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한 지식의 삶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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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한 지식의 삶과 사상
(리영희 / 임헌영 저, 한길사, 2005)
이재상
‘미약한 자로 거듭나는’
2008년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여의도에 촛불을 들고 모여든 시민들 속에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사회 참여가 다소 낮은 고교생들이 인파들의 앞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거침없이 말하여, 인터넷과 언론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시민들의 마음을 급속도로 잡았고, 잠재해 있는 불씨를 키웠다. 한참이나 어린 친구들의 행동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촛불집회의 고교생들과는 달리, 고교시절 사회적으로 큰 이슈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모른 채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한총련 사태였다. 재학 중이던 학교가 신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터라 신촌으로 발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가기 싫었던 것이 컸다. 좌와 우의 노선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어쩌면 우리의 눈과 귀는 그것을 향해 있지 않았고 누구든 설명을 잘 해주지 않았다. 워낙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경계에서 그른 쪽으로 가버렸다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행위에 아무렇지 않게 이것은 잘못 되었다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옳고 그름보다 정확한 사실을 읽어내는 힘이 필요함은 늘 과제이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학교의 상황도 있었지만, 운동은 사라졌고 이념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대학 캠퍼스에서 이리저리 움직일 뿐 나의 생각을 대중에게 말하는 일조차 익숙지 않았다. 점점 자유분방함은 탈이념화 했고, 현상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더더욱 힘든 건 이념에 따라 경제도 좌지우지 되니 현실적인 인간으로 변모해 갔다. 원래부터 취하고 있는 노선을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 참여에 있어서는 굉장히 미약한 존재로 거듭나고 있다. 미약한 자는 강한 자로 거듭나야 하지만 더 미약한 자로 바뀌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간사한 자로 만들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야근을 하고 퇴근하면서 시청 앞 광장을 지나가면 촛불집회로 인해 버스가 갈 길을 못 가고 불편을 겪게 된다. 분명히 의의를 알면서도 거동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들은 불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자보다 더 변절한 자로 만들고 있었다.
629선언을 하게 한 시민의 부류 중에서 넥타이 부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자율복장인 회사를 다녀서인지 그들의 행동은 먼 나라, 먼 과거의 일인 것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손짓을 해봐야 아무 소용없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언가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먼저 손에 닿은 것이 책이었다. 그 중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대화’가 위로 거듭나게 하는 매개체였다.
386세대들이 존경하고 따르던 분을 그토록 모르고 살았다. 왜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자책을 하며 두꺼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가 문답식으로 제자들과 공부를 했다면, 리영희 선생님과 임헌영 선생님의 ‘대화’는 제3자에게 대화 속의 청중으로 만들어놓았다.
‘발생’
청중과 독자의 동일한 위치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 복숭아를 먹이면 알레르기를 일으키고,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 번지 점프를 하게 하면 공포로 몰아간다. 늘 극단으로 가지 않으려 하면서도 한 쪽으로 치우치고 있는 발걸음을 볼 수 있다. 자신보다 이쪽, 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의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기가 여간 쉽지 않다. 세상은 그 가운데를 염원하면서도 한쪽으로 가지 않으면, 불쾌해하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 엄청난 힘을 쓰기도 한다. 강하면 부러지고 부러지면 반대 급부가 일어나게 된다. 역사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순환을 반복했다. 아주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것이 역사를 이끌어온 힘이기도 하다.
죽으면 태어나고 태어나면 죽는 반복 구조가 있다. 조직도 이와 동일하다. 소멸과 생성의 순환은 모든 것의 기본 동력이다. 더 나아가 소멸과 생성 후, 발생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멸과 생성이 지겨움만을 가져올 뿐이다.
예를 들어, 원시시대 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계급이 등장한다. 5~6명이 모이면, 책임자를 세우게 된다. 조직 구성원들의 합의에서 균열이 생기게 되면 그를 어떤 식으로든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다. 다시 그 자리에 다른 인물이 앉게 되는 식의 순환은 일상처럼 반복된다. 뜀틀의 발 구름판처럼 디디고 올라, 높이를 추구해야 한다. 뛰어오름은 발생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 자연, 조직 등의 매개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종교가 생겨난 배경의 단면에는 이런 점이 깔려 있다. 물을 무서워하는 침팬지들도 집단 행동을 하기 전, 폭포수의 끝자락에서 자기들끼리 집단 의식을 행한다. 사냥을 잘 하기 위해, 다른 집단과 싸워 이기기 위해 물이라는 악수를 두면서까지 자신들을 강하게 이끌어낸다. 이것이 발생이다. 종교와 샤머니즘에서 재물을 바쳐 위험을 모면하려 했던 점은 그것을 이루어내려는 몸부림이었다. 인간은 발생을 위해 그 동안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든 조직이든 버텨나갈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인간과 조직이 정체성을 고민하게 될 때,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지 고민한다. 그 순간 발생이 필요한 것이다. 근, 현대에는 발생을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의 논리를 끌어들였다. 그것에는 역사, 철학, 문학 등을 통해 인간의 탐구를 주로 하였다. 발생은 극단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과제이기도 하다.
아마도 386세대들이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탐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들 스스로가 억압된 현실을 벗어나려, 가장 뚜렷한 안경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시력에 맞는 안경은 눈의 대체효과를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지러울 수 밖에 없다.
그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간다’에서 이점을 정확히 짚고 계시다. 좌도 우도 한 곳으로 치우치면 절대 날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계시다. 그래서 균형은 국가와 사회를 올바르게 하는데, 조타수 역할을 한다. 아직도 한국 사회의 조직과 정치가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을 그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려 했던 것도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자기 판단이 있었다고 본다. 한국이 처한 정세와 민족을 다루는 편이 훨씬 중한 사안이라고 여겼다고 본다. 그 속에서 발생을 찾으려 했다.
여타의 지식인들과 갈릴 수 밖에 없었던 이념에서 벗어나려 했던 점도 발생은 그것에서 일어나지않기 때문이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는 발생을 위해서 정확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제안하고 있다. 그 동안 출판한 책들에서 당시에 알 수 없는 정보들과 현안들을 들여와 관점 확립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음모와 거짓에 쌓인 사실이 드러나면 당국은 조치를 취하고, 감시를 하였다. 이것도 소멸과 생성의 반복이다. 하지만 그가 다른 점은 발생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봄에 씨앗이 지면을 올라 새싹을 피듯, 지면 속의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려 했다. 겨울에 그것이 추운 날씨를 잘 보내고 봄에 피듯, 그는 시련을 견뎌내며 발생을 해냈다. 그것의 과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책이 ‘대화’이다.
‘대화’는 다른 형식의 자서전이다. 인터뷰 형식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대화를 하면서 맥락을 짚어낸다는 점이 남다르다. 여타 자서전과 다른 점은 삶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다기 보다는 좀 더 현명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 세월의 집합체가 대화이며, 리영희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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