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도전, 절반의 스펙트럼: 性的인 삶에 도전하기, 性에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기

학부생부문 다른 서평들

절반의 도전, 절반의 스펙트럼:
性的인 삶에 도전하기, 性에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기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연세대학교 사학/사회학/심리학 이상


미리 설명을 하자면, 언젠가는 이 책에 관한 나의 감상을 글로 적겠다는 욕심이 있었고 그 소망을 이루리라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일상을 경험하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삶을 살아가는 건 자연스러운 하나의 일인데, 이 속의 고민과 경험을 풀어낸다는 것은 두 가지의 한계가 있었다. 하나는 고민과 경험을 풀어낼 적절한 언어가 없었고(지금 나의 언어도 결국에는 ‘누군가의 언어’ 이다), 하나는 고민을 말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대다수’ 로 칭하는 누군가에게 몹시 불편하며, 생경할 수 있다. 나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서평’ 이라는 장르를 통해, 글이라는 방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지금도 도전은 진행형이며 끝이 없는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엇에 대해 도전하는가?

내가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그때 이 책의 존재를 알았고, ‘열정은 가득하나 언어가 없었던’ 나는 이 책을 소중하게 보고 또 보았다. 그 후 시간이 지나 이제 고학번의 길을 걷는 내가 이것을 다시 읽어보니 예전엔 미처 몰랐던 부분이 훤히 읽혀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 문득 문장이 생소하게 느껴져 놀랄 때도 있었다. 내가 1학년 때는 성 차별의 굴레 속에서 숱한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면, 폭넓은 시각과 언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지만, 책은 잘 읽혀지지는 않았고 놀라운 사실을 접할 때마다 이것도 몰랐던가싶은 부끄러움에 눈이 떠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려웠던 기억이, 이 책에 대해 가진 나의 첫인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성주의(‘페미니즘’ 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나는 ‘여성주의’ 라는 단어로 글을 쓰려고 한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다면 입문서로 과감히 이 책을 권한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아마 이러한 질문일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고 싶은데, 독학용 교재로 좋은 것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혼자서 책을 읽으며 외국어를 익히겠다는 것이다. 이 책을 술술 읽으면 외국어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라는 기대. 그리고 또 하나는, 외국어를 어쨌든 내 것으로 유창하게 구사할 만한 수준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기대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자신의 소중한 시간 중 일정 부분을 할애해야 하고, 언어라는 건 상호 사이에서 일어나는 활동이자 소통 수단이기 때문에 언어를 공유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다음날 일어나면 외국어를 ‘잘’ 할 수 있음을 기대하고 ‘독학’ 하기를 꿈꾼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두고 입문서라고 표현했지만 솔직히 약간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입문서라는 이름에 따라가는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보았다가 이해가 가는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는 막연함에 책을 덮을 수도 있고, 관심이 없는데 이 책을 보았다면 왜 이렇게 세상을 불편하게 사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가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는 인상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 표지에는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결코 한국적이지 않듯이, 페미니즘이라는 학문과 페미니즘이라는 삶의 지표는 서구의 언어로 가득하다. 그래서 젠더, 섹슈얼리티, 아이덴티티 와 같은 단어의 차이와 상황마다 달라지는 미묘한 정의 때문에 어려울 수가 있으나, 이 책의 경우 모든 시각과 공간을 한국 사회로 상정하고, 한국 사회에서 공감할 수 있는 주제어들로, 한국 사회 일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폭력(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성 소수자, 성매매, 군 위안부, 군사주의와 밀접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 문화, 성폭력 생존자를 접하는 시각 등등으로 다양하다. 이것들은 중구난방으로 나열되는 것처럼 보이나 이 중 하나가 빠진다면 다른 하나를 설명하기 어렵다. 모두 ‘性’ 이라는 인간의 구성 요소에서 나왔고, 이것은 긴밀하게 일상과 공유되고 있다. 군대와 관련된 화제에서는 여성과 남성간의 ‘대립’ 이 잊을만하면 등장하며, 이것보다 신경은 덜 쓰지만 남성 동성애자가 군대에서 갖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토론‘ 이 이루어진다. 트랜스젠더는 어떠한가. 여성의 육체에서 남성의 육체로 자신의 성을 찾은 ftm(Female to male)들 중에 어떤 이는 남성성을 어떻게든 증명하겠다는 생각에 군대를 희망한다. mft(Male to Female)은 어떠한가. 이들은 자신이 여성임을 알고 있는데, 자신의 성이 신체와 어긋나기 때문에 군 입대 문제로 진통을 겪을 수 있다. 두려운 것은 공동 생활을 하면서 남성과 시공을 공유해야 한다는 공포와, 군대에 가는 순간 자신이 사회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남성으로 확인되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여성으로 자신의 성을 되찾은 트랜스젠더분이 슈퍼모델로 데뷔를 했고, 안타깝게도 이러한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군대 가기 싫어서 성기를 잘랐다‘ . 지금 한국의 현실은 이러하다. 분명 사회는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었고 남성의 언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간담회나 세미나가 열리면 어느 남성은 자신은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인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잠재적인 가해자로 몰아가는 것 같아 불만이 가득하다고 토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주제어가 있다. ’성폭력‘ , ’남성은 가해자‘ 라는 단어.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하고 반대를 택하거나 둘다 택하지 못한 경우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따라오는데,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성은 가해자라는 정의되지 않은 명제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금 다수의 피해자가 어린이(여성)와 (성인)여성인 상황에서 성폭력 가해자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와 가해자는 ’어떻게 성폭력 가해자가 되는가‘ 라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양육되고, 기대하는 사회적 가치가 다르다. 무성적인 상태에서 태어나 남성으로 길러지고 여성으로 길러진다. 그렇기에 여성의 언어가 다르고, 여성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도는 남성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가 남성중심적이라는 현실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성중심적으로 바꾸자는 사고가 아니다. 그러한 현실 또한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닐 것이다. 남성중심적이 싫다면 여성중심적으로 바꾸자는 사고가 남성(기득권)의 언어이다.

여성주의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정의하는, 자신이 갖는 섹슈얼리티를 존중하고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중심적인 세상을 살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순간 위험한 여자, 못된 여자, 사회 부적응자라는 낙인이 따라온다. 이 사회에서는 여성의 단결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며,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의 머릿속에 성소수자에 관한 개념과 정의가 배재되기 때문에 등장조차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왜 지금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가? 지은이는 여성주의가 결코 이분법적인 사고를 긍정하고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소통이 가능해지며,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여성주의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남성’ 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남성의 언어로 생각하고, 남성의 언어로 말하기를 원하는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을 시작할 때 내가 우려했던 것은 나 또한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하기 위해 구사하는 언어가 이 또한 남성의 언어라는 한계에 부딪히지 않을까라는 걱정이었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며, 나는 ftm트랜스젠더이다. 그러나, 지금 나를 정의한 두 가지 역시 나를 온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남성(온전한 Male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이 저지른 성폭력의 피해에서 ‘살아남은’ 것이 바로 생존자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성 이외에는 가능성과 상상의 제한을 두는 사회 속에서 나의 존재는 변태적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나의 젠더가 즉 나의 자연스러운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성 아니면 여성이기를 강요받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당신은 왜 여성/남성인가요? 라고 물으면 온전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누가 사람들의 입을 막고, 시각을 걷어내었던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 서로 행복하게 사이좋게 지내요’ 라는 정부의 슬로건같은 것이 아니었다. 네가 사는 세계에 의문을 던져라. 너는 누구인가? 너의 말하기 방식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었다.

이를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불쾌한 경험을 했을 때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갖게 되는 죄책감, 성폭력 피해에 대하여 용기있게 말을 했을 때 ‘그러게 몸조심하고 다니랬지’ 라든가 ‘여성이 꼬리쳤을 것’ 이라는 생각, ‘너도 즐겨놓고 왜 이제 와서 그래’ 라는 반응이다. 그래서 피해를 당한 사람(여성)은 내 말하기 방식이 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를 시켜야할지 라는 물음으로 가득찬다. 위와 같은 반응이 어머니와 같은 가족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 여자는 ‘어머니’ 아니면 ‘애인’ 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성은 수월한 삶을 살기 위해, 아니면 인식하지 못한 사이 명예 남성이 되거나 남성의 입맛에 맞춘 여성으로 살기를 선택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 라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남성은 여성이 성적 주체이면서도 동시에 성적 주체가 아님을 원하며, 여성은 순결하면서도 동시에 성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남성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꾸미고 다닌다고 ‘촌스러운 말’을 하는 여자는 없고, 나를 위해, 나의 만족감을 위해 꾸미는 능력있는 알파걸의 모습을 보여주며 ‘여성부도 있는데’ 이제 여성상위시대가 아니냐며 불만의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남성을 당황시키게 하는 존재이며, 이럴 때 사람들이 주로 쓰는 논리는 이러하다. ‘당신의 딸, 누이가 성폭력을 당했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성폭력 피해여성과 알파‘걸’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을까? 여성 상위시대가 나오는 게 아닐까 갖는 두려움과 불만은 어디서 촉발되는 것인가. 저자가 말하듯, 여성주의가 기존의 보편성, 객관성, 평등 개념을 해체,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제일의 원칙은 피해자 중심주의인데, 남성들은 이를 두고 가해자도 사람이다라는 ‘가해자 인권론’으로 맞서고 있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여성이라고 말할 정도로 여성은 보편적이면서도, 여성학이 개설되는 특수한 존재이다. 소수자들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 언제나 거론되는 단락은, ‘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인, 노인, 노동자,...’ 등등이었다. 여성 이외의 경우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괄하기에 ‘자’ 또는 ‘인’ 으로 표기되었는지, 아니면 아예 무성으로 배제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우선 여성만 살펴보면, 슬픈 여인은 있어도 슬픈 남인은 없듯 人이라는 단어가 영어의 Man처럼 남자임을 뜻하기 때문에 앞에 여성을 붙인다는 것은 특수한 집단이기 때문에 별도의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모든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하였는데, 현행법에 의하면 소집 대상은 남성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과연 인간인가 아닌가? 억울하면 너도 군대가라는 말을 듣자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갖는 제도적인 굴레를 똑바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문화적인 굴레의 영향은 무서울 정도로 굉장하다. 된장녀, 루저녀, 꿀벅지와 같은 단어는 여성을 얼마나 가시적으로 보고, 여성이 타인의 시선에 의한 대상물이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키가 작은 남성은 ‘루저’ 라는 발언을 한 어느 ‘여대생’(대학생도 여자대학생)은 주민등록번호가 2로 시작한다. 그럼 이 여성은 루저인가?

나는 여성이란 어떻게 태어나는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물음과 내가 남성/여성인 이유를 고민해 본 적이 있던가? 나는 누구일까? 라는 물음이 책을 읽는 동안 저절로 스며들었다. 저자는 무엇을 두고 페미니즘의 ‘도전’ 이라고 하였을까. 보통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그것이 가장 쉽다) 무엇이 남성중심적인 사회이고 모순인지 모르는 그/녀의 사고와, 여성주의에 관심은 있지만 동시에 갖게 되는 고민, 그리고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된 당신의 사고에 대한 도전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이성애자들의 평범하면서도 사적인 공간인 가정이 非 이성애자들에게는 삶의 현장이고 투쟁의 공간이 되었다. 여성은 여성이되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표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했다. 나는 부제로 ‘성적인 삶에 도전하기, 성에 도전하기’ 라는 제목을 정했는데 이러한 제목을 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목과 같은 물음과 목표를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저자가 일상에 스며드는 기술 방식으로 고민을 사유했기 때문이다. 한 주제씩 읽다 보면 ‘아 이런 공론이 있었구나’ 하며 예전에는 인지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던 사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주제들이 많이 있다. 만약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혹시 어렵지 않을까라는 이유로 꺼려진다면, 도서관에서 공부하듯 읽지 않고 뉴스와 신문의 기사를 접하고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조금씩 보면 더욱 주의깊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 책은 그동안 끊임없이 진행된 도전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아니라 도전을 품고 이러한 도전을 삶 속에 진행하는 게 어려웠음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양성 평등’ 이라는 위험한 사고에서 ‘성 평등’ 이라는 사고로 전환하는 과정은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것을 읽으면서 솔직하게 느꼈고, 앞서 기술했듯 나는 왜 여성/남성인가? 라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물음들을 던져서 성 평등한 일상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을 이 책은 담담히, 혹은 긴박감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 인 이 부분이 역으로 사람들에게 어려움과 피해를 주고 있고, 슬프게도 그것은 차이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사회적인 남성의 절반은 남성이 아닌 것들이었고, 이들은 단락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주체가 남성 혹은 남성이 아닌 이들에게 하나씩 질문을 던지고 있다.당신이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진실인가? 당신과 내가 체득하는 인권이란, 과연 같은 인권일 수 있을까?

페미니즘의 도전 1부의 거의 끝머리에, 저자가 여성주의와 여성학에 관한 편견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발췌하며 페미니즘의 도전을 통해 본 세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 한다.

만일 여성학이 어렵다면, 그것은 여성학자가 현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주의가 익숙하지 않은 세계관이기 때문이다.……여성학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학이 쉽다면, 이는 우리 사회의 통념에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그런 여성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정희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