기에는 지구도 이 세상 사람들도 발전의 신조가 군림하는 것을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처지인데도 아직도 발전의 신조가 지속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남반구 쪽에서 더 큰 정의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反자본 발전사전』, 아카이브, pp. 11-12.)

위와 같은 사실을 중요하게 고려한다면, 현재의 문제의 책임이 전지구인에게 있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책임론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즉, 만일 누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면, 그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 혹은 부유한 나라여야만 한다는 점 또한 지적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러미스는 대항발전 논의의 핵심주제가 “‘남’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북’을 어떻게 바꿔야 하나(102쪽)”가 되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지적함으로써 여타의 논의가 보여주는 위선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은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쓰지 신이치와의 한 대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근대화 비판에 있어 “미묘한 부분”을 고려해야 함을 강조한 부분이다.

“근대사회에 대한 비판은 아주 중요하도 또 정곡을 찌르고 있고, 저 자신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아주 큰 함정이 있어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와 노력을 이해하고, 그 위엄을 인정하면서 논의할 수 있는 형태로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 녹색평론사, p. 50.)

같은 대담에서 그는, 그 자신이 미국해병대원으로서 오키나와에 주둔했던 경험, 그 역시 일본사회에서 누린바 있던 미국인의 특권, 동료들이 보인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오만한 평가 등을 회고하며, “지구인이니 지구시민이니 하는 말로 회피하기보다”는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독자로 상정하고 있는 이들은 대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유함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자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겪고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척결해야 할 것은 세계의 ‘낙후된’ 사회의 가난이 아니라, 세계의 ‘선진’사회의 풍요로움”임을 인정한다면, 이 책은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부자들에게, 사회의 아웃사이더들보다는 기득권자들에게, 남반구 사람들보다는 북반구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람들은 러미스가 말한 바의 대부분을 ― 설령 그것이 현재는 마음속으로만 감춰둔 이면의 상식일지라도 ―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 기 때문이다. 러미스 또한 ‘평등’을 논하는 한 에세이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평등 문제의 문제는 빈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잉에 있다. (…) 이 말은 이 문제의 해법이 빈곤의 문화를 발전으로 가는 길 위에 두어 빈곤의 문화를 크게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잉의 문화를 역발전으로 가는 길 위에 두어 과잉의 문화를 크게 바꾸는 데 있다는 뜻이다.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절제하면서 살아온 습관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세계의 다수인에게 새ㅑ로운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소비를 하는 습관의 야비함과 그런 소비 습관을 손에 넣으려고 다른 사람들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는 행태의 더 큰 야비함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세계의 부자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들이미는 것이다.” (『反자본 발전사전』)

이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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