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람이 있다: 나의 고백

학부생부문 3등작

여기 사람이 있다: 나의 고백

공저, 『여기 사람이 있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박천우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온다. 하루를 열고, 마감하는 그 길지 않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루 두 번 씩, 살벌한 구호들로 점철된 현수막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묘한 시공간을 서성이는 사람들의 물결을 바라본다. 그들의 정처 잃은 눈빛은 집 근처 정금마을에도 ‘철거’와 ‘재개발’이라는 괴물이 수면위로 머리를 내밀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높다란 버스 좌석에 앉아 매 순간 아래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게 마련인 나의 시점은 그 자체로 극적이며, 또한 상징적이다. 오만가지 상념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때마다 이렇게 되뇐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이라고, 정말 오직 그것뿐이라고 말이다.

극도의 공허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결국 그것뿐이었다. 이런 알량한 지껄임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을 객체화, 대상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건조한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구조적 모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쓰라림과 안타까움을 느낌에도 진실한 행동으로의 전환을 유보하고 있는 나의 현재를 가능케 해준 견실한 기반은 결국 ‘기득권’에 편입될 수 있었던 천우신조 덕분이었던 것이다. 완벽한 제로섬은 아닐지라도, 내가 누리는 행운은 종국에 누군가의 불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견고한 자본과 경쟁의 사슬 속에서 수많은 불운한 이들을 떠올려 본다. 기껏해야 용산참사 항의 지지서명에 참여 할 뿐, 지금 행동하지 않는 나를 돌아보며, 젊은 침묵의 부끄러움을 절감한다. 말뿐인 것들의 공허함을 생각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노래했던 브레히트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 부박해져가는 당대 현실에 경종을 울렸던 조세희 선생님을 떠올린다. 바로 이런 들끓는 나를 주체하지 못하던 즈음, 표지에 실린 이윤엽씨의 판화작품만큼이나 묵중한 이 책을 만났다. 그리고 그곳엔 아스러져가는,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 사람이 있었다.

개발지상의 망령에 사로잡힌 대한민국에서, 재개발이란 그 자체로 선이며 옳음이다. 그리고 그 지고지선의 논리 앞에 그 무엇도 저항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는 살벌한 경고방송이 지난 1월 용산에서 울려 퍼졌다. 첨단을 달리는 자본의 광기는 추악한 본색을 드러냈다. 더불어, 그간 침묵하던 많은 이들이 우리네 사회가 무언가 크게 곪아있음을, 아니 그것이 진즉에 터져 진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아가 적지 않은 이들은 그 환부의 악화에 자신들의 침묵이 절대적으로 기여했음을 절감했다. 첨단을 구가하는 물질문명의 화려함, 그 이면에 극단적 야만성이 상존해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의 끝에 나 역시 비루했던 나의 침묵을 직시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나는 현재 이른바 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초, 중, 고 12년간의 제도교육을 겪으며 그토록 혐오했던 경쟁만능의 논리로 복귀했다. 숱한 번민의 날들 속에 결국 나는 지독히도 익숙한, 피냄새 나는 경쟁 속으로 재차 나를 몰아넣었다. 고시의 논리란 결국 ‘생존의 논리’다. 내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 죽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전적으로 긍정하며 살아야만 한다. 아마도 이 ‘생존의 논리’ 속에 수많은 폭력의 맹아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여하튼 사회의 모든 이슈와 약자들의 존재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질수록 빠르고 정확하게 법서를 습득해 나갈 개연성은 압도적으로 증가한다. 이런 일련의 자각과 수용 속에서 나는 ‘저항의 논리’를 버리고 ‘생존의 논리’를 선택하는 자기합리화를 단행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나를 가둬 두어야 한다는 자승자박이 시작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함께, 날이 갈수록 나의 사회적 발화점, 혹은 인화점이 점점 더 낮은 지점에 형성되고 있음을 느꼈다. 촛불로 들끓었던 작년 여름과, 시험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나를 마비시켰던 올해 초 1월의 용산참사를 기억하기에, 최대한 모든 미디어와의 접촉을 멀리하려 노력해왔다. 문제는 미디어에서 멀어지려는 의식적 노력에도 불구, 언뜻언뜻 접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파열음들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나는 지금 고작해야 이 자리에 앉아 입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그저 치미는 분노의 끝을 조금씩이나마 동그랗게 다듬고자 노력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미디어를 멀리하려는 나의 절실한 생존본능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아래의 사진을 보고 말았다. “죽어서도 용서 못해!”라는 곱씹어 볼수록 섬뜩한 이 한마디가 나를 부여잡았다. 사실관계를 간략히 살펴보니, 약 200만원의 돈을 빌려 쓴 뒤 이를 갚지 못해 사채업자들에게 가혹하게 시달리다 결국 자살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대부업자에게 돈을 빌려 쓴 뒤 자살 한 분이 무려 세 명이고, 이 대부업자들은 5년간 150명에게 돈을 빌려준 후, 120억 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겼다고 기사는 이어서 적고 있었다. http://www.rushncash.com/ 사이트를 방문해 보았다. 일본계 자본에 완전히 잠식당한 한국 대부업계와 한국 소시민들 간에 형성된 처참한 먹이사슬이, 초등학생들이 흥얼거릴법한 친근한 멜로디와 함께 계속되는 TV광고를 통해 참으로 세련되게 미화되어 있었다. 무려 "2009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대상"을 수상했음을 당당하게 공지하는 팝업창은 계속해서 나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有口無言, 나는 참으로 할 말이 없었다. 200만원은 '죽어가면서도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과 '죽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상대방'을 동시에 낳았다. 놀라운 일이다. 200만원은 위대하다. 그러나 더욱 위대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시스템이다. 이 사회는 두 눈을 크게 뜨고도 이 모든 것들을 태연하게 용인하고 있다. '법치주의'라는 신격화된 요술방망이에 홀려있는 현 정권하에서, 법은 있으되, 그 법은 말이 없다. 최근 법원은 용산 참사 관련 1심판결에서 기소된 농성자 전원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이 가운데 7명에 대해서는 징역 5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법원의 판결에서, 철거민들이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그 절박함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검찰의 수사기록 미공개는 굳이 더 말해 무엇 하리. 나아가 삼성관련 대법원 판결과의 극단적인 대비는 애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원론적으로 사회현실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 법의 운명이라고 할지언정, 혹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의 첨병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체제하에서의 법의 숙명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우리네 법은 참으로 말이 없다. 끝 모를 침묵은 이름 모를 힘없는 이들의 처절한 눈물과 좌절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좌절은 우리 민주주의와 법치의 실패에 다름 아니다. ‘멋도 모르는 일반인들의 법 감정'이 문제임을 지적하며 태연히 넘기기엔 법의 그물망은 참으로 허술하다. 그것도 강자에게는 너무도.

有法無言, 이 글을 쓰면서 저 사진을 몇 번이고 봤다. 다시 보니, 스스로 세상을 떠난 이의 언어가 그대로 살아있었다. 법은 말이 없지만, 죽어간 이의 절규는 남아 있었다. "죽어서도 용서 못 해, 너 용서 못 해, 좀 돌봐줘." 어찌 보면 유치해 보이는 이 한 문장이, 그 누군가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필로 활자화한 최후의 몸부림이란 점을 떠올려 본다. 좀 돌보아달라는 마지막 이 한마디는 극도로 많은 것을 응축하고 있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돌보아달라는 것일까. 급하게 지운 흔적들이 역력한 저 활자의 자욱 속에, 어떤 절망과 한숨이 들어있을까. 아무도 들어줄 이 없는 갈 곳 잃은 분노가 지금 이 사회에 가득 차 있다. 이 분노를 들어줄 사람은 누구인가, 소시민들을 '좀 돌 보아줄' 주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잠시 다른 얘기를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같은 논의의 선상위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 지금 이곳에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돌보려 하지 않는다. 그 어떠한 사회적 발언권도 확보할 수 없는 약자들의 철저한 배제는 정제된 법치의 논리를 통해 정당화된다. 바야흐로 압도적인 물질을 확보한 이 시대에, 최소한의 생존 기반조차 확보할 수 없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비국민’ 내지 ‘내부 난민’ 등은 자신들이 참여할 수 없는 자리(합의로부터의 배제)에서 내려진 결정에 의해 ‘추방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합의를 통한 배제).

20여명 정도의 인터뷰에 기반 해 쓰인 『여기 사람이 있다.』의 각 인터뷰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절박했던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던 일련의 합의과정에서 그들은 대개 철저히 소외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성이 한국사회 내부에 만연해 있는 관성이기에, 혹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향성 자체가 극복되어야하는 심각한 병폐임은 물론, 철거민들의 사안의 경우 생존에 직결되는 주거의 문제가 걸려있음을 고려하면 사안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철거민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생활 속 민주주의의 부재와 관료들의 편의주의, 그리고 극단적인 영리추구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자본의 속성을 골고루 보여준다.

모두가 민주주의를 말한다. 조선일보는 민주주의의 적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역설하고, 박근혜는 선친의 뜻을 계승하자며 민주주의를 들먹이는 세상이다.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확보했음을 아무도 의심치 않는다. 일련의 오남용된 확신 하에서, 대한민국이란 체제 내에서 소리 없는 식민화가 진행되어 왔다. 체제 내 식민화를 통해 시민과 합법, 그리고 민주(民主)의 범주로부터의 탈주를 강요당하고 있는 철거민들이 겪는 처절한 생존에의 투쟁은 그저 ‘불법 극렬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현란한 레테르의 굴레 속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결국 문제는 오직 칼 같은 논리의 자장 하에서만 존재하는 듯한 법원의 판결문만큼이나 명백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공허한 외침 속, 民이라는 처연한 개념어에 철거민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주인이자 주체인 그 민(民)으로서 존립을 인정받기는커녕, 체제 내 난민으로써의 지위를 부여받을 뿐이다. 고병권의 적실한 지적처럼, 그들은 합의로부터 배제되어 합의를 통해 배제된다. 그 과정에 법치주의와 세련된 경제논리는 여지없이 동원되어 실용의 신화를 드높이고 있음은 물론이다. 고병권은 같은 책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전체’를 위해 희생된 ‘일부’, 결과적으로 ‘전체’에 포함되지 못하는 ‘일부’ 그것이 한국 사회 대다수 ‘대중’의 현상이 되었다.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그 ‘일부’들, 그 ‘일부’들을 자신은 ‘일부’가 아니라는 확신과 안도 속에 야릇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던 자칭 ‘전체’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일부’들이 사실 ‘전체 대중’에 수렴할만한 다수였으며, 그것이 바로 ‘전체’라며 자위했던 ‘일부’들 자신들이었음은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기만과 역설의 우리네 이야기다. 우리는 늦게나마 그것이 이 나라의 수많은 힘없는 이들을 수탈해왔던 위정자들과 자본의 전략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우리를 규정지어온 논리들과, 지금 우리가 처한 구조에 대한 심화된 학습과 자각으로 이어진다. 고병권은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진. ‘주변’은 권력과 부의 영역에서 부차화된 대중의 지위를 나타낸다. ‘한계’는 대중들의 삶이 처한 상황을 나타낸다. 한계는 척도가 부재한 곳이 아니라 척도가 가장 강하게 관철되는 곳이다. 권력과 자본의 명령을 그 어느 곳보다 강하게 체험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대중들을 공동체 바깥으로 추방한 게 아니라, 한계지대로 추방해 왔다. 대중들을 한계지대에 매달리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지난 십여 년간 일어난 주변화의 특징이다. 이제 불안정과 위기는 대중들 삶의 기본 조건이 되었다. 추방은 권력에 더욱 매달리게 하는 하나의 통치술이다. 대중들을 삶의 한계지대에 방치함으로써 더 큰 지배력을 얻을 수가 있다. 한계지대의 대중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국가와 자본에 매달리게 되고, 국가와 자본은 이런 ‘공포에서 나온 이익’을 챙긴다. 권력과 자본은 ‘주변화’를 통해서 막대한 이익, 즉 ‘마진’을 챙기고 있다. 이들은 ‘주변’을 생산하고 관리하고 활용한다. 현재 노동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들은 삶의 한계지대에 내몰려 있기 때문에, 저임금은 물론이고 아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불법’이라는 규정은 추방의 근거라기보다는 착취의 근거가 되고 있다. 지난 십여 년간 ‘정치’의 핵심 영역이 된 ‘주변’이 ‘정치권’에서는 사고되지 않는다는 것, 즉 ‘마진’은 정치의 ‘공백’을 의미한다.

철거민들은 ‘불법’이라는 규정 하에 권력과 자본에 의해 주변화 되어 사회의 한계 지대로 추방된, 현 체제의 모순을 극명히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다.『여기 사람이 있다』를 통해 조금은 무디지만, 그 어떤 세련된 사회과학 논문, 혹은 비평을 통해서도 접할 수 없는 진실한 삶과 고통의 통찰들을 접할 수 있었다. 체제내부와 외부의 경계선상에서, 생사를 건 줄타기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철거민들의 절박함이 낳은 언어들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곳에, 살기위해 싸우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언어가 있었다.

유순복씨는 “땅도 쳐다보고 하늘도 바라보며 내 집에서 살고 싶다”는 극히 소박한 바람에서 철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정삼례씨는 “정의감에 불타가지고 처음에 시작했다”는 고백을 덧붙였다. 최순경씨는 “여기가 내 집”이라는 당연함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남경남씨의 지적처럼 결코 “혼자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연대’만이 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었다. 또한 지석준씨의 말처럼 “철거민들의 꿈과 희망의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철거민들은 이영희씨의 언급처럼 “중요한 것은 침묵하지 않는 것”이라는 위대한 자각에 이른다. 박명순씨는 “없는 사람은 아예 없고 있는 사람은 아주 많다”며 온몸으로 절감한 양극화의 냉혹함을 지적한다. “재개발은 누구한테나 다 올 수 있는 일”이라는 김창수씨의 말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과 지지는 결국 언젠가 다가올지 모를 자신의 쓰라림에 대한 보험일 수 있음을 역설한다. “집 평수 넓히려는 사람들 마음속에 폭력이 있다”는 인태순씨의 예리한 지적은 무한경쟁의 광기 속에 철저한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해버린 우리 사회를 고발한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성낙경씨의 표현처럼 “주택공사라는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인터뷰에 응한 철거민7인의 말처럼 “단지 도망가는 것밖에 없어서 망루에 올랐던” 용산의 이름들은 단지 살기위해 그곳에 올랐으나 결국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뭐 하나 밝혀진 것이 없다”는 정영신씨의 말과, “내가 아버지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용산참사 희생자 자제분들의 차분한 고백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러한 아픔이 반복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촉구하는 동시에 현 시스템의 모순에 대한 형언하기 힘든 울분을 자아낸다.

그들은 저항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불법극렬도심테러리스트’라는 휘황찬란한 호명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곳엔 레테르의 향연이 있었다. 철거민들을 지칭하는 단어를 분절해서 살펴보자. 불법, 극렬, 도심, 테러리스트. ‘도심’ 정도를 제외하고는 참으로 위협적인 뉘앙스가 진동하는 단어들의 조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불법’이라는 규정은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불법’이라는 규정은 ‘합법’의 테두리가 선재함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불법’과 ‘합법’은 대개 ‘폭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이념투쟁의 양상을 보인다.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은 이렇게 지적했다.

치외법권 지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두고 합법과 불법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한쪽은 법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이고, 다른 한쪽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전자에게는 폭력이 합법적이고, 후자에게는 법 자체가 폭력적이다.

‘불법’이라는 단 두 글자는 그 단순 명료함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힘을 지녔다. 현 이명박 정권 역시 바로 그 힘에 전적으로 의존해 정권을 지탱해나가고 있음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불법’이라는 올가미는 철거민들에게도 어김없이 씌워졌다. 과연 무엇이 합법이고, 무엇이 불법인가. 냉철한 이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강변하는 합법의 논리 이전에 법이 존재하지 않던 인간들의 공동체, 즉 말 그대로의 불법상태가 있었음을 떠올려보자. 막스베버는 국가를 폭력독점체로 정의했다. 그리고 그 폭력독점체는 ‘합법’이라는 완전무결한 보호막을 겸비하고 있다. 종종 공권력과 시민의 저항이 충돌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성의 ‘합법’은 ‘불법’을, 그저 ‘불법’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탄압하며 그 압제를 정당화한다. 반면, 기존의 ‘합법’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당한 이들은 ‘합법’을 ‘불법’으로 규정하며 저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시민불복종과 저항권으로 대표되는 민주공화국의 주인 된 이들의 뼈저린 각성이 존재한다.

용산참사의 경우도 전형적인 사례였다. 재개발과 철거의 와중에 불거진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의 첨예함 속에 무너져가는 최소한의 생존기반을 지키려 망루에 오른 사람들, 저항하는 시민들, 그 저항을 진압하는 공권력, 공권력의 비호아래 날뛰던 용역들, 서울 시내 한복판의 아비규환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가 살아내는 이 시공간의 추한 이면을 절감했던 시민들, 그 속에서 사라져간 모두 여섯 명의 영혼들. 그 일련의 흐름을 요약하자면, 결국 ‘자칭 합법’과 ‘규정당한 불법’의 싸움이었다. 촛불집회와 용산참사로 대변되었던 이 싸움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좌절과 슬픔을 토로하던 와중, 그 반대편에서 어김없이 빛을 발했던 것은 최근 만연하고 있는 정치적 냉소와 절대화된 다원성의 주장이었다. 즉, 공권력이 자행한 폭력과 시민들의 저항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을 등가적으로 바라보며 합법에 저항한 이들의 불법에 천착해 극단적 과잉진압을 옹호하는 논리가 등장했던 것이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에 대한 오해는 상대주의 그 자체를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낳았다. 너도 맞고 나도 맞고 그러니 그저 그 뿐이라는 식의, 가까이로는 “조중동도 편파적이지만 한겨레, 경향도 편파적이므로 결국 다 똑같다.”라는 앙증맞은 궤변이 시대의 한 흐름을 꿰차고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식상했던 상식이 상식으로써 그 존재 값을 확보할 수 없는 신세계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절대화된 상대주의의 극복이 시급함을 느끼는 요즈음이다. 다원성의 옹호가 민주주의의 근간임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 다원성 자체를 말살하려는 세력은 다원주의 하에서도 결코 옹호 받을 수 없다는 상식의 재림을 바란다.

몇 가지 상식을 조금 더 보기로 하자. 우리는 지금 상식의 부재가 일상화되는 기묘한 시국에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점유 형태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강제 퇴거, 괴롭힘 또는 기타 위협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점유에 대한 법적 안정성을 보장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UN 사회권위원회 사회권규약이 어렵사리 떠오른다. “이런 슬픔, 이런 불공평, 이런 분배의 어리석음, 이런 정치·경제 정책을 하면서는 미래가 깜깜할 수밖에 없다, 이대로 가는 건 우리가 벼랑 끝을 향해서 가는 거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난쏘공』은 벼랑 끝에 세운 ‘주의’ 팻말이라고 내가 생각을 했어요. 이 선을 넘으면 위험하다.”던 조세희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단언컨대, 우리는 절대화된 상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공권력의 폭력과 시민들의 저항 폭력은 결코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점과 인간의 생존권에 대한 절대적 보장은 민주사회 존립의 근간이라는 점이 여타 상식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기를 바란다.

2009년, 지금 현재 우리가 누리는 물질문명을 생각 본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생존해 나가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기반을 의, 식, 주로 거칠게 상정한다면, 입고 사는 문제는 물질적으로 충분한 정도로 해결된 듯하다. 또한 말 그대로 먹지 못해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흔치는 않다. 물론 요즈음 무료급식과 관련한 경기도교육감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면, 아직도 먹는 문제는 복지정책과 관련해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런데, 입고 먹는 문제와 달리 주거의 문제는 상황이 여전히 심각함을 누구나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없는 사람은 아예 없고 있는 사람은 아주 많다”는 철거민 박명순씨의 지적은 만연한 우리네 주거 관련 모순의 극점을 단순명료하게 설파하는 힘이 있다. 인간 생존의 기반으로써가 아니라, 자본증식과 투기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부동산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생존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과연 현재 우리 사회가 축적한 물적 토대가 한 개인들의 최소한의 생존조차 보장해 줄 수 없는 가련한 수준인 것인지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체현해, 결코 무한자기증식을 멈추지 않을 우리들의 욕망과 그 욕망의 기저에 존재하는 타자와의 비교를 통한 ‘결핍’의 향연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일까. “집 평수 넓히려는 사람들 마음속에 폭력이 있다.”는 전철연 연대사업위원 인태순씨의 정제된 한 마디는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진중한 울림이 있다.

나는 땀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행동으로 저항하는 이들을 진심으로 지지한다. 그에 비해 학생이라는 허울 좋은 보호막아래서 공부를 핑계 삼아 노동 없는 생존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라는 자책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어쩌면 나의 모습은 왜소한 몸에 머리만 커버린 괴물 같은 것은 아닐까. 행동으로 담보되지 않는 사유가 근본적으로 빈곤할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은 때로 냉소의 유혹에 이끌리게 한다. 조세희 선생님은 책 중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냉소주의에 빠지면 절대 헤어나지 못해요. 그러면 우리 공동의 일, 공동의 숙제를 해낼 수가 없어요. 냉소주의는 우리 적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빠지면 안 됩니다.

고민하고 생각하는 그 힘을, 마음과 머리로부터 두 발이 디디고 서 있는 이 땅위의 현실에까지 끌고 나와야만 한다. 문제의식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넋 놓고, 손 놓고 가만히 주저앉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절실한 막연함만이 마음속에 가득하다.

현재, 한국사회라는 시공간을 고민하고 쓰라려하며 살아나가는 거의 모든 이들은 아마도 생존과 저항이라는 두 가지 화두에 직면 해 있을 것이다. 생존해야만, 살아남아야만 끊임없이 저항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저항 없는 생존은 무의미하다는 점 또한 자명하다. 나는 생존 없는 저항은 죽은(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앎이고, 저항 없는 생존은 죽은 삶이라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어렵사리 ‘생존’에 우선적 방점을 찍었다. 부끄럽게도 대세와 시류에 편승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범인들에게 있어 현실적 존재와 당위는 언제나 불화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에는 정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물을 수밖에 없다. 오늘, 나의 방점은 어디에 찍혀있는가. 오늘 나는 또 얼마나 말뿐이었나. 함께 생존해, 함께 저항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물론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나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결국 나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지금 짓는 나의 웃음이 그 얼마나 많은 이들의 눈물과 한숨을 담보로 하는 것인지, 그리하여 나의 이 알량한 지껄임이 그들에겐 얼마나 가소로울지 생각해 본다. 강자도 거짓말을 하고, 약자도 거짓말을 한다. 부연설명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면, 나는 약자의 거짓말을 믿을 것이다. 부끄러움의 끝에서 나의 언어를 줄이려 한다. 언어 또한 또 다른 사치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험한 세상, 혼탁한 시간들, 조세희 선생님의 한마디를 다시금 꺼내어 본다. 뚜벅뚜벅 하루를 살아 내게 해줄 힘이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니까 말이다.

“당신이 이성과 힘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이성을 갖고 적들에게는 힘을 주자. 적들은 아마 그 힘으로 전투에서 이길 수 있겠지만, 전쟁에서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적들은 힘으로 이성을 못 만들지만 우리는 이성으로 힘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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