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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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리영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지재욱
‘대화’는 7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페이지 수와는 별개로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상당히 깊고 넓어 다방면으로 고민을 던져주는 책이다. 탐독하면서 들었던 수많은 생각의 편린들을 크게 두 흐름으로 묶어 첫째로 지식인의 삶은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는 점, 더불어 과거의 역사는 현재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 의거해 당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고찰해봄과 동시에 둘째로 전기란 한 개인의 인생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점에 주목해 리영희라는 개인의 가치관, 사회와 관계를 맺는 그의 방식 등을 살펴 독해하였다.
현재 진행형인 친일 논란
얼마 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 인명사전을 발표해 진보와 보수가 충돌하며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이 책에는 전직 대통령인 박정희까지 포함 되 그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미 반세기가 넘은 과거를 가지고 왈가불가 하는데 피곤함과 짜증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작업은 유의미하며 특히 한국 사회에서 더욱 중요하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여로 패망한 일본은 식민지에서 자국의 군대 및 국민을 철수시켰다. 조선에도 새 시대를 열어갈 꿈과 희망으로 가득찼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서민들에 스며드는 사회주의를 경계한 이승만은 친일파들과 손잡고 북한을 배제한 총선거를 실시해 첫 번째 대통령이 된다. 이렇게 남한 사회는 친일과 단절하지 못하고 친일의 유산은 60여년간 이어졌다.
지배층이 친일파의 유산이란 사실은 독립운동을 한 자손들은 배를 굶고 있는데 친일파 자손들은 떵떵거리며 그나마 국가에 귀속된 땅마저 당당히 반환소송을 걸고 있는 어떤 신문 만평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실제 애국, 민족 그리고 전통 등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할 우파가 한국 사회에서는 민족보다는 자본에, 그리고 애국보다는 외세의존적인 타율적인 모습을 지니게 된다.
그릇된 역사를 올바로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서술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과거의 사건들을 과학적 사실에 입각해 살펴야 할 것이나 동시에 현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해석하며 현재를 돌아보는 데에 역사의 의의가 존재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친일 청산의 실패로 인해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이는 최근 우파라 자칭하는 세력에 의해 친일에 대한 옹호적인 발언이 공적인 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등장하게 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2009년의 친일 인명사전 발간은 여전히 친일에 기생했던 세력이 사회-경제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절망의 연못에 진실의 조약돌을 던지는 의미를 지닌다.
반공이라는 유령.
남한 사회에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반공’이라는 유령이. 이 유령의 목숨은 끈질기다. 86년생인 본인의 어릴 시절, 북한에 관한 꿈을 자주 꾸고는 했다. 거기에 등장한 북한의 이미지는 남한의 안보를 위협하는, 아니 당시에는 나와 나의 가족을 위협하는 괴뢰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어린 아이의 무의식까지 지배할 정도로 반공 이데올로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빨갱이’라는 한마디가 가지는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빨갱이라 지칭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를 벌레와 같은 취급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마귀와 같은 두려운 존재로 본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어딘가에서 받아야 했던 고문의 흔적과는 별개로 사회 또한 빨갱이가 ‘되어’ 버린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지 않는다. 얼마 전 기사에서는 간첩이란 누명으로 온 가족이 파탄난 한 가정을 보여주었다. 최근에서야 그 누명이 풀어졌고 누명이 풀린 남자는 간첩으로 몰린 충격으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어머니를 기리며 오열한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인의 합리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반공이란 폐쇄적 사상을 우상화 시킨다는 점이다. 정치영역에서 정적을 제거할 때는 ‘빨갱이’한마다로 충분했다. 이 한마디로 합리적 정책결정은 불과했으며 타 세력을 몰살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데 한국 사회에서 배제된 노동의 권리, 혹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대한 복지를 이야기할 때도 합리적 토론을 불가하게 하는 ‘빨갱이’라는 단어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 말은 다소간 진보적 성향을 가진 국민들에게도 부정적으로 쓰이는데, 그들은 진보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신들을 박멸해야할 사회주의와는 차별화해 규정할 때 ‘빨갱이’들과는 다르게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데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는 좀 더 나아가 빨갱이가 머금고 있는 사회주의 사상이 유래하게 된 그 유토피아적 의의마저도 덮어버리며 풍부한 사고의 가능성 자체를 원천 차단해버리는 데서 폐쇄되고 정체된 사회를 구축하는 유감스런 일이다.
시청에 휘날리는 성조기.
매년 광복절을 비롯한 기념일이 되면 한국 사회에서 특이하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시청광장에서 자국 국기도 아닌 타국 미국 성조기를 휘날리며 집회를 갖는 현상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미국이란 존재는 남한의 정체성에 깊숙이 개입한다. 이승만의 하야와 박정희 군사정권의 쿠데타, 베트남 파병과 전두환의 집권까지, 분명 남한 사회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임에도 때론 적극적 역할을 때론 방관하는 방식으로 미국은 남한의 역사에 개입한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어떠한 선입견을 먼저 지니고 미국을 바라보는 행동을 경계해야 한다. 이는 미국을 절대선으로 바라보는 비단 수구세력에 해당하는 사안만이 아니라 진보세력에게도 해당한다.
국가는 자국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수구세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때로 진보세력 또한 미국의 행위에 대해 너무 분노한 나머지 과학적 방법을 망각한 채 미국에 대한 증오로 한국전쟁의 북침설을 비롯해,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절대악으로 상정하고 남한의 불행한 역사적 사건들을 조장했다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과 미국과의 관계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20세기의 국제적 현실에 관한 철저한 분석과 냉정한 국가의 이해가 작동하는 방식을 기반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리영희의 구도(求道) : 과학적 방법론.
리영희는 자신은 묵묵히 진실을 밝히고 타인과 그것을 나누려 한다고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자세를 밝힌다. 리영희 이러한 진실 추구적인 자세와 사회에 접근하는 방법론은 눈길을 끈다. 책의 곳곳에는 리영화와 대담하는 임헌영의 모습이 보인다. 강건하고 단호하나 한편으론 비교적 경직되어 보이는 임헌영과 다르게 특정한 사유의 감옥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사상을 지닌 리영희의 모습이 그려진다. 리영희는 세계 인민들의 해방투쟁을 지지하는 급진적이고 근원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흔히 급진적인 사람들이 가진 이미지인 경직되거나 독선적인 모습을 지닌 인물이 전혀 아니다.
이같은 태도는 과거 사회주의를 지지했던 진보 세력이 북한에 경도되어 6.25전쟁을 미국의 음모론을 몰아가는 경향을 ‘과학’을 내세우며 단호히 남침이라 단정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또한 임헌영이 ‘역시 지배층은 자기 이익을 탐하기만 하며, 민중들이 역사 진보적 역사 변동의 주체’라는 다소 감상적인 의견에 리영희는 여러 가지 실증적 역사적 사례들을 이야기하며 지배층이기에 반동이며 민중이기에 진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반동적 민중, 진보적 지배층(지식인)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며 쉽게 규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한다.
이렇게 그의 사상은 감상적이거나 그 자체가 급진적이기에 사회가 급진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 진실이 근본적이고 급진적 태도를 요구하기에 급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눈여겨 볼 점이다. ‘대화’에도 잠깐 언급되며 아직까지도 여러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문화혁명의 활동상을 보자면 근원적 차원에서는 진실과 과학을 넘어서는 경직되고 편협한 믿음이 작동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중’을 신성시하는 바로 그 순간, 민중은 하나의 우상이며, 사회 모순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우리 주위의 개별적 개인이 아니게 된다. 그의 이러한 철저히 진실을 찾고자 하는 태도는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 기사 하나를 쓰기위해서 대충 몇 가지 질문만 하고 기사를 쓰는 다른 기자들과 다르게 철저히 배경 지식과 현실 상황을 분석한 논문 및 기밀문서까지 구해서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기사로 써내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회를 바라볼 때 중요한 점은 항상 구체적인 개별 사안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시작해 추상적인 것으로 총체화 하는 것이다. 다른 개별 사안은 다시 그 사안과 당시의 현실로부터 추상화 되어야 한다. 총체화의 방법은 지식인들의 고결한 이념을 배제하고 일반 시민들의 보편적 상식에 기반해 총체화 되어야 한다. 철저히 분석된 개별적 사안들이 상식에 의거해 추상화, 총체화 됐을 때 하나의 사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개별 사안은 다른 사안들과 관계없이 순수 독립된 사안들도 아니지만 사회의 총체에 일방적으로 구속당하지도 않는다. 즉, 자신이 믿음 지니고 있는 이념이 우선되어 현실의 구체성이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태도를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을 때 현실은 이념에 의해 가차없이 왜곡되며 이념은 보편 상식마저 부정하는 지식인들이 주조한 괴물이 된다.
리영희 선생은 유명인들의 말을 빌려 쓰는 허영에 의존하지 말고 그것을 스스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자세를 강조하였지만 본인은 아직 충분히 그의 사상을 본인 것으로 변용시키지 못하였기에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어떤 이론이 형성됐을 때는 그 단계에서는 현실을 반영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데올로기화되면 벌써 현실과 객관적 진실로부터 유리된다는 것을, 나는 사회과학 분야의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됐어.” (pg243)
어느덧 2009년도 한 달 남짓 남은 이 시점, 여전히 사회는 격동의 시기이다. 한국 사회는 이명박 정권이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갈수록 민주주의의 위기는 심화되고 있다. 정권은 양심적 고백, 정권에 반하는 생각을 드러내는 행위에 대해 탄압하고 있다. 이는 좌우의 대립을 넘어 민주주의 일반의 위기를 도래했다. 국민들은 과학적인 태도보다 독선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정부에 점점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2008년 촛불 집회 당시 단지 한국 사회의 진보 세력뿐만이 아닌 일부 보수 세력까지 거리로 나온 것은 이 문제가 좌와 우 빈자와 부자의 문제를 넘어 정부가 과거의 권위주의적 정권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우리는 다시 리영희와 같은 진실을 찾는 과학적 지식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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