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잘’되면 우리는 풍요로울 것인가

일반부_꾸구리상

경제성장이 ‘잘’되면 우리는 풍요로울 것인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시현


대학원 진학 후 첫 방학을 여유롭게 지내다가 연구실에 들렀던 어느 날 복도에 게시된 녹색 바탕의 큰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환경독후감 대회’. 사실 대자보를 보고 처음 생각한 것은 ‘대학원생도 독후감을 쓰나? 서평이 아니고?’였다. 하지만 독후감 대회에 대한 세부내용을 확인한 후 내가 지난 학기동안 배우고 연구했던 내용을 되집어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가치있는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갖고 책을 접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책 제목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경제성장’은 정확히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하며 ‘풍요’롭지 못하다는 것은 어떤 요소가 부족하다는 것인지에 대한 나만의 정확한 잣대를 세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에 제목과 목차만을 보고 개략적인 책의 내용과 저자의 의도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는 있었으나 책을 읽은 후에 느끼는 생각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저자에게 역으로 묻고 싶은 질문이 바로 ‘그렇다면 경제성장이 잘되면 우리는 풍요로울 수 있을까?’였다.

「풍요」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사용하기에 충분이 넉넉함’이며, 「경제성장」은 ‘국민 소득·국민 총생산과 같은 국민 경제의 기본적 지표가 시간적 경과와 더불어 상승하는 일’로 개념적 정리가 된다. 쉽게 생각하면 경제성장과 풍요는 깊숙한 상관관계처럼 느껴지며 당연한 논리라고 여겨질지 모르나 사실 우리는 놓치기 쉬운 함정이 빠지고 있다. 인간이 유전을 발견하면서 넘쳐나는 석유가 그 나라와 특정 개인을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석유관련 산업과 인류혁명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었지만 수많은 전문가들의 예견처럼 석유정점(Oil peak)을 지나면서 인류생존의 위험까지 논란이 되고 있으며 대체에너지 발견에 혈안이 되어 수많은 시행착오를 만들어 내고 있는 현실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음료수가 가득 차 있는 팩에 빨대를 꽂으면 처음에는 음료수가 쏟아 넘치지만 나중에는 인위적으로 빨아야 나오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가 뿌리깊게 퍼지면서 인간 스스로 어떠한 멍에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겸허하게, 그렇지만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죄근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일반인들도 ‘기후변화’라는 말을 쉽게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도 대학원 진학 전에는 단순히 환경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정도로 환경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지고 분석적으로 문제를 곱씹으며 연구하는 습관이 생겨 나름의 잣대를 세우고 판단하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기후변화와 경제성장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함인데, 올 여름 중부지방을 강타한 폭우로 서울 우면산 산사태가 ‘자연재해’가 아닌 과도한 개발로 인한 ‘인재’라는 분석결과가 이를 대신한다. 직접적 피해를 입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해당 아파트 고증에 사는 주민들은 하루하루 불안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경제성장에 따른 또 다른 경로를 통한 피해로 생존권까지 보장받지 못할 상황에 처한 것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경제성장은 의미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무절제한 개발을 일삼는 지방자지단체나 정부에 대한 불신만 커질 뿐이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경제성장을 통해 소비문화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 극단적인 경제구조의 산업사회, 즉 자본주의의 결정체이며 자본은 노동의 잉여금을 포함한 또 다른 자본을 낳는다. 자본은 결국 상품을 소비하므로써 추가적인 노동을 가능케하였고 더 많은 잉여금을 만들기 위해 자원을 낭비하여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파는 행위를 반복한다. 실제로 ‘성장의 한계론에서는 인구·식량생산·산업화·환경오염·재생 불가능한 자연 자원의 고갈이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지수적 증가(Exponential growth)를 통해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장(growth)이란 GNP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 대중적인 경제학자들의 생각이며 지극히 국가자원의 생각일 뿐 개인적인 모델을 적용했을 때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모든 것은 국가 자원의 문제이지 결코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행복’이란 개념을 적용했을 때는 더더욱 별개의 문제로 생각될 수 있다. 마치 서울에서 정원있는 집에 사는 사람과 지방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의 행복지수가 반드시 경제적 여건만을 가지고 비교할 수 없는 것저럼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가 죄근 몇 십년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행복지수는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매일 아침 스마트 TV로 뉴스를 보고 스타벅스 커피숍에서 모닝커피를 마신 후 고층빌딩 속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업무를 마무리하고 저녁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가족들과 스테이크를 먹는 것이 요즘 우리가 느끼는 진정한 풍요로움일까! 반면에, 계속되는 경제불황으로 언제라도 정리해고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직장상사와 능력있는 후배들 사이에서 매일 눈치보며 막연한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과연 풍요롭지 못한 모습인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 산업성장의 대부분은 인구 성장률이 낮은 선진국가에서 이뤄졌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중국과 인도 등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개도국 위주의 경제성장이 이뤄지고 있어 소비문화를 족진시키고 있다. 근대화론적 입장에서는 선진국의 과거를 개도국이 그대로 따르게 되면 선진국의 풍요를 가질 수 있다는 이론으로 편리를 추구하고 소비문화를 지향했으나 경제성장과 소비는 이제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기업형 농장과 육식문화의 세계화 그리고 국경을 없애고 있는 각종 문화들은 지엽적인 소비문화를 세계화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하여 소비를 증폭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茶(차)문화의 중국이 커피와 햄버거 등의 패스트푸드 소비량이 급증하고 있는 현상으로 이러한 현실은 도약을 위한 발전기와 성숙기를 거져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의 선진국 형태를 따라감으로서 자연스럽게 경제 강대국이 된다는 허영심의 결과물일 것이다. 비단 ‘성장’은 단순히 몸집이 커지는 현상으로, 성숙은 정신적인 성장을 의미한다면 조금은 아쉬운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경제성장과 소비문화는 결국 자연을 파괴하게 되고 인간 스스로를 멸망에 이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오눌날 새로운 소비문화와 과학기술의 결과물로 신제품이 쏟아질 때 사라져가는 생태계 구성원들을 고려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경제계가 생태계에 포함된 특정범주의 결과물로서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때 인간은 생태계에 어울려 공존할 수 있으나 인간의 과도한 욕심은 경제계를 벗어나 자연을 포함한 생태계 존재 자제를 부정하고 지배하려는 속성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현재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인은 대략 70억명이며 이들이 미국의 생활습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현재의 지구가 7개가 필요하다는 가설이 있으며, 경제성장을 위한 무분별한 개발과 도시화로 인해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고 산업화로 인한 탄소배출량은 매년 증가하여 지구온난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저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경제성장과 자연환경파괴를 순차적이고 상호 피드백 관계로 정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로 이상의 경제성장은 소비문화를 촉진하고 자원을 낭비하며 발전을 통한 자연훼손을 심각한 오염을 유발하여 결코 빈곤은 해소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고 있다. 물론 전체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지만 한 세기를 뒤돌아본다면 단기간에 이룩한 발전과 경제성장은 이제 우리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준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다소 아쉬운 것은 경제성장에 따른 환경파괴와 환경보전의 영역을 구분하여 개념을 정립하고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원자력에 대한 것으로 놀랍게도 저자는 10여년 전에 집필한 이 책에서도 일본의 원자력에 대한 사고 가능성을 논하고 있으며 이와 연관하여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은 그야말로 경제대국의 지표로 삼을 만큼 경제선진국에 반드시 필요한 첨단 기술중의 하나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손가락에 꼽을 만큼 소수의 나라만이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또한 원자력 대국으로 불리면서 안전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나 그 오만은 강도 9.0의 지진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으며 대국민 신뢰는 물론 경제대국이라는 말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일본 도쿄대 고마다 다쓰히코 교수가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방사선이 히로시마 원폭때의 29개분량’이라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했듯이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일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인간과 자연에 피해를 주었고 원전사고 이후 일본 사람들의 원자력에 대한 인식변화는 물론 자국의 경제발전의 척도가 되는 원자력 발전 기술에 대한 부정적 사고가 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에서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고리원전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가며 동시에 경주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저분시설에 대한 부지선정문제도 지역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큰 난항을 겪었다. 2005년 경주가 최종 방폐장설치 지역으로 선정되기까지는 경주시민의 자발적인 노력과 뒷받침되었지만 엄정난 예산의 인센티브를 받기 위함이었으며 이러한 예산을 통해 경주지역의 엄청난 경제발전을 기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유치이후 주민들에게 피부로 와닿는 경제적 이득이 거의 없으며 원자력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점점 유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 것이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는 반핵감정이 더 심화되어 불안한 하루를 지내고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독일은 우리나라보다 더 범국민적이며 체계적으로 반핵운동을 펼쳤으며 그 결과 2022년까지 원자력을 완전히 폐쇄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독일 국민들은 원자력을 통한 경제성장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토록 열성적으로 반핵운동을 펼쳤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의 경제발전이 불필요한 만큼 충분히 모든 국민들이 풍요로워서일까? 아마도 그들은 구소련의 체르노빌과 일본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를 간접적으로 겪으면서 원자력을 통한 경제성장은 머지않아 그들에게 풍요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며 후세를 생각한다면 진정한 행복과 풍요가 어떤 방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지를 깨달았는지 모른다.

원자력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는 경제성장과 환경문제의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제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환경파괴는 피할 수 없는 걸림돌이 되버린듯 하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우는 브라질 아마존 밀림의 불법 벌목을 막기 위한 브라질 환경론자둘의 운동은 계속됐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희생이었으며 지난 20여년간 환경운동을 하다가 살해된 사람이 1,150여명이라는 것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경제 성장과 환경파괴는 별개의 개념으로 정립될 수 없으며 또한 많은 학자들이 경제성장에 있어서 분배의 어려움에 대한 주장을 한다 선진국의 발전을 위해 개도국과 후진국의 자원과 노동을 이용하고 자국내의 탄소배출 및 환경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장의 부지를 해외에 설치하는 등 환경보전 명목하에 저개발 국가를 훼손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개발과 발전을 기대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환경오염과 공유지 훼손 그리고 공동체 파괴에 따른 선진국으로 흡수가 전부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미개발이 진정한 풍요로움으로 남을 수 있기도 하다.

이렇듯 선진국은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의 발달로 그렇지 못한 나라들에 대해 생태적 빛(Ecological debt)을 지고 있다. 부자들은 소수의 인원이 과소비를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그 수가 너무 많으며 상대적으로 너무 갖지 못하는 이유로 동전의 양면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선진국의 엄청난 소비문화에 비해 개도국의 부패와 내전에 따르는 고통은 쉽게 잊혀질 수 없는 현실이며 이러한 나라들은 2·3차 산업의 발달보다는 무한하다고 믿는 자원을 팔 생각만 하기 때문에 장기간 시간을 고려한다면 정직한 발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풍부한 유전을 보유한 중동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석유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경제성장을 통해 풍요를 즐기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며 이 또한 다른 산업의 투자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풍요속의 빈곤이 되풀이되고 있다.

최근 계속되는 경제불황은 우리를 풍요롭지 못하게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아니, 그 풍요라는 것이 행복과 바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엄정난 경제성장으로 국가브랜드는 상승하고 있지만 여전히 최저임금을 받으며 기초적인 생활권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 서울에서도 살아가고 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 특히 대학생과 취직준비중인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 ‘3포세대’라고 하여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들의 한 세대 전인 우리 아버지 세대들도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각박하고 여유없이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았을까? GNP는 상승했지만 그때와 비교했을때 지금 젊은이들은 풍요롭고 행복하며 지금의 경제성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반대로 아버지 세대들은 지금과 비교해서 못 먹고 가난했지만 더 불행하고 풍요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을까?

언제부터 우리가 풍요롭게 살기를 바랬는지, 냉장고가 가득차 있고 내 방에 신제품들이 가득차 있으면 행복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한 것인지 이 책을 통해 진정성있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최근 歸農(귀농)현상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잘나가던 대기업 회사원이 불현듯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 대부분의 귀농인들은 하나같이 ‘도시생활의 찌들은 경쟁이 삶을 피로하게 했으며 여유를 잦고 진정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경제력(money)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며 진정한 풍요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더글러스 러미스의 말저럼 우리의 ‘상식’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아니 결정적 인 시점을 지나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능력을 벗어난 소비를 즐기고 남을 의식하여 허세를 부리는 그런 삶, 무조건적인 발전(성장)을 위해 더 소중한 자연을 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자. 이 시대에 또 한번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같은 sensational한 책이 나왔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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