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가능하죠?
일반부_꾸구리상
A/S 가능하죠?
김명기
14개월 된 아들이 있습니다. 손을 잡아주면 100m 달리기라도 할 것 같은데 아직 혼자 걷진 못합니다.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아비를 닮아 겁이 많은가 봅니다. 걷기뿐만이 아니에요.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옹알이만 하고 혼자 숟가락으로 밥을 떠 입에 넣지도 못합니다. 똥오줌을 못 가려 아직 기저귀도 차고 있죠. 사람이 낳은 사람인데 아직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서른이 넘은 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밥 먹고 걷고 화장실에 가서 똥오줌을 싸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저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1년하고 2달의 시간만 보냈을 땐 우리 아들과 마찬가지 신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들을 하니까 모두 잊어버린 거죠. 그 모든 것이 ‘타고난’ 것이 아닌 ‘배운’ 것이라는 사실을. 후천적 습득.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으면서 놀랐던 사실은 이 ‘자본주의’ 역시 인류가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자본주의라는 현실도 인간의 ‘발명품’이었습니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붕괴, 중국의 개방을 차례차례 지켜본 세대로서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금 자본주의외에 대안은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좋든 싫든 지구를 떠나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구나, 자본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만들어진 지 불과 1, 200년 밖에 되지 않은 신상품(新商品)이라니요. 그렇다면 A/S도 가능한 거 아닌가요? 공산품은 다 A/S 해 주는 거잖아요. 그게 한국이 3대 세습기업 삼성(samsung)을 사랑하는 이유잖아요.
그러니까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에 대한 A/S 설명서입니다. A/S 방식은 거꾸로 보기입니다. 현실에서는 개발, 경제성장이 최고의 가치를 갖습니다. 소위 전문가란 사람들은 경제성장률만을 놓고 나라 살림살이가 좋아졌는지 아닌지를 판단합니다. 1, 2% 성장은 위험합니다. 0% 혹은 마이너스 성장이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 나라가 부도라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률은 시장에 돈이 흐르는 ‘양’만을 판단합니다. 질(質)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래서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과정에서 산이 깎이고, 강이 메워지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늘어나도 경제성장률이 높으면 좋은 것입니다. 성공입니다. 경제성장률의 논리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나 4대강 살리기 사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동계올림픽 유치, 4대강 살리기 사업의 경제효과가 어마어마한 것처럼 홍보됩니다. 최소 수조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88올림픽, 2002 월드컵을 치러봐서 알고 있습니다. 아니 풀지 못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 수조원의 돈, 다 어디로 간 겁니까? 누구 주머니로 들어간 거예요? 올림픽하면 동네 개들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닐 거라고 하드만. 무엇보다 개발,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발을 딛고 사는 지구를 야금야금 파먹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우린 흰개미처럼 다 먹고 난 후 이동할 새로운 서식처가 없잖아요. (아님 이참에 지구도 하나 아니 몇 개 더 만들던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지속가능한 발전’, ‘진짜 성장’이라 말을 바꿔왔지만 이 모든 것이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에 대항하여 그가 내놓는 개념은 ‘대항발전’. 기존의 발전이란 개념에 대항하자는 것이지요. <경제성장이 안 되면>에선 대항발전의 개념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지 않지만 영국의 한 기관에서 설정하여 계산했다는 행복지수(happiness index)가 이 카테고리에 속할 것 같습니다. 돈이 얼마나 흐르고 있느냐가 아니라 사람이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는 가가 ‘발전’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현실에서도 A/S를 제안합니다. 그는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 ‘간접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 문화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였습니다. 폴리스의 모든 시민(노예와 여자를 제외한 남자)이 참여했고 정해진 임기마다 돌아가면서 폴리스를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필요에 따라 실질적으로 개개인의 힘은 크게 제한되었고 실질적으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힘은 권력을 ‘위임’받은 대표자들에게 넘겨졌습니다. 이 정치체제엔 ‘간접’ 민주주의라는 미명(美名)이 붙었습니다. 그러나 힘을 ‘위임’한 사람들이 실제 힘을 쓸 수 있는 시기는 4년 혹은 5년에나 한 번 돌아옵니다. 권한을 위임받은 그들은 사실상 군림합니다. 사실 민주주의 바탕에 깔려있는 ‘참여’라는 가치와 ‘간접’이란 용어는 모순입니다. ‘간접’적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우리의 원격조정을 받는 로봇이어야 합니다. 아니면 간접적으로 밥 먹고, 똥 싸고, 사랑하고, 노래 부르는 것도 가능해야 합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직접 민주주의만이 진짜 민주주의이고 제비뽑기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비뽑기로 이루어지는 직접 민주주의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조차 주어진 현실에 길들여진 결과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마하트마 간디, 슈마허의 주장을 가져오는 것은 어떨까요? 간디는 스와라지, ‘마을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경제학자 슈마허는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지만 인간과 자연을 소외시키지 않는 중간기술을 제안했습니다. 진안에서는 10년째 마을 만들기를 추진하고 있구요. 이들은 모두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가치를 공유합니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는 수백 명의 시민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아고라 광장에 모여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주류 정치학자들이 규모가 커진 현대에선 불가능한 체제라고 하지만 마을에 주목한다면 불가능하지만도 않습니다. 정치가 이루어지는 단위를 작은 마을 수준으로 쪼개는 것입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면 마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한 정보 교환이 훨씬 수월하게 그리고 빨리 이루어질 것입니다. 누구네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는 알 필요가 없지만 아무개 마을위원이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을위원을 평가하고 추후 다시 뽑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무분별한 개발사업, 국경을 넘는 착취도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할 것입니다. 당장 내가 마실 물이 마르거나 오염되고 먹을거리를 경작하는 텃밭이 사라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욕조에 물이 넘치려면 바닥부터 욕조를 가득 채울 물과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즉 임계치에 도달해야 변화가 발생합니다. 2011년,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왔던 현실이 임계치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휴대폰 사용하는 사람의 1/3이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스마트폰에의 핵심 기능 중에는 ‘증강현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주변을 보면 관련 정보가 화면 위에 뜹니다. 그리고 극장에선 <해리포터>, <트랜스포머> 등 ‘현실’에선 불가능한, 현실을 뛰어넘는 또 다른 현실을 그린 영화들이 관객의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이것을 자본주의의 모순과 계급이란 현실을 외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으로, 진중권과 같은 이들은 시뮬라크르의 도래로 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더글러스 러미스가 했던 것처럼 ‘거꾸로’ 보면 사람들이 ‘현실’을 넘어서는 ‘현실’을 지각하고 그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사람들이 현재를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고 무기력한 객체로 남아 있었다면 가상현실, 증강현실을 통해 또 다른 현실을 상상하는 능동적 주체가 될 틈새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욕조의 물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겠습니다. 욕조의 물이 넘치는 순간 유레카를 외쳐야 하니까요.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