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역사에 대한 기록
학부생부문 1등작
공감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역사에 대한 기록
류은숙 저 『인권을 외치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장경훈
‘위피안 법칙’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리고 필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인권이라는 단어 역시 이러한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권’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거기에 필연적으로 붙는 수식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천부’라는 말이다. 즉, ‘천부 인권’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은 마치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다는 인권이 어떠한 노력도 없이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인권을 외치다』의 저자 류은숙이 문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워피안 법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저자는 본 책에서 ‘천부 인권’이라는 용어로 인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권에 대한 치열한 역사를 보여주고자 한다. 가난하고 힘없고 소수자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얻고자 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저자의 책을 통해, 필자는 ‘천부 인권’이라는 ,현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단어를 통해 잊고 있었던 역사를 확인하게 되었다. 즉, ‘인권’이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혹은 태초부터 인간이 지니고 있던 그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모습들을 ‘역사’라고 간단하게 명명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바로 기록된 사건들의 시제가 모호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익숙한 역사의 시제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즉 과거 완료형의 사건들의 집합이다. 하지만 저자가 담아내는 투쟁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과거라고 단절 지을 수 없는 현재 진행형 혹은 미래 진행형의 문제이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소수자들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과 주체만이 다를 뿐이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현재까지도 혹은 미래에도 계속될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으로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투쟁들을 바라보면, 물론 그들이 기존에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부분에 인권이라는 담론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큰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는 있겠지만 그것들이 결코 완전한 성공의 투쟁들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필자의 의문은 바로 이 문제의식에서 시작된다. “왜 이러한 투쟁들은 완전한 성공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인권의 발명』의 저자인 린 헌트는 이 ‘인권’이라는 개념이 성립되게 된 기제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지적하고 있는 핵심적인 기제는 바로 ‘공감’이라는 것이다. 18세기부터 유행된 서한소설(편지형식의 소설)을 통해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공개 고문을 구경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죄수들이 느끼는 고통을 마치 자기의 것인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는 요인들에 의해 18세기 유럽의 사람들에게는 계급과 성별을 초월한 '공감의 가능성‘이 발아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인권이라는 개념이 발명되었다는 것이 린 헌트의 대략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필자는 린 헌트의 주장을 처음으로 접할 당시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하지만 『인권을 외치다』는 필자의 이런 동의의 완결성에 흠집을 만들어 내기 충분하였다. 즉,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린 헌트의 분석은 자칫 너무 긍정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투쟁들의 실패의 이면에는 ’공감의 결핍‘이라는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다양한 민중들(여성, 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빈곤층 등)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도 인간임을,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인간으로서 향유할 권리가 있음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주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담아내는 글들의 문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지적인 차원의 이해만을 원했다면 조금 더 그럴듯한 말로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성격의 방식의 취했겠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이런 지적인 차원의 이해가 아니라 감정적인 차원의 울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단순한 문법만이 담아낼 수 있는 생생한 현실감을 통해, 그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고 그들이 당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을 마치 자신들의 것처럼 느껴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국제기구를 통해 비교적 강제력이 있는 선언문들을 만들어낸 몇몇 사례를 제외한 많은 사례들은 뚜렷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바로 ‘공감의 결핍’이라는 원인 때문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이 공감의 결핍이 발생한 기저를 분석하면서 우선, 마르크스 식의 분석틀을 빌려오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물적 기반인 하부구조에 의해 인간의 사고나 정서와 같은 상부구조가 결정지어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여기서 하부구조를 사회적 차원이 아닌 개인의 물적 기반으로 바라봄으로써, 공감을 요구한 투쟁의 역사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성적 논리는 ‘공감을 통해 연대가 만들어질 수 있고, 이 연대를 통해 사회를 변혁할 가능성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연대의 핵심은 바로 공통의 기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문화와 분업화, 개인화를 완전한 진리인 것처럼 강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통의 기반을 갖는 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위에도 언급하였지만, 서로 다른 생활과 물적 기반을 갖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합일하는 생각과 감정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즉, 개인간 물적인 기반이 엄청나게 다양해진 상황에서, 직업과 생활양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부구조의 공통성을 기대하기가 과거 농경 사회와는 달리 엄청나게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여기에 더하여 사회의 지배 세력이, 서로 물적인 기반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민중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아무리 다르다고 하지만 지배계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하부 구조의 교집합을 찾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서로간의 공감과 연대, 그리고 그를 통한 저항을 두려워하는 지배세력들은 이들 간의 소소한 차이를 극복이 불가능할 정도인 큰 차이로 치환시켜 버린다. 그리고 바로 이점들이 바로 공감의 결핍을 이끌어 내었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외쳐간 많은 투쟁들을 그들만의 투쟁으로 만들어 사실상 게토화시켜 버렸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식의 분석에 ‘상상력’이란 개념을 동원하면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입장이 되도록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주장에 비관적인 입장이다. 그것은 바로 민중들 간의 교집합을 허용하지 않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다. 일반 민중들 간의 서로 다른 직업, 인종, 성별, 재산 규모 등의 차이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정의 내리고 그들 간의 소통이 불가능하도록 구획을 지어버리는 권력이 과거에도, 지금 여기에도 작동하고 있다. 즉,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상상력’이라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강력한 외부조건에서 자유로이 이 선천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조건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공감의 결핍이 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듯, 많은 민중들이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나태함이나 사회적응이 불가능한 성향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가 그들에게 가하는 부조리한 압력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이 주장이 그들이 아닌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 내는데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거의 사실이 현재에 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 필자에게 아쉬움을 갖게 한다. 아니 오히려 업적주의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통용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공감의 가능성이 더욱 닫혀있다고 이야기해야 더욱 정확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여기’에서도 ‘나중-어딘가’에서도 결국 사회 약자들의 공감을 요구하는 외침에는 메아리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인가? 서로 다른 물적인 기반이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질문에 답은 명확히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공감의 회복에 관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서로 간의 교집합을 찾아가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노자는 우리가 우리와 다르다고 보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과 우리 자신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우리 사회를 예로 들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극단적이라는 점에서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만, 그것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인 체제가 가하는 착취와 압력이라는 측면은 대자본가나 권력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동일하게 경험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나 많은 기업에서 고용 불안을 걱정하며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경우나 그 기저 요인을 분석해보면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인 체제를 영속화시키고자 하는 체제의 지배자들은 대다수 민중들이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도록 조정한다. 즉, 국적이나 성별, 고용 형태 등의 현상적인 차이를 본질적으로 만들어 이들 간의 정서적, 이념적 거리를 영속화 절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 약자’라는 점을 민중들이 깨달을 수 없도록 권력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제의 대표적인 현대판이 바로 언론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계층 배반적인 의식을 만들어내는 집단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상위 재벌 1%만을 위한 논리와 감성을 대다수 민중에게 주입시키고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믿게 만드는 이들이야말로 불가능해 보이는 공감을 회복하기 위하여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나와는 이해관계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교집합을 억지로 찾아내어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조금 더 가까운 이들에게 진솔한 교집합을 찾아내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한다.
앞서 필자는 서로 다른 하부 구조를 갖고 있다면 공감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이 소결론의 주안점은 지금 우리에게 주입되고 있는 체제의 이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위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공감을 외치는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진솔한 공감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지각이다. 그리고 이 올바른 지각을 통해서 외현적으로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대다수 민중들 간의 처지가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 중요한 점을 놓친 것이 공감을 요구해왔던 약자들의 투쟁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그들의 외침과 단순한 그들의 문법은 ‘우리는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서 멈춰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외침과 주장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아마 ‘그래 너희는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반응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지금-여기에서 보이는 다른 인권 운동들도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감히 진단해 보고자 한다. 과거의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 그리고 지금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수사법이 바로 ‘우리는 이렇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너희도 겪고 있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선도적인 활동이야말로 계급 배반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필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의식을 버리고 좀 더 자신들의 처지에 알맞은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그리고 이 의식을 통해 그들과 진실한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도 과거에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사회적 약자들의 요구를 나와는 종류가 다른 사람들의 것으로 치부하며 무관심하게 때로는 적대적으로 대하여 왔다. 하지만 인권의 사각 지대라는 군대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 역시 언제든지 그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여있게 될 수 있음을 아니 그와 비슷한 억압을 어디서든지 받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자각을 통해 비록 몸을 함께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에 대해 이성적, 감성적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발전의 경험이 『인권을 외치다』와 같이 과거에는 책장을 넘겨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책을 필자가 읽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주었다.
처음 저자의 책을 접했을 때, 단순히 과거의 투쟁들에 대해 소개만 해주고 있다는 점,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지 않고 있다는 점 등 저자의 무책임함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이러한 공란(空欄)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라는 권위로 인해, 만일 어떠한 현실 진단이나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면 독자들은 그것을 천편일률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위험성이 있고, 이는 진실한 깨달음을 이끌어 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보더라도 그것을 읽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부분을 강조해서 보게 될 것이고 그를 통해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의도적인 공란을 만들어 두었던 점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역사를 배우는 이유일 것이다.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 자율적으로 현대를 바라보고 그를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을 나름대로 진단해 보고자 하는 것 말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독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필자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필자의 분석이 별로 논리적이지 않게 받아들여지더라도, 혹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주장한 내용들을 번복하게 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필자 자신의 힘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을 잊지 않지 않기를, 이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인권을 밥벌이로 생각하지 않는 다는 저자처럼 훌륭하지 않은 필자는 인권 활동을 통해 소소한 밥벌이를 하고자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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