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갑니다”

학부생부문 다른 서평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이동진


편지를 쓴다는 것 - 2009.10.30 공연장에서 연극을 보고

글은 기록되어 남는다는 점에서 기억에만 존재하는 말보다도 사람을 구속하는 힘이 강합니다. 하지만 편지는 묘한 글이라서 보낸 뒤에는 글쓴이가 자신의 글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말보다도 쉽게 잊혀집니다. 의식의 흐름 그대로 표현하는 데는 말보다 글이 더 느리며, 글은 기억의 의무를 뇌리가 아니라 종이에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기억해야 한다는 의식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편지에 쓰는 글은 자신이 뱉어놓고도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글이 되어버립니다. 편지는 받은 사람만이 유일하게 내용을 온전히 알고 있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행위는 지극히 남을 위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편지의 특성을 글쓴이가 주지하고 있다면 글쓴이는 자신의 글이 수신인에게 가하는 개입성―이는 편지가 불특정 다수가 아닌 특정한 사람에게만 읽히기 때문에 기인합니다―까지 의식할 것입니다. 그리고 받는이에게 어떠한 측면에서든 ‘남음’이 있기를 희망할 것이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동안 글쓴이는 ‘나’와 ‘너’에 관해 주체적으로 사고하게 됩니다. 자신을 발견하는 가장 확실하고 적절한 방법은 타인과의 비교임을 생각해볼 때, 결국 ‘나’와 ‘너’를 고민함은 자아의 발견으로 귀결됩니다. 또한 잡힐듯 안잡히는 의식의 연못 속에서 언어라는 뜰채로 의식을 건져내는 과정은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진실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제한된 지면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나아가 계발하는 것이기에 또한 지극히 나를 위한 행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편지는 이러한 양면성을 가지기 때문에 나의 글을 타인에게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와 너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신영복이 옥중에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신영복과 지인들의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저 또한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신영복과 관계맺게 되었습니다. 그가 옥살이를 하면서 받았던 고통은 그가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고뇌가 되었고 다시 깨달음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편지에 녹아있기 때문에 그의 편지는 그의 지문처럼 타인과 구별되는 인생이 배어있습니다. 제가 그와 맺은 관계는 구속된 공간 속에서 영혼의 자유를 갈망한다는 공감에서 출발했습니다. 저는 올해까지 2년간 태백산맥 자락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교통의 오지에 갇혀서 쉽게 나가지도 못하는 군생활은 계급사회 그 이상의 고통을 주었고, 저 또한 지인들과 편지를 왕래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무기한의 옥살이와 2년간의 군생활을 견주는 것은 어쩌면 과장될 수도 있지만, 남 죽을 병보다 제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다는 범인(凡人)의 심정은 저도 피할 수 없기에 감히 그의 옥중서신에서 제 지난 군생활을 대입해 보았습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저는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그의 편지 속에는 제가 군대에서 했던 고민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것은 글쓴이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생각해 볼 때, 글 속에 담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과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같다는 반가움은 다른 무엇에 견줄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의 삶과 저의 삶이 같을 수 없기에 그 표현방식은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 못한 생각의 길을 그가 걸어갔고, 길들이 갈라져 굽이치다 다시 만나는 모습은 무형의 장관에 가까웠습니다. 갈라진 길이 다시 만난다는 것은 제가 가지 않은 길이 결국 이어진다는 것을 증명해주며, 또 제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해서 듣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식의 뿌리에서 출발하여 다른 언어로 제련되어 표현되는 모습은 그저 기쁘기만 했습니다.

이제 신영복이 쓴 편지를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대 또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리라 믿기에 그가 쓴 편지는 그대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그대에게 쓰는 이 편지 또한 나의 글이기 때문에 그대에게는 ‘신영복의 편지’가 아닌 ‘내가 본 신영복의 편지’를 전하려 합니다.

항상 배우는 삶 - 2009.11. 문화관 나무 그늘 아래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것을 배움이라고 하면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다짐은 곧 많은 것을 느끼겠다는 다짐으로 치환됩니다. 느끼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합니다. 세심한 곳까지 호기심과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영복은 감옥 속의 닭에도, 수인들의 욕설에도, 자신이 입고 있는 수의에도 눈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오의(奧義)를 찾아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에 있어도 자신이 주인공이면 자신이 서 있는 곳 전부가 진실입니다. 변할 것도, 배울 것도 하나 없는 감옥 속이라고 생각해버리면 자신의 삶 또한 나아감이 없게 됩니다. 결국 감옥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에 이르러서야 주위의 사소한 일상에서 진리를 깨닫고, 험한 인간 군상 속에서 성인 군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배움은 사소한 것에 있습니다. 철마다 돌아오는 감기를 앓으면서 그는 소란피우지도 않고, 억지로 건강을 되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신열과 몇가지의 증세, 심한 피로감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감기가 가져다 주는 모처럼의 합법적 게으름을 즐기며 지나온 삶을 사색하고 정리합니다. 또한 신영복은 간간히 들어오는 새로운 식구들의 모습 속에서 저마다 지니고 있는 진실을 알려 합니다. 이는 수의(囚衣)를 입고 있는 죄수를 죄수로 볼 때는 불가능한 일이요, 사회가 그에게 붙여버린 죄인의 딱지를 선입견과 함께 제거하여야만 가능합니다.

그가 말한 대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의 생각에는 모든 인생이 가지는 동질적인 가치와 상응하는 소중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죄수라도 ‘그의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은 대학교수든 대통령이든 함부로 좌지우지 할 것이 아닙니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라는 공자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정치적 범죄에 연루되어서 감옥에 갇힌 그는 생계형 범죄를 조잡하다고, 또 천인공노할 범죄를 잔인하다고 하면서 다른 이들을 백안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고 모두에게서 배웠기에 도리에 우리게에 배울 점을 제공합니다. 주위에서부터, 사소한 것에서부터 그는 배웠기 때문에 그의 배움은 책 속의 격언처럼 공허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과 경험으로 맺어졌기에 무게감을 가집니다.

그는 또한 자연으로부터 사색하고 배웠습니다. 불변하는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굳어버린 것 마냥 움직이지 않아 권태롭기까지 하지만, 변하는 관점에서 보면 자연만큼 끊임없이 생동하는 것도 없습니다. 저 또한 군생활을 하면서 사계절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을 지켜볼 수 있는 안목을 얻었습니다. 비무장지대 안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자연만이 완상의 대상입니다. 가만히 북녘을 바라보는 나무의 뿌리쯤에 누워보면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나무는 끊임없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어느샌가 낙엽이 다 떨어지고 겨울이 벌써 한해의 끝을 알린다는 탄식만 할 뿐, 가을이 조용하면서도 그치지 않고 겨울을 마련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감옥이라는 정적인 공간은 그에게 자연을 사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공간의 구속은 오히려 관찰자의 위치를 고정하게 되어서 시간에 따른 관찰 대상의 변화를 잘 알 수 있게 합니다. 무성한 녹음에서, 머지않아 열매맺는 가을, 그리고 또 혹한과 그 속에서 꿈트는 봄의 씨앗을 보면서 그는 희망을 읽습니다. 그 희망은 교도소라는 높은 벽조차 막지 못하는 것이며, 만물을 골고루 덮는 봄볕처럼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 - 2009.11.21 학교에서

그가 꿈꾸는 삶은 결코 혼자서 비롯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의 고민은 그 자신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와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 그와 소식을 주고받는 지인들, 더 나아가 그와 사회의 모든 구성원까지 미칩니다. 그는 사회의 제일 구석진 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단 한사람까지 놓치고 싶지 않아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음을 고민하고 ‘겨울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가 없다’는 친구의 말에 마음 아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선의 본질은 공동선임을 말하면서 그는 더불어 살고자 합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 그는 사회가 수인들에게 씌우는 죄인의 굴레를 벗어던지고자 합니다. 죄명과 형기가 그의 인생을 설명하지 못함이 당연한데 우리는 그러한 기성의 껍질만으로 한 인생을 죄수로만 보려 합니다. ‘관계는 관점을 결정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문패처럼 그의 이마에서 그를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 그에게 얼마나 부당한가’를 말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감옥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꾸민 표정, 걸친 의상은 물론 지위, 재산, 학벌, 경력 등’ 모든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만나자고 외칩니다.

제가 군대에서 느꼈던 부분들도 그러한 부분입니다. 사회와 조직이 부여하는 직급과 위치로 맺어지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를 수반합니다. 그러한 불평등한 관계를 벗어나서, ‘계급장 떼고 남자와 남자’로서 만났으면 좋은 인연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항상 남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 판단의 주체가 또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왜 우리는 알몸으로서 만나지 못할까요.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 혹은 힘들다고 해서 그 아쉬움이 무효한 것일까요. 차라리 그 많은 회의가 필연적이라면, 고통받지 않게 처음부터 혼자 살면 안될까요.

회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불어 살기를 희구합니다. 낙락장송의 고아함 보다는 수많은 나무숲의 어울림을 본받으려 합니다. 인간이 더불어 사는 것은 선택의 영역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미워하다가도 끝끝내 사랑하게 되는 그 본능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녹이는 것은 난방도, 속옷도 아니고 옆 사람의 체온이라는 원시적 우정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불어 살지 않으면 ‘춘래불사춘’이며, 4월 또한 ‘껍데기’라고 단언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삶 - 2009.11.21 방 안 창문을 열어 밤공기를 맞으며

그의 감옥생활은 군생활과는 달리 끝이 없는 구속이었습니다. 지금 죽든, 수십년 뒤에 죽든 옥사하는 것은 매한가지일 뿐이라는 절망감은 단순한 자유의 제약 이상으로 그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현실이 되었지만 그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특사(特赦)를 바란다는 것은 희망보다는 희망고문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그 고통은 비단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지인들의 고통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그에게는 또 얼마나 시련이었을까요. 그렇기에 수인들은 사형이 차라리 무기징역보다 덜 잔인하다는 말을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저는 그의 고통과 그로 인한 번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저의 인생에 발디디고 서서 그의 옥살이를 이해하려 드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동정과 경탄을 가진 악의없는 성질이라도 그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의 상황을 제 삶이라 가정하고 상상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 그리고 그의 상황보다 참담하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삶에서 그것과 유사한 경험을 불러와 그 감정을 증폭시켜보는 것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래 봐도 저래 봐도 가늠하기 힘든 그 시련 속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은 원동력은 삶의 주인에 대한 그의 인식에서 기인합니다. 나의 삶은 나 혼자만의 것만이 아님을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을 스스로 끊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내가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서 내 삶의 편린들을 긁어모아 정리를 시도할 때, 결코 내가 경험한 세상만이 내 삶의 총합이 될 수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남긴 기억은 내가 기억하기에 내 삶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고, 반대로 내가 남에게 개입하여 그에게 남은 내 기억 또한 내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삶은 내가 가늠하기 힘든 수많은 사람에게 흩어져서 내 심장과 함께 맥박질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만의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의 삶의 일부를 끝내는 행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는 그와 소식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서 삶의 희망을 얻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끊긴 듯 가늘지만 미세한 인연의 끈을 믿었습니다. 그 인연의 끈은 나의 것도 그의 것도 아닌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수많은 독자들에게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의 포기하지 않는 삶에의 의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굳이 그의 삶을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려했던 그의 삶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녹아 있습니다.

벽속의 사람 - 2009.11.22 다시 뜨는 해

감옥속의 수많은 벽은 사람을 가둡니다. 그것은 사고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하며,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며 나아가 폭력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벽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넘어서기 위해서 그가 속한 현실을 끊임없이 밝혀내며, 현실 위에서 발돋움하고자 디딜곳을 부단히 찾고 있습니다. 정적으로 보이는 벽 속에서 동적인 움직임은 콘크리트 바닥조차 뚫고 올라온다는 매미처럼 작지만 강력합니다.

편지의 본질적 한계를 생각해 봅니다. 편지에는 글쓴이의 삶의 조각들이 담겨 있지만, 우리가 직접 만나는 글쓴이는 조각들의 모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으며 일종의 잣대로 분석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편지에 담긴 편린들을 모아서는 하나의 삶을 재구성 할 수 없습니다. 이를 알고 한 장의 편지에 하나의 삶을 다 담으려는 시도 또한 무모합니다. 하나의 인생을 종이에 다 담을 수 없는 까닭이고, 나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의 편지를 항상 배우며, 남과 더불고, 포기하지 않음으로 나누어 버렸지만 그것들은 결국 넘치는 삶의 에너지 그 자체입니다.

이제 벽을 넘어서려 합니다. 편지를 통해서 벽을 넘나들기 보다는 벽을 허물어 그대와 만나려 합니다. 편지 또한 하나의 행동이라면 행동이지만 인식과 실천의 이분법에서 본다면 인식에 가깝다고 봅니다. 소극적 실천은 결국 적극적 실천의 시각에서 인식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대와의 편지 또한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서로가 만나서 나누는 그 풍성한 대화에 견줄만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벽을 허물고 자유로운 삶을 회복할 것입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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