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없는 사회, 빈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
일반부문 2등작
빈곤 없는 사회, 빈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을 읽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미정
한국 사회에서 빈곤 문제는 1960년대 이래의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부산물이다. 조세희는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1970년대에 진행된 도시 재개발의 이면에서 노동 빈민으로 전락한 한 가족의 꿈이 어떻게 산산 조각나게 되는지를 폭로했다. 그러나 각종 주요 국가 경제 지표 순위가 상승하고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 ‘성공 신화’의 이면에서 ‘난쟁이 가족’의 일상은 도시의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거리의 걸인들과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이제 낯설지 않은 도시의 일면이다. 여전히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존재하고 더욱 늘어나고 있지만, 빈곤 문제의 사회적 심각성은 점점 잊혀 가고 있다.
최근 부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정부가 나서서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라는 모토를 내걸고 중산층 확대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의 따뜻한 손길이 실제 빈민들을 향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정부는 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당위를 선전한다. 그러나 정부가 실제 빈민들의 어려운 현실과 고통의 심각성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실례로 정부 기관인 KDI는 OECD 가입국 중 한국을 아일랜드와 더불어 가장 빈곤층이 급격히 증가하는 나라로 지적하며, 매년 4-5% 포인트씩 빈민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한국빈곤문제연구소의 추정치에 따르면 현재 최저생계비마저 받지 못하고 있는 빈곤층이 8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반면 최근에 발표된 2010년 예산안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예산의 수급권자와 액수는 전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정부가 내세우는 친 서민 정책은 사각지대에 방치된 빈민들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은 100여 년 전에 쓰인 저서인데도 불구하고 빈곤 문제에 대한 현 정부의 안일한 시각에 경종을 울리고, 빈곤이라는 사회적 고질병의 치료를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제3세계뿐만 아니라 강대국 미국에서도 식량 부족 가정이 급격히 늘어날 정도로 부의 양극화로 인한 빈곤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한국에 번역된 저작『워킹 푸어』(Working poor)의 저자 데이비드 쉬플러는 미국에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메 또한 『빈곤론』에서 20세기 말 영국의 사례를 들어 “늘 열심히 일하는 자에겐 가난이 없다”는 속담을 부정했다. 당시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일을 해도, 일을 해도 여전히 나의 생활은 편해지지 않는구나. 물끄러미 손만 바라보네.”라고 노래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각계각층으로 확산되는 저소득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필자는 다음에서 하지메의 『빈곤론』이 2009년 한국 현실에 시사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평가함과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하지메는 상편에서 ‘가난’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함으로써 개념상의 오해에서 비롯하는 불필요한 논쟁을 방지하고, 빈곤 문제의 사회적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그는 가난의 개념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부자에 비해 가난한 사람, 둘째는 구휼을 받는 사람, 셋째는 수입이 빈곤선 즉 최소 생계비 기준에 못 미치거나 그것과 일치하는 사람이다. 첫 번째 개념이 ‘경제상의 불평등’을, 두 번째 개념이 ‘경제상의 의존’을 의미한다면, 하지메가 사회 문제로서 ‘빈곤’을 얘기할 때 가난의 의미는 세 번째 개념 즉 ‘경제상 결핍’을 말한다. 현 정부는 친 서민 정책의 일환으로 ‘학자금 대출’, ‘일자리 창출’, ‘보금자리 주택 마련’ 등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2010년 복지예산을 사상 최고 수준인 81조원으로 책정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지, 즉 빈곤선 수준 혹은 그 이하의 소득 계층의 상황을 얼마나 고려하고 있는지는 엄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하지메는 대개 학자들이 가난에 대해 품는 이상과 가난에 처한 사람이 겪는 현실적인 불행을 대조함으로써 빈곤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애덤스미스 이래로 많은 경제학자들은 평균인을 내세워 구체적인 빈부의 격차와 상관없이 인간의 행복에는 차이가 없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뿌리내렸다. 또한 성서를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들은 가난을 도덕적으로 긍정함으로써 마치 가난이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들은 빈민들이 겪는 실제 고통과 무관하다. 과연 그들이 위의 고전을 읽고 “세상에 자신들만큼 편한 신세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메는 가난을 논할 때 빈곤에 처한 당사자의 입장에서 “자발적인 가난, 즉 스스로 선택하여 기꺼이 받아들인 가난”과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받아들여진 가난”을 잘 구별해야한다고 강조한다. 빈곤은 후자의 문제로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한 “사회의 중병”이다.
책의 상편이 ‘가난’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중편과 하편은 각각 ‘가난’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대안을 도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메는 “부자의 사치 근절”을 빈곤을 철폐하기 위한 궁극적인 대안으로 제시했으며, 이는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도덕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하기 이전에, 이 책이 그가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파고들기 이전에 작성되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하지메의 논의의 틀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서구 경제학에 한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는 빈곤의 원인을 공급과 수요의 자유로운 시장 경제 모델에 기초한 현대 경제 조직의 결함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가 당시 이미 작동하고 있었던 자본주의 경제의 동학을 통찰하지 못한 것은 이론적 오류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하지메의 해결책에 따라 단순히 부자들이 사치품 소비를 줄인다고 해서, 바로 필수품 생산이 늘어나고 빈곤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하지메가 시장 경제의 동력에 대해 비판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하지메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 경제 구조 하에서 개인 정확히 말해 돈을 가진 개인만이 권력을 갖게 됨을 통찰해냈다. 시장 경제 조직 자체가 부의 증가를 최고의 사명으로 삼고, 부자의 사적 이기심을 인정하는 원칙을 채택함에 따라 사회에서 부자는 자연스럽게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돈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 세상만큼 편한 곳은 없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는 지금 세상만큼 불편한 곳도 없다. 이것이 이 세상의 구조다.
하지메는 아담 스미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시장 경제 조직 자체가 얼마나 불평등한 사회 구조인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한 서구 경제학이 ‘이기적인’ 인간관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때문에 그의 대안은 근본적으로 경제학에 윤리를 도입하는, 다소 도덕주의적인 방향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대안이 갖는 한계는 도덕을 강조했다는 점보다는 결과적으로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그대로 인정해버렸다는 데 있다. 하지메는 표면적으로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경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회 조직의 개조를 위해서 그것의 주체가 되어야할 개인의 개조가 먼저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조직의 개조에 착안함과 동시에 사회를 조직해야할 개인의 정신 개조에 중점을 두고, 양 끝에서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이상향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그러나 하지메의 주장에서 스스로 계몽되어 사회 조직을 개조해야할 주체인 개인은 국가의 기존 권력자인 부자들에 한정되어 있다. 여기서 그의 논지의 모순이 드러난다. 그는 큰 틀에서 부가 가치의 기준이 되는 시장 경제의 불평등한 구조를 빈곤의 원인으로 문제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구조의 수혜자인 부자들로 하여금 사회 구조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를 가진 사람은 그 부를 어떻게 하면 세상을 위해 최선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밤낮으로 고심해야 한다. 사치를 그만두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그 재산을 공공을 위해 쓸 각오를 해야 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 변화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배제해버리는 한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그의 대안은 엘리트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도덕성에 기댄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하지메는 “개인의 마음가짐만 바뀐다면 설사 경제 조직이 현재 그대로라고 해도 조직을 개조한 것과 거의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부자들의 계몽 가능성을 무한히 신뢰했지만, 빈자들도 부자들과 함께 인간의 ‘도’(道)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부자들에게 요청하는 태도는 부의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는 현재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예를 들어 빈곤층이 더이상 늘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업가들은 이타적인 상생의 태도를 발휘해 질이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자들의 일방적인 시혜에 의존하는 단기적인 대책으로는 하지메가 비판하는 시장 경제 조직의 근본적인 틀을 깨트리는 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부자와 빈자가 부의 차이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미 권력을 향유하고 있는 부자들보다 사회적 약자인 빈자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그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개방적인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빈민들은 언제까지 무작정 국가 혹은 국가의 실세인 부자들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지메는 『빈곤론』에서 시장 경제 조직이 기초로 하는 부자와 빈자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고 국가가 나서서 개인주의의 결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진정 부의 격차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이타봉공’의 자세로 서로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가 우선적으로 나서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는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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