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일반부_본선진출작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경기대학교 유지영


매미는 지금도 울고 있다. 매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매미의 모습으로 2주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매미는 해마다 베란다 창의 방충망에 앉아 쉬어가곤 했다. 그래서 나는 혹시 같은 매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기에 매년 같은 곳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매미를 매년 관찰하면서도 매미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어렸을 적, 하루는 할머니께서 매미를 잡아주셨다. 매미는 실을 통해 나와 연결돼 있었다. 아마 매미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나는 매미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고, 흥미를 느끼기도 한 것 같다. 파드득하고 날던 매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나는 매미를 창과 창 사이의 방충망에 놓았다. 바람이 통하는 그곳이 나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리고 매미의 날갯짓은 점점 약해져만 갔다. 책 속의 한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매미 혹은 수많은 동식물, 더 나아가 세상살이의 많은 정보는 “모두 신문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과 같은 정보화 시대엔 ‘인터넷’을 통해 더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의 독자로 자신이 상상하는 리스트를 작성해 놓았다. 그 중 나는 네 가지에 속한다. 첫째, ‘경제(구체적으로, 앞으로의 취직)’하는 요소가 자신의 교육의 자유에 장애물이 되어있다고 느끼는 학생. 둘째, 전쟁을 체험한 바는 없지만, 앞으로도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젊은이, 셋째, 세계의 자연계가 사멸을 계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염려하고 슬퍼하고 있는 사람. 넷째,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이렇게 네 가지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 저자가 리스트에 적어놓은 그리고 그 중 해당 사항을 체크해볼 독자들은 현재 불안을 느끼고 있는 현대인이다. 특히, 마지막 항목인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현대인의 불안’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 불안하다. 하지만, 이 불안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수많은 이유 혹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온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시인의 시처럼,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이, 우는 손을 갖게 된 것이 오래전 잡고 놓아주지 못했던 한 마리의 매미 때문이라면, 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내가 깨닫게 된 잘못 때문이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때 그 매미를 놓아주는 상상을 해본다.

나는 성장해왔다. 그것은 분명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온몸은 성장해갔다. 그 성장으로 인해 때로는 아팠지만, 덕분에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나의 성장을 도와준 부모님 역시 나와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나는 성숙해왔다. 경험 덕분이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이동하고, 정착하며 나는 성숙해졌다. 황석영의 최근작인 『낯익은 세상』에도 한 인물의 이러한 성장이 그려진다. ‘딱부리’라는 인물을 그려내는 것이다. 소설의 앞부분에는 다른 인물이 딱부리에게 나이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딱부리는 열네 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이를 묻던 인물은 이내 다른 사람이 묻거든 열여섯 살로 말하라고 한다. 나는 이 장면이 소설의 중요 장면으로 여겨졌다. 열여섯 하면, 나는 이팔청춘(二八靑春)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직 열네 살에 불과한 한 소년을 어른은 열여섯, 청춘의 나이로 만들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노동’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딱부리는 어머니와 함께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마을로 이사 가게 된다. ‘꽃섬’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이름과는 달리 더러운 쓰레기로 넘쳐나고, 쓰레기로 돈벌이 하는 거친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곳에 딱부리라는 인물은 적응해야 했다. 그래야만 그는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은 때로는 냉혹하기만 하다. 그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야지만,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의 세상일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은 또한 한없이 아름답다.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는 지금까지의 기록과는 다른 역사적 사실을 하나 말한다. 유럽인이 와서 가게를 열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돌아다 보지도 않았다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 년 내내 일할 만큼 갖고 싶은 물건이 그들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서양인이 서양경제의 좋은 점을 말하면, 많은 사람이 “아아, 이제까지 우리는 잘못돼 있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즉, 누가, 어떻게 ‘기록’ 하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 게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어떻게 쓰였는가에 따라, 그 의미의 쓰임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 기록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낼 수밖에 없는 독자에게는 저자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목적이나 의도대로 그 의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글이라는 정보를 통해 소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에겐 주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모두 신문(매체)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을 전적으로 긍정적으로만 생각했었다. 사람을 인재라고 칭하는 말에서 거부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말의 의미는 좋은 의미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학생인 신분인 나에게, “노는 것은 죄”라는 죄책감을 갖게 하는 현실이 달갑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고2 학생들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들은 장맛비를 맞으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고3이 되면 놀지 못할 테니까 라고. 고3이 되면 놀지 못하는 현실. 하지만, 비단 고3만이 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배움에는 한정을 짓지 않지만, 휴식에는 제한을 두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오늘이지 않은가. 우리는 휴가 역시 일 년에 한 번이라는 제한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암묵적으로 따르고 있다. 누군가 무언가를 만들고, 정하면 다수가 그것을 따르고만 있다. 불만을 느끼고, 불안해하지만 대부분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오랜 친구가 있다. 항상 상위권의 학생이었다. 그리고 소위 들으면 알만한 좋은 대학에 갔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처음 만났던 열네 살부터 그 친구는 항상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학원에 다니고 과외를 했다. 며칠 전에 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여전히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녀는 늘 초급반을 다닌다. 그것은 아마 ‘불안’ 때문일 것이다. 늘 학생 신분이었던 우리는 늘 현재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늘 처음부터, 초급반을 선택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럴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현재 우리 학생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 아닌, 배워야만 하는 학생 말이다. 동네 도서관에 가면, 늦은 밤을 제외하고는 늘 만원인 상태다. 몇 년 전, 처음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그 모습이 좋게만 느껴졌다. 아, 모두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남녀노소 불문하고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언젠가부터 작은 우울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회사 일을 끝마치고 도서관에 와 늦은 시간까지 그 자리를 지켜내는 그 사람이 그 모습에서는 ‘열정’이나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들은 지쳐있을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제까지나 쉼 없이 그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또 다른 이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서로 슬퍼했을 것이다. 정말, 이러한 삶을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딱부리는 쓰레기 더미 마을로 이동했고 정착했으며, 새로운 가족을 만났으며 헤어졌다. 그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성장했고, 성숙해져 갔다. 인간의 삶은 대게 이러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삶을 아우르고 있는 자연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 사실이다. 자연은 본래 그곳에 있다. 물론, 언제나 ‘여기’에 있다.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지금 저 밖에서 울고 있는 매미처럼. 하지만, 우리는 늘 그것 역시 변화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푸름을 훼손시키고, 그 푸름을 되찾기 위해 때로는 인위적인 자연을 만들려 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을 위해가 아닌, 오직 사람을 위해 힘쓰고 있지 않은가. 도로 옆에 식물이 심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것들의 푸름을 꿈꿨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모두 죽어갔다. 도로 옆에 작은 식물을 심을 생각했던 누군가도, 그것들을 심던 누군가도, 그것들을 지켜보던 누군가도 푸름을 꿈꾸지 않았을까. 하지만, 도로 옆 식물들은 꽃을 피워내지 못했다. 그러자, 처음부터 그 일은 무리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이다. 그것들을 피워낼 방법을. 2008년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폐기물을 바다에 버린 대한민국. 방사능 문제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 꿀벌 실종을 맞이한 지구촌. 우리에게 현재가 위기인 것은 분명하다. 왜 우리는 그 위기를 해결할 방법으로 자연이 아닌 기술만을 떠올리는 것일까. 정말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왕가리 마타이는 땔감과 식수를 얻기 위해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야만 하는 여자들인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기술이 아닌 자연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과 자연을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 생물학자와 기자는 각각 알려지지 않았던 반딧불이와 호사도요의 서식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과거에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했었다. 발견했고, 알렸고, 그것들은 멸종되어 갔다.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 나와있는 것과 같이 현재 우리의 동식물들은 우리가 그것을 알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일일 것이다. 알고 있지만, 우리는 무뎌져만 가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이 제시될 때마다 우리는 경악했다. 하지만, 곧 무뎌졌다. 아프리카 아이들의 눈물을 보며 함께 울었지만, 곧 우리는 괜찮아졌다. 우리는 슬펐지만, 더 강한 자극을 주지 않는 이상 우리의 감정을 추스릴 수 있었다.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슬퍼하면서,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이 한정적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달랜 것이다. 생물학자와 기자는 반딧불이와 호사도요가 살고 잇는 그곳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신문에 실렸던 그곳은 엉뚱한 곳이었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그들을, 자연을, 우리를 지켜낸 것이다. 정말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계속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자연이 그리워 병들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것일까. 내가 지금 우는 손을 갖게 된 것은 어렸을 적, 내가 놓아주지 않았던 그 매미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거대한 음모와 계획이 아닌, 어렸을 적의 실수, 지금 내가 뉘우치고 있는 그 일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자연을 생각하는, 자연 속 우리를 생각하는 왕가리 마타이, 생물학자와 기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그들로 인해 되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지금 힘써야 할 것은 개인의 능력 향상이 아닐 것이다. 자연의 자생 능력이 충분히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연 속에서 풍요로운 삶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지금의 위기감, 불안함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현대 건축물은 인간의 집중을 방해하고 조급증을 느끼게 하는 성분이 사용된다고 한다. 그 조급증을 떨쳐내기 위해서 우리는 기술이 아닌 자연을 택해야 할 것이다. 개인이 아닌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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