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기록의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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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기록의 울림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전미영
이 책을 읽는 동안 가난하고 힘없는 난쟁이 가족의 눈물냄새를 가슴으로 맡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연 괜찮은 곳인가?
막대한 자본이 투자이윤으로 많은 돈을 벌어갈 때 그곳 일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경영 합리화라는 미명 하에 법의 보호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재개발구역에서 사람들이 살던 집을 부수고 철거민을 양산하는 제도적 폭력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열두 편의 연작소설을 모아놓은 이 책이 아직까지도 진지하게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 책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던 시절에 나의 변화된 인식과 심정을 대변해주는 책이기도 했다. 나는 노동조합활동을 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랬다가 불이익을 당하는 건 아닐까, 왜 괜히 고생을 사서 할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교과서에는 집단이기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에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학교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배우는 지식이 정직하고 투명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편파적인 신문에서 부정적으로만 다루어지는 것과 다르게, 노동운동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간직한 사람들, 자신의 권리를 구걸하거나 다른 곳으로 도피하지 않고 삶의 얼굴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용기있게 맞설 수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접했고, 소설 속 인물들은 지금도 살아있으며 이 소설은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은유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감명깊게 읽었다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소설에 그려진 사회적 고통이 오늘날에는 거의 대부분 해소된 것처럼 생각해버리고, 노동인권에 무감각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지 지나간 일을 기록함으로써 과거보다 현재의 삶은 더 나아졌다는 안도감을 주는 책이 아니다. 이 소설은 1970년대에는 노동자 한 사람이 분신을 택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암울한 시대였다는 감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가 조세희는 당시 현실의 빛과 그늘을 소설에 담았고, 소설은 터져나오는 울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설을 쓰던 당시와 달라진 것이 현재에도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소설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소설에서, 난쟁이는 황혼기에 접어들어 힘든 일을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체념과 우울에 빠진다. 난쟁이는 <일만년 후의 세계>라는 책을 읽으며 절망적인 현실에 더 이상 미련 없이 달나라로 가겠다는 꿈을 꾼다. 철거 계고장이 날아오자 난쟁이 가족은 입주권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데, 가뜩이나 가난한 형편이라 난쟁이의 아들인 영수와 영호는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공부를 잘 했던 영수는 학교를 그만 둔 후에 더 많은 책을 읽는다. 아마 그러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알았던 걸까. 영수는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동생인 영호는 처음에는 영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형과 같이 잘못된 점들을 고쳐나가자는 목소리를 낸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회사에 임금 인상과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기로 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 원하기만 하는 공장’, ‘작업환경의 악조건과 흘린 땀에 못 미치는 보수’, 이런 열악한 조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줄 모르는 동료들에게 영수는 살아가는 사람이 갖는 행복에 대한 욕망을 깨우고자 한다.
“도대체 넌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왜 가만히 시키는 일만 못해?”
라고 영수의 어머니는 영수가 공장에서 쫓겨날까봐 야단치고 걱정한다.
“사람처럼 살고 싶어서 그래요.”
“누가 사람처럼 살지 말랬니?”
그랬다.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 난쟁이네 집은 강제로 부숴졌으며, 절망을 감내하기가 힘에 부쳐 난쟁이는 달나라로 가겠다고 꿈을 꾸다가 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영희는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 투기하는 남자를 가족들 몰래 따라가는 위험한 모험을 해야 했다. 회사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걸 싫어했고, 힘을 합치려는 가난한 사람들의 노력을 깨뜨리려고 했다. 결국 영수는 해고되었고, 노동운동은 회사의 탄압을 받았다.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가로막히자, 영수는 극단적인 방법인 살인을 저지른다. 사장을 죽이려던 것이 실수로 사장의 동생을 죽인 것이 되고 말았는데, 아무튼 이 일로 영수는 사형에 처하게 된다.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이지만, 그동안 일터에서 수많은 노동자의 꿈과 권리를 죽여온 사장이 벌 받지 않고 영수만 벌 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소설을 읽는 중간 중간에 답답한 한숨을 몰아쉬게 된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고민해본다. 흔히 폭력을 말할 때 물리적인 폭력만을 이야기하지만,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 않고도 불합리한 상황을 초래하는 세련된 방식의 제도적 폭력과 상징적 폭력도 엄연히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다. 기존의 판에서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반영될 통로가 막혀있을 때, 그로 인해 사회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면 주먹이 오가지 않았어도 폭력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마치 두 계급이 서로 화해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두 계급 간의 대립각만을 내세우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오해이다. 오히려 소설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꿈꾸는 세상은 법이 아닌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 화단에 피어난 미나리아제비꽃줄기에도 사랑이 깃들어있는 세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만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문제를 더욱더 잘 알게 될 뿐이고, 다수의 고통과 희생에 무감각한 소수의 안락에 분노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원리로 움직여야 할 세상에 대한 믿음과 소망은 버리지 않는다. 나는 사회문제를 개선하려는 인간의 노력도 이런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인간은 이해타산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의감이 행동의 중요한 동력이기도 하다. 이런 인간이라면,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분노조차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하고 대화의 통로를 차단해서라도 소수의 안락이 어떻게든 지속될 수 있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결여된 것이라서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맨처음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수학교사는 ‘뫼비우스의 띠’에 진리가 담겨있다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고등학생 시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았다. 뫼비우스의 띠가 아닌 보통의 띠에서 ‘안’은 계속 ‘안’, ‘밖’은 계속 ‘밖’이다. 못 가진 자는 계속해서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에 소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다수의 고통을 담보로 하여 안락을 누리는 세상이 있다면, 이런 세상은 보통의 띠와 같이 변화의 희망이 없는 정적인 사회다. 그렇다면 뫼비우스의 띠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안이 될 수도, 밖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사회’, 다시 말해 ‘애초에 안과 밖의 구별이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요즘 나는 뫼비우스의 띠가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을 구별하기 어렵다. 분명 바깥 테두리에서 출발해 띠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띠 안쪽에 와있고, 다시 띠를 따라가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깥쪽에 도달해있다. 기묘하고 혼란스럽고, 마치 누군가 장난치는 것 같은 느낌, 속은 느낌을 받는다. 이런 뫼비우스의 띠는, 사회를 규율하는 법이 권력을 가진 사람과 사회적 약자 사이에서 적용될 때 보여주는 비일관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해석은 내가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동안 매번 새롭게 변화하며 사회의 모순을 비추어줄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하고 가슴이 뛰었던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영수처럼,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게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내 이상형은 《난쏘공》의 영수, 《황혼》의 경재와 준식, 《상록수》의 동혁을 합친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간직해 심성이 따뜻하고, 의지가 굳고, 생각이 깊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고, 옳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끝까지 밀어붙이고, 부지런하고, 사회를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을 좋아했고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론 내가 책을 앞으로 많이 읽을수록 이상형이 추가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5년이 흐르는 동안 사회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며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고, 세상이 이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고 중첩적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배워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소설이 갖는 울림과 고민은 나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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