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거울상, 더글러스 러미스
일반부_꾸구리상
대한민국의 거울상, 더글러스 러미스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정혜경
트루먼쇼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트루먼은 미국의 평범한 샐러리맨 입니다. 그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직장과 가정에서 맡은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인물입니다. 모범적이고 안정적인 인물을 대표하죠.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 되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하늘에서 촬영용 조명등이 뚝 떨어지거나, 죽은 줄로만 알았떤 아버지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아버지가 끌려가는 등의 일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대학 시절의 첫사랑인 실비아라는 여인에게서 들은 ‘모든 것이 다 거짓이다.’라는 말을 기억해 내고 진실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한 사람의 일생 전부를 ‘쇼’로 만들어 방영하는 프로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전 세계의 시청자들이 그의 모든 인생을 티브이를 통해 알 수 있고, 그 자신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세트장에서 타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지요. 결국 물을 무서워하는 트라우마를 극복한 뒤 바다를 건너간 그는 ‘진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트루먼은 망설임 없이 진정한 자유를 찾아 문을 열고 나갑니다.
저는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 할 것인가’라는 책을 읽은 뒤 그 동안의 제 자신이 트루먼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입맛대로 꾸며 놓은 영화 세트장을 진짜 현실이라 생각하고 그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태평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말이에요.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이들은 모두 트루먼과 같은 처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 앞에 주어진 사실들을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이 ‘현실’이라 생각했던 것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 원인 모를 두려움에 떤다는 점에서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이나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진실을 알게 된 뒤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삶보다 낫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이 속담은 진실을 바라볼 용기가 없는 이들이 스스로를 정당화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속담이 아닐까요. 더글러스 러미스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는 일입니다. 그는 ‘모르는 건 약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우리 눈 앞을 뿌옇게 흐리는 장막을 거두고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제껏 우리가 보아오고 믿어오던 것들과 너무나 달라서 오히려 거짓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적나라한 현실을요. 그는 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속성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며 그 논리들의 허점을 공격합니다.
우선 그는 국가가 군사력을 독점해야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우리는 보통 전쟁을 막고 민주적인 사회를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형 포털사이트의 메인 화면에 걸린 군사 관련 뉴스의 댓글에는 이런 주장들이 흔히 등장합니다. 중립과 평화를 내세우는 스위스에서 조차 군사력 증강을 위해 힘쓴다, 우리가 군사적으로 강대해 지지 않으면 또 다시 식민지 국가가 될 것이다 등등. 하지만 그 중 어느 누구도 국가의 군사력 독점에 의해 자행된 대량 학살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연쇄살인범 하나가 부녀자들을 수 십 명 죽인 소식에는 광적인 분노를 보이면서, 한 도시의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학살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시민들이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로 이데올로기를 꼽았습니다. 이데올로기란 넓은 의미로는 신념체계나 가치관 체계를 뜻합니다. 하나의 국가에 널리 퍼질 정도로 거대한 사상이지요. 이데로로기의 영향으로 인해 사람들은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현대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중에는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독점한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으로 이 사회에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국가에 의한 시민들의 살해를 목격하고도 그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 하지요.
또한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발전이라는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명제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합니다. ‘우리는 경제 성장을 하지 않으면 살갈 수 없다’는 생각 역시 이데올로기라는 것 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과학과 같이 객관적인 진실이라 여겨왔던 명제가 ‘이데올로기’였다니. 제가 이런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절대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닐까요. 더글러스 러미스는 더불어 경제성장이 반드시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 풍요만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저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이런 주장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더 많은 물질과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고속철도와도 같습니다.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최고의 덕담이고 서점마다 재테크 관련 서적이 쏟아집니다. 대중들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드라마라는 매체에서는 늘 재벌들의 화려한 삶이 비춰집니다. 이런 사회에서 20여 년 간 살아 온 저 역시 그 광적인 집착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 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소득을 위해 더 높은 대학에 가려 공부하고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영어공부를 하고 학점 관리를 하며 제 자신의 ‘몸값’을 높였습니다. 저에겐 오직 높은 소득과 부유한 삶이라는 한 가지 길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다른 길’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일일 것입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우리가 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해 줍니다. 그는 무제한적인 경제성장 말고 ‘대항발전’ 등의 방법으로도 인류가 생존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대항발전이란 물건을 조금씩 줄여 나가면서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비슷한 마음가짐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매우 공감합니다. 지금 제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 중에는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광고에 혹해 충동적으로 구매한 물건들이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쓰이는 자원을 아끼기만 해도 우리는 한정된 자원으로 충분히 생존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무조건적인 경제성장에 인생을 바치지 않아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경제성장만이 인류의 절대적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최소한의 생존마저 위험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인류의 무조건적인 경제발전 추구는 환경파괴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완전한 통제라는 관념은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이후부터 계속 존재했던 환상이었습니다. 물론 전근대적인 사회에서도 인간은 자연과 맞서 싸웠지만 이는 자연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생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인간은 자연 법칙을 규명하고 이를 관리할 수 있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통해 자연을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지배를 통해 인간은 경제 발전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였지요. 근대 과학기술은 자연의 지배를 통해 자본 축적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장을 만든 것입니다. 그 결과 자연은 가속적으로 파괴되고 그 피해는 부메랑처럼 다시 인간 사회에 되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올해 3월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유출 사고 입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그의 저작에서 우려를 표했던 일이 마침내 실현된 것 입니다. 원자력은 그동안 깨끗한 대체 에너지, 늘어나는 에너지 소비를 지탱해 줄 구원의 투수와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가에서는 원자력 발전소를 세울 지역에 막대한 자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홍보도 빼놓지 않았구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은 현실 부적응자, 극성스런 환경 주의자라는 등의 비난을 받아와야만 했습니다. 시대의 흐름,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무언가에 역행하려는 반동분자 취급을 받았지요. 그들의 문제제기는 정당했지만 말입니다. 이런 의견은 무시하고 에너지 절약과 효율 향상은 뒷전에 놓은 채 무조건적으로 전력 공급을 늘리려던 일본 정부의 시도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주민들은 방사능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등져야 했고, 원전 사고 처리 과정에서 수소 폭발이 일어나 수 십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또한 몇 십 년에 걸쳐 몸을 좀먹어가는 방사능에 대한 공포가 전 국민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성장과 공급 중심의 기존 이데올로기를 고수해 온 인간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었습니다.
일본의 이런 사례는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립니다. 대한민국의 원자력 정책은 일본과 매우 유사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원전 비중을 2030년까지 전체 에너지의 59%까지 높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지난 해에는 2030년까지 전 세계에 430개 신규 핵발전소가 건설된다는 예측과 그 가운데 20%를 한국이 수주하는 계획도 내놓았습니다. 에너지 공급 증대에만 힘쓰는 대한민국 정부를 보며 우리 사회가 그 어떤 사회보다도 더글러스 러미스의 충고를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장 중심의 이데올로기는 비단 에너지 사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제 정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서구의 개발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내면화 하였습니다. 산을 깎아내고 바다를 메우며 열심히 자연을 조작하고 이를 통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규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아직도 ‘자연 조작을 통한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4대강 사업이 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정책일 것입니다. 4대강은 파괴되고 오염된 하천의 이미지를 가지지만 동시에 완전성을 구현할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맑고 깨끗했던 4대강이 지금은 심각하게 오염되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입해 최우선으로 정화될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완전히 지배될 때 가장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이런 자연지배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동반합니다. 정부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통해 34만 명의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 말하고 관광업을 통한 지역 경제의 부흥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4대강 사업을 추진한지 어언 2년이 지난 지금, 이 사업은 방사능 유출에 맞먹는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올해의 장맛비는 통상적인 수준의 강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홍수피해 사례가 하나하나 모두 심각합니다. 낙동강변에는 모래섬이 생겨났고, 합천보 인근의 생태 공원은 비에 휩쓸려 나갔습니다. 구미에서는 4대강 사업 때문에 새로 설치한 횡단관로가 유실되어 며칠동안 단수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성주에서는 무너진 준설토로 인해 빗물이 역류해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생태계 파괴도 심각하여 남생이와 미호종개, 돌상어 등의 생물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는 모두 더 많은 이윤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에 의해 생겨난 인재입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주장이 그저 공허한 외침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우려는 모두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이웃나라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제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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