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 풍요로운 제로성장의 배로 환승하기
일반부_꾸구리상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
풍요로운 제로성장의 배로 환승하기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이대한
얼마 전 인디밴드 눈뜨고코베인의 앨범 중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라는 노래를 듣게 됐다. 가사는 이랬다. <아주머니는 배를 타고서 저 먼 바다로 나가시네/ 눈이 불편한 아저씨가 말리는 걸 듣지 않고/ 내가 간밤에 꾼 무서운 꿈 웃으면서 넘기시네/ 이번에 잘 되면 한동안 우린 같이 있을 수 있다 하시네// 하지만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
구슬픈 멜로디와 함께 내 귀로 흘러들어온 이 노래는 바로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졌다. 노을진 부둣가에 아주머니가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닻을 올리고 있고, 눈이 먼 아저씨가 무기력하게 그 아주머니를 말리는 모습. 그 옆에서 간밤에 꾼 무서운 꿈을 걱정스레 얘기하는 한 아이. 그 걱정을 아이의 것으로 치부하고 다 잘 될 거라며 떠날 채비를 더욱 다지는 아주머니. 멀리서 그 배와 그 배에 실린 유보된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깊은 어둠.
이 풍경은 매우 낯익은 풍경이다. 부둣가의 환영은 이옥고 정규직 채용을 위해 아이들이 기다려온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하는 가장의 현관으로, 뉴타운에서 자기 집에 대한 권리를 넘기는 이의 재건축 조합 사무소로, 4대강 사업에 차출돼 먼 지방으로 출장가는 중 장비 기사의 주차장으로, 평생 모은 쌈짓돈으로 후순위 채권을 구입하는 할머니의 저축은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풍경들은 잠깐 잊고 지냈던 한 책과 기억들을 호출했다.
타이타닉에서 만난 눈뜨고코베인과 더글러스 러미스
내가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만난 것은 작년 여름, 낙동강이었다. 나는 그 때 안동에서부터 부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걷고 있었다. 땡볕을 피해 오두막에 드러누워 쉬고 있던 중, 함께 도보 순례를 하던 친구 하나가 이 책을 꺼내어 시간 때우기 놀이를 시작했다. 책을 소리 내 읽다가 버벅대면 다음 친구에게 책을 읽도록 하는, 말 그대로 시간 때우기였다. 그것이 이 책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눈뜨고코베인의 노래는 침몰하는 배에서 그 첫 만남과 접속했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역시 이 노래와 마찬가지로 한 배의 침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라 할 수 있는 ‘타이타닉’이다. 러미스는 지금 세계가 타이타닉이며 인류는 타이타닉의 승무원과 승객이라 말한다. 그리고 빙산으로 나아가는 타이타닉호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규정한다.
지금 세계는 거대한 빙산 같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함께 이상기후가 빈번해지고 신종플루 같은 새로운 전염병들이 등장해 인류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전 세계의 산업화와 함께 자원은 급속히 고갈되고 노후 원전과 폐연료봉은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 80년대 본격화한 신자유주의는 금융위기와 이어진 재정위기로 세계경제를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전 세계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절대빈곤은 늘어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안정은 내전과 테러리즘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는 빙산을 향해 달리는 타이타닉 같다.
문제는 타이타닉을 탄 사람들의 태도다. 타이타닉은 침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빙산의 등장은 경고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와 핵문제가 경고된 것저럼. 배를 타고 나가는 엄마를 말리는 아이의 무서운 꿈 얘기처럼. 그러나 아무도 엔진을 멈추지 않았다. 러미스는 그 원인을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기괴한 이름을 붙이며 해설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현실은 ‘타이타닉호’라는 배뿐입니다 … 타이타닉호 속에는 다양한 판에 박은 일상사가 있습니다. 승객의 일, 선원의 일이 있습니다 … 그것을 계속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입니다. 누군가가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비상식, 비현실주의적입니다. 왜냐하면 타이타닉호라는 배는 전진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저마다의 일거리가 없어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진한다는 것이 타이타닉 호의 본질인 것입니다. … 오늘날 세계 전체에 퍼져 있는 현실주의는 그러한 현실주의라고 생각됩 니다(p.17).”
여기서 타이타닉을 ‘자본주의세계’로, 전진을 ‘성장’으로 바꿔 읽으며 문제의 본질이 곧바로 드러난다. 오늘날 지구상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현실은 ‘자본주의세계’ 뿐이며 그것의 본질은 ‘성장’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가능한 현실이며 유일한 현실이라는 자본주의적 현실주의가 팽배하게 퍼져있다. 러미스에 따르면 이러한 자본주의는 이미 “차례차례 빙산에 부딪히기 시작”(p.19) 했다. 그러나 이 배를 멈춰야 한다는 말은 아직 소수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이다.
강요된 성장과 만들어진 빈곤
러미스가 타이타닉호를 통해 던지는 질문은 단도직입적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그는 이 질문으로 ‘풍요=경제성장’이라는 자본주의의 신화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고 있다.
오늘날 한 나라의 풍요도는 흔히 GDP로 환산된다. GDP가 늘어나는 것이 성장이며 곧 발전이다. 비유컨대, 이는 마치 사람을 ‘키’라는 단일한 척도로 평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키가 170cm가 안 된다고 다 큰 어른더러 ‘넌 아직 성장이 덜 됐어’라고 말하거나, 미국인이 한국인보다 평균 키가 더 크다고 한국 사람더러 ‘넌 미국인보다 더 발전해야 돼’라고 말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GDP가 낮으면 ‘넌 발전이 덜 된 나라니 더 발전해야해’라고 말하는 것은 웃음거리는커녕 ‘상식’으로 통한다.
러미스에 따르면 이러한 ‘상식’은 만들어진 것일 뿐더러, 그 역사도 오래되지 않았다. ‘발전’이라는 언어는 1949년 1월 20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취임연설에서 미국과 세계에 대한 발전 계획을 내놓으며 오늘날의 의미를 획득했다. 동시에 세계 지도 위에는 갑자기 ‘미개발 국가(underdevelopment country)’가 등장했다. 한국 역시 그 중 한 나라였다.
이때부터 발전이라는 말은 성장 이데올로기에 전용 당했으며, ‘GDP 증가=경제성장=발전=풍요’라는 신화가 미국에서부터 자본주의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공식은 틀렸고 신화는 사기였다. 경제성장은 발전도, 풍요도 가져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발전이 가져온 것은 풍요가 아니라 빈곤이었다. 러미스는 이반 일리치의 ‘빈곤의 근대화’를 끌어와 이를 설명한다. 근대의 빈곤은 경제발전을 합리화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이다. “빈곤의 차이야말로 경제발전의 기본이자 원동력입니다. 경제발전 이데올로기 속에는 경제발전에 따라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다, 언젠가 세계 모든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대의명분과 같은 게 있었습니다(p.82)”
성장이 전 지구적으로 강조 또는 강요됐음에도 오늘날 마이너스 성장 국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는 모든 나라가 부자나라가 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 지구는 모든 가족이 자동자를 한 대씩 굴릴 석유를 갖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부자(rich)라는 개념 자제가 상대적인 것이다.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다면 돈은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다. 자본은 자기 외의 다른 자본이 성장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욕망하게 해 그것의 힘을 키워왔다. 하지만 성장한 것은 자본 그 자제의 덩치일 뿐 그것을 욕망한 자들의 풍요는 아니었다.
현대사회에서 자본이 빈곤을 재생산해내는 방식은 세련되다. 일리치의 표현을 빌자면 이러한 빈곤은 ‘근원적 독점’에서 비롯된다. 근원적 독점은 ‘기술발달에 따라 새로운 필요가 만들어지고, 거기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빈곤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소득층 가정이 핸드폰 요금에 허덕대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핸드폰 없이 살아가는 것은 너무 불편하며, 이 기술발달은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어 그것에 대한 비용을 요구한다. 이러한 기술을 만드는 것은 부자나라의 거대자본이며, 자본은 온갖 유혹과 압력으로 근원적 독점을 시행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가난한 나라가 부자 나라가 될 길은 좁다. 실제로 자원 부국이 아닌 이상 2차 대전 이후 경제성장을 실제로 이룩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4대강 사업이라는 타이타닉호
한국은 그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한국전쟁 직후 67달러에 불과했던 일인당 GDP는 2만 불이 됐다. 분명 우리네 타이타닉호는 으리으리해졌다. 그와 동시에 타이타닉을 지배하는 타이타닉 현실주의 역시 굳건해졌다. 보혁과 여야도 경제성장의 방법론에 대해 다툴 뿐, 경제성장 그 자제에 대항하는 모습을 찾긴 힘들다. 성장 제일주의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담론이며 오늘날에도 그것은 배척받기 보다는 변형되고 있다. 이른바 지속가능한 성장, 녹색성장, 동반성장 등으로.
성장 신화의 일부가 현실이 되는 동안 한국에는 수많은 타이타닉호가 건조됐다. 4 대강 사업은 오늘날 이 땅의 가장 거대한 타이타닉이다. 4대강 사업은 현 정권이 내세우는 ‘녹색성장’의 상징이다. 실제로 4대강 사업은 아무런 풍요를 창줄하지 않았지만 경제를 성장시켰다. 강에서 모래를 퍼낼 때도 GDP는 올라가고, 퍼낸 모래를 쌓아 올릴 때도 GDP는 올라간다. 보를 쌓을 때도 GDP는 올라가고, 폭우에 유실된 구조물을 복구할 때도 GDP는 올라간다. 그렇게 GDP가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더 풍요로워졌는가. 음식물을 남기면 GDP가 올라가는 요상한 성장 체제가 4대강 사업에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4대강 사업의 침몰은 불 보듯 뻔하다. 홍수 방지, 수질 개선, 수자원 확보라는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목적에 반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홍수 피해 대부분은 지류에서 발생하는데 본류를 준설하여 도리어 지류의 역행침식을 야기하고, 흐르는 강물을 보로 가둬 호소화시켜 수질을 악화시키고, 그 결과 수자원 확보는커녕 낙동강 물을 마시던 부산 주민들에게 남강댐 물을 대려한다. 국민의 헐세 수 십 조원이 허비됐고,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 무참히 짓밟혔다. 구미에서는 두 차례나 단수사태가 발생했고 부산 다대포 해수욕장은 곧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단다. 침몰은 이미 진행 중이다.
작년 이맘 때,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경천대 모래밭을 수몰시킬 상주보를 밤늦게까지 공사하고, 굴삭기들이 흑두루미 서식지인 해평습지를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동안 GDP는 상승했다. 경천대 모래밭과 흑두루미 서식지는 성장론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지금 당장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생물 다양성, 자연 정화력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정신적·문화적 풍요로움은 당장 교환가지가 없다는 이유, 즉 GDP를 올리는 성장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폄하됐다.
나는 분노했고, 분노는 고뇌로 이어졌다. 이 타이타닉은 어디서 왔을까. 3주 동안 강을 따라 걸으며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우리 안의 성장 이데올로기의 운명이었다. 그 운명이 ‘경제 대통령’과 ‘뉴타운 국회의원’을 선출시켰고, 그 둘의 합작으로 4대강 사업이 강행됐다. 그 운명은 4대강 이전에도 이미 새만금 사업이라는 거대한 타이타닉을 건조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됐다.
풍요 없는 성장에서 성장 없는 풍요로
새만금 사업과 4대강 사업은 외적인 경제성장을 가져다줬을진 몰라도 국민들에게 풍요를 주진 않았다. 두 사업이 일부 업자와 부동산 세력의 배만 불리는 동안 국민들은 그들에게 세금을 헌납했을 뿐 아니라 대대손손 누려야 할 자연의 풍요로움을 빼앗겼다. 이제는 더 이상의 파괴와 약탈을 막아야 한다. 그 길은 경제성장과 풍요를 구분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우리는 ‘제로성장을 환영한다’는 러미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경제성장은 풍요로운 삶과 사회의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아무리 GDP가 높은 나라라도 분배정의가 없다면 대부분의 국민은 빈곤에 허덕일 것이다. 키가 좀 작더라도 얼마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듯, 1인당 국민 소득이 4만 불이 되지 않더라도 얼마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러미스는 이러한 발전을 기존의 경제발전과 대립하는 뜻으로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이라고 명명하고 그 길이 ‘진짜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대항발전의 첫째 목표는 줄이는 발전으로 경제활동에 쓰는 시간과 가격이 붙은 것을 줄이는 것이며, 둘째 목표는 경제 이외의 가치와 인간활동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는 일과 소비 중독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삶에서 돈 말고는 아무런 가치 없는 일을 줄이고 소비보다는 행위의 주체로서 행복해지자는 것이다. 요컨대, 러미스는 풍요 없는 성장보단 성장 없는 풍요를 택하자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타이타닉호를 멈출 수 있냐는 것이다. 대항발전을 위해 일과 소비를 줄이라는 얘기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허무맹랑하고 순진한 소리로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타이타닉호의 엔진을 멈추는 비책을 담고 있지 않다. 민주주의와 민주시민의 잠재력을 발휘하자는 정도의 원론적인 이야기뿐이다. 그것이 이 책의 한계라면 한계겠지만, 나는 애초에 비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다.
문득 지난여름, 한 환경운동가가 절박한 심정으로 함안보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현장과 문수 스님 49제를 지내며 108배를 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나는 국민적 방관 앞에 고공 시위도, 소신공양도 막지 못한 4대강 사업을 되돌리는 길은 더 많은 국민들이 풍요 없는 성장 보단 성장 없는 풍요를 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선택은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책을 읽고,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성장 없는 풍요를 실제로 누려보고 그것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 그 길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길은 느린 길이나 쉽게 되돌릴 수 없는 굳건한 길이다. 동시에 그 길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나 인간과 자연의 풍요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그 길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 책을 널리 읽히는 것, 그래서 우리는 지금 타이타닉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좋겠다. 혹은 노래를 부르는 것도 괜찮겠다. 어제 무서운 꿈을 꿨다며.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라고. 풍요로운 제로 성장 호로 얼른 환승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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