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의 숲에서 가을 하늘을 본다

일반부문 3등작

동양고전의 숲에서 가을 하늘을 본다

신영복, 『강의: 나의 동양고전독법』, 돌베개, 2006.

전북 익산 황등중학교 교목(학교목사) 겸 교사 한승진


내가 좋아하는 말로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공자의 고제(高弟)인 증자(曾子)가 “군자는 글로써 벗을 사귀고, 벗과의 만남을 통해 인을 보강해간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오늘 우리에겐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정보가 홍수처럼 엄습한다. 그러나 ‘풍요속의 빈곤이랄까’ 이러한 지식정보의 대량생산물 속에서 정작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한 깊은 사색과 통찰을 느끼게 하는 것은 드문 것 같다.

이런 나의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내고 탄성을 자아내게 한 책이 바로 신영복의『강의』이다. 나는 이 책을 접하면서 그야말로 동양고전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구절 하나하나에서 나의 삶을 반추해보게 하였고, 참된 가치를 되새겨보는 깊은 사색으로 이끌어 주었다. 더욱이 이 책의 강점은 그의 글쓰기가 보여주는 장점이 그렇듯, 경어체로 독자에게 예의바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편안함을 준다. 그러면서 저자 특유의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비판적 지성이 느껴진다.

첨단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양고전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우리는 옛 것들에 관심을 갖는가? 그 이유는 ‘근대성의 한계’에 대한 회의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물질 추구와 효율성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궁극적 의미’가 사라지고, 오직 도구적 합리성만 판치는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목적이 결여되고, 의미가 사라진 삶이란 불행이다. 그런 점에서 동양고전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는 개항 이후 1백여 년 동안 ‘모방적 근대화’를 진행해 왔다. 물론 문화 교류를 위해서는 모방도 필요하고 학습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와 서양의 관계는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강압적이었다. 우리는 서양을 대리한 일제 식민지, 미군정, 그리고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경제·군사·문화적으로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지렁이도 밞으면 꿈틀한다”는 말처럼,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버리고 일방적으로 남의 것을 모방만 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 이러한 고뇌들이 오늘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묻게 되었고, 치열하게 확인해가고 있다. 드디어 역사적 경험에 근거해 좀 더 우리에게 친근한 방식으로 합리적인 사회를 이룩하려는 갈망들이 우리 내부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뿌리와 경험과 역사적 기억들을 반추(反芻)하면서 좀 더 성숙한 우리의 문화를 일궈 나가려는 ‘자생적 근대화’ 혹은 ‘토착적 근대화’ 에 대한 열망이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이 방송사들의 매체 상업주의에 의해 주도되면서 동양고전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되거나 과대 선전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도 한다. 좀 더 다양한 경로를 통해 건강한 방식으로 동양고전이 대중에게 가까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야말로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이 특정 인기인에 대한 광신적 숭배로 그치거나, 가볍게 다뤄지거나, 폄하될 것이 아니라 우리문화에 대한 열망들에 의한 시민운동과 같은 대중적이고 건전한 방식으로 연결되었으면 좋겠다. 예컨대 동양적 관심이 가미된 시민운동이나 연합체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현대문명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모색해나가면서 생태·환경 문제와 관련한 기(氣) 수련이나 선(禪) 체험이 얼마든지 결합될 수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서당이나 향교를 예절 교육과 개인적 도덕과 사회적 문화윤리의 성숙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신영복, 그는 동양고전을 읽어감에 있어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그의 동양고전 읽기는 치열한 삶을 통해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런 독서 자세는 바른 독서습관을 위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한 시간쯤 책을 읽고 나서 반드시 30분 정도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머리 속에서 정리해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저자와 책의 권위에 눌려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자칫 건전한 비판정신을 상실한 지적 노예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동양고전을 읽어나가는 자세에 대한 하나의 기준점을 제시해준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 대한 그의 말이다.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방법으로서 ‘온’은 생환(生還)과 척결(剔抉)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되새겨보면서 이를 내 방식대로 이해해 보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온고이지신’을 제대로 구현함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전통과 인습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전통(傳統)은 더욱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하지만, 인습(因襲)은 반드시 타파해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전통적인 가치관인 근검, 절약, 효, 대가족제 등은 퇴물 취급당하기 일쑤이고, 잘못된 인습으로 굳어버린 공직사회의 부정부패, 학자들의 논문 표절, 망국적인 지역감정, 패거리 문화, 권위주의 문화, 가부장적 기업의 세습, 과정보다는 결과중심 등은 ‘관행’이라는 미명 아래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통이 아닌 인습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타파해 나가려는 결단을 지녀야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온고이지신일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삶이 어우러진 역작이다. 그러기에 그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대작이다. 그는 그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엘리트이다. 그의 집안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의 가풍을 이어받았고, 그의 부친은 학교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학력은 어떠한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를 나온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로얄 패밀리 출신이다. 그는 앞만 보고 달려 나간다면 성공신화를 창조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출세와 성공을 갈망하는 과정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그의 삶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암울한 현실을 온 몸으로 감내한 세월 그 자체였다. 그는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수형생활은 20년 20일 만에야 가석방이라는 형식으로 끝을 맺었다. 오랜 세월 영어의 몸으로 보낸 그의 암울한 삶은 세상을 향해 분노를 폭발해낼 것만 같다. 그러나 그의 수형생활은 놀랍게도 아름다운 문학으로 이 시대의 모순을 꿰뚫는 통찰로 승화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것이 바로 그의 첫 저작인『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 책을 보면 그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게 연대의식을 강조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연대성은『강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머리 속에서만 머문 죽은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온 몸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진보적 지성으로 잘 드러났다. 그는 특유의 서체를 만들어낸 서예가이기도 하다. 그의 서체를 가리켜 ‘어깨동무체’ 혹은 ‘연대체’라고들 한다. 이는 그의 서체가 담고 있는 사상적 깊이를 잘 형상화한 말이다. 바로 이 서체 속에는 개인주의적 지성을 넘어서는 여럿이 함께 어우러지는 ‘더불어숲’을 지향하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가 지향하는 인간관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다수가 함께 살아가는 연대성을 역설(力說)한다. 우리는 서로 잇대어 살아가고 상호의존적으로 살아야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가치가 무한경쟁, 약육강식, 일등만 인정하는 사회라는 구호는 너무도 비인간적이다. 우리가 지향할 방향은 그가 읽어낸 노자도덕경의 한 구절 “상선약수(上善若水)”와 같이 혼자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짐으로 연대하며 관용과 열림과 나눔의 사회를 이루어가야 한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요청되는 동양고전의 지혜일 것이다.

나는 오늘 작은 농촌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교육관을 설정해보았다.

일등만을 인정하는 교육

환경을 죽이고 물질을 숭상하는 교육

기계와 기술이 인간을 대신하는 교육

그런 메마른 교육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지도자가 아니라

더불어 살 줄 아는 열 명의 사람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