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과 상추 같은 것들
일반부_꾸구리상
깻잎과 상추 같은 것들
서울대학교 이비
요새 나는 한 시민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하고 있다. 그곳 마당에는 작은 텃밭이 있는데, 점심시간에는 텃밭에서 막 딴 깻잎과 상추에 각자 싸가지고 온 밥과 반찬을 싸 먹는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참된 풍요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풍요로움’이란 모두에게 다른 이미지로 다가설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풍요로움, 그건 뭔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적 풍요를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릴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경제 성장은 모두가 동의하는 제1의 공동 목표가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발전해야’만 하는데, 이는 경제성장을 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 역시 마잔가지이다. ‘부자 되세요.’가 부끄럽지 않은 덕담이 되었고, 성공의 기준은 소득의 수준으로 판가름난다. 모두가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경제적인 성취를 위해 멈추지 않고 열심히 달려 나간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기술이 진보하고 물질은 넘쳐나는 수준이 되었지만, 빈부격차는 해결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전보다 불행해졌다. ‘당신의 삶은 풍요로운가?’ 라는 질문에 몇이나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최근에는 이렇게 묻는 책도 나왔다, “가질수록 왜 행복은 줄어드는가?”
아마 은연중에 누군가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우리 사회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뭔 일이 날 것 같은데. 그러나 멈추기는 쉽지 않다. 모두가 달려가고 있는 이 때 혼자서 멈추어 서기에는 외롭고, 또 함께 멈추자고 옆 사람들을 불러 세우기에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멈춤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굉장한 책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남들에게 함께 멈추자고 말하는 것에는 그보다도 많은 책임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어쩌면 그 큰 책임을 기꺼이 껴안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읽으며 새롭게도 혁명은 사람 하나, 하나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난 한 활동가는 얼마 전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도시에서 일만 하고 살던 사람들이 일제히 사표를 내고, 자진해서 가난하게 일하며 먹고 살겠다고 농촌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해봐요. 와! 진짜.”/p>
그분의 말을 들으며 나는 몇 달 전 트위터에서 김여진 씨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대학 가든 안가든 아무 문제없는 세상. 꿈꾸는 “운동”은 어느 한 해, 단 한 명도 대학에 지원 않는 것(당황하겠지?)”
한 직장인이 직장을 때려지우는 것이나 한 고등학생이 대학 수능을 거부하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 고민을 계속한다. 모두가 수십 번, 수백 번 일탈을 꿈꾸지만 행동에 옮기는 이는 극소수다.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단 한 명의 일탈일지라도 그 사람이 지나 왔을 수많은 고민의 흔적들을 본다면, 그 행동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고민을 거쳐 나온 행동은 군중이라는 떼 집단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니다. 또한 폭력적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혁명도 아니며, 오히려 내가 가진 별 것 아닌 것조차 내려놓는 혁명이다. 아주 약해 보이는 그 행동은, 견고하게만 보였던 구조를 깨뜨리는 균열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혁명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균열은 비록 많은 이들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지라도, 각자의 행동을 자신이 책임진다는 점에서 숭고함이 있으며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적인 결심까지도 포함한다.
나는 최근 들어 이렇게 새로운 혁명에 대한 상상이야 말로 이 시대에 맞는 혁명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이 말하는 혁명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한명 한명의 사람들에서 우러나오는 진심만이 그들을 행동으로 이끌 수 있고, 나아가 그들이 행한 작은 실천들이 모여야만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그 혁명의 수단은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이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책에서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할 의미가 있다, 계속하면 그 가운데 효과가 나타난다.”고 말한 바 있다.
운동은 힘이 든다. 끈기가 없다면 운동은 어떠한 것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대안적인 삶을 상상하는 것은 힘겹다. 왜냐면 그것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반기를 들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자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왜냐면 이 세상이 너무도 거대하며 동시에 견고해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몽상가가 되고, 지금의 상황을 계속 유지할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현실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더글러스 러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꿈꾸는 자들이야 말로 현실을 바로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남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비교하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를 불행하게 할 것을, 부동산과 주식을 통한 재테크가 우리가 바라는 삶의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임을 우리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다. 핵에너지의 당장의 편리함 뒤로는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재앙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지금처럼 환경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않다가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환경’이란 것이 남아 있지 않을 것 또한 은연중에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눈에 보이는 진실들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현실을 바로 보는 데에는 막대한 책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는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현실을 바꾸거나 현실에 맞추어 스스로가 변하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민의 짐을 덜어주기 때문에 후자를 택한다. 그러나 그때부터 사람들의 살아 움직이던 감각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거세당하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감각들로 그 버거운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어야만 절망적인 상황을 바꿔보자고 말할 수 있으며, 나아가 다른 것을 꿈꾸자고 감히 제안할 수 있다.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고 끊임없이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받지만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듣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중하지만 나는 여리고 약한 목소리일 수록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글러스 러미스의 이야기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진정한 진보란 물질의 진보가 아닌 인간의 진보이며,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의 능력이며, 인간들의 문화며, 가치며, 삶이다.
내가 꿈꾸는 세상 또한 그의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각자가 의미를 찾는 일을 선택하여 살아간다. 그리하여 일상의 노동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맛본다. 내가 살아있음에 전율하고 너와 함께함에 즐거워한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배움의 즐거움을 맛보고 사회가 정해주는 기준이 아닌 내가 스스로 세운 기준에 맞줘 살아가는 행복을 느낀다. 그 사회에서의 풍요로움이란 다름 아닌 사람들 마음의 풍요로움이고 관계의 풍요로움이다. 그 세상에는 가난한 나라도 부유한 나라도, 선진국도 후진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 나라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국경이란 것도 사실상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당연히 군대 또한 존재할 필요가 없다. 개인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존중과 배려, 이해는 국가들 사이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 세계의 가치는 평화다.
말 그대로 ‘꿈’인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누군가는 내게, 이토록 혹독한 현실에서 꿈꾸는 것 이 도대제 무엇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더글러스 러미스의 말저럼 “세계가 변하지 않아도 내 자신이 자유롭게 된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충돌할 것을 안다면 지금 당장 멈주어 설 줄 아는 지혜, 모두가 괜찮을 거라며 눈을 가리고 있을 때 용감하게 안대를 벗어 눈을 뜨고 현실을 바라볼 줄 아는 용기. 비록 나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은 소수일 지라도 언젠가는 더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함으로써 세상의 ‘상식’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나는 가지고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되묻던 질문이었다. 그 물음은 아마 아주 오래도록 나를 붙잡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흔들린다. 다시 안대를 덮어버리고 싶은, 내 손을 잡고 있는 이의 손을 놓고 도망지고 싶은 두려움. 그러나 이런 나를 다시 잡아끄는 것은 아마도 깻잎과 상추 같은 것들이 아닐까 싶다. 비가 오는 날 사무실 텃밭에 나가 그 살아있는 것들이 비를 맞으며 줄렁이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그들이 또 다시 온몸으로 비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 그것은 아름다웠지만 눈물겨웠다. 그들을 따서 입으로 넣을 때에 나는 푸른 생명들이 품고 있을 무수한 순간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여린 것들을 키워낸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 사람들이 겪어온 순간들을, 그 순간들 덕분에 내 곁에 그들이 있을 수 있음을.
고등학교 3학년에 이 책을 처음 읽었고, 대학 수시 자기소개서에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책 중 하나로 이 책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 대학에 입학한 이후 3년 동안 이 책을 잊고 살았다. 4년 전 그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쳐 둔 밑줄의 부분과 이번에 치게 된 밑줄이 부분이 상당히 다른 것을 보면 그동안 나는 많이 변한 것 같다. 수많은 순간들을 겪었고, 그 사이에서 때때로의 슬픔과 또 때때로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왔다. 이 책을 다시 집어 들게 된 것은 사무실 벽면에 붙어 있던 포스터의 상금 때문이었다. 상금을 타서 지금 일하고 있는 시민단체의 사람들에게 피자를 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별 것 없고 우스운 응모 이유다. 나는 요새 소소한 기쁨과 깊은 절망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다. 상추와 깻잎을 보며 환하게 웃다가도 고엽제와 4대강 소식에 금세 어깨가 무거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풍요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대는 어떠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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