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이 만들어낸 권력에 대한 고찰

학부생부문 3등작

‘감옥’이 만들어낸 권력에 대한 고찰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 2009.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이주희


“나는 인간의 자유를 믿습니다.
상황이 같을지라도 인간이 대처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 미셸 푸코

근대적 개인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푸코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근대의 축은 크게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프랑스혁명이란 세계사적 사건을 통해 민주주의의 물결은 온 유럽을 휩쓸었고, 민주주의는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민족주의를 낳았다. 사상적 대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밑바탕에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확산된 자본주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근대적 흐름 속에서 중세의 신분제와 봉건제에 억압되어 있던 개인들은 해방되었다. 그렇다면 해방된 개인은 진정 자유로워 졌는가.

푸코가「감시와 처벌」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명쾌하다. 근대적 개인은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개인을 억압하는 권력의 기제들이 숨겨져 자유롭게 보일 따름이다. 푸코는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개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 과정 속에서 나타난 기제들을 파헤친다. 푸코가 생각하기에 그 기제의 핵심은 바로 ‘감옥’이다. 푸코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빈번히 지적되는 “억압·거부·배제·소외화 등과 같은 제도적 개념”의 발전과정을 따라가면 감옥의 역사와 일맥상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푸코는 ‘계보학’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계보학’이란 말 그대로 계보, 족보 같은 것을 파악하는 방법론이다. 즉,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파악할 때, 대상이 된 것 그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포함된 복잡한 계보를 풀어감으로써 대상이 나타나게 된 맥락을 함께 파악하는 것이다. 역사는 단선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의 총합 이상이 이루어내는 역동적인 운동이 역사다. 이런 면에서 푸코의 계보학은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고 설득적인 방법론이다. 푸코는 이 방법을 통해 앙시앵 레짐의 ‘신체형’이 19세기에 ‘감옥’으로 그리고 ‘감옥’ 시스템이 확대되면서 권력과 결탁되는 변형을 추적한다.

푸코의 추적은 아주 잔인한 형태의 신체형을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공개처형의 장면의 잔인함은 범죄에 대한 경계와 동시에 절대 군주의 권력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체형 의식에서 중요한 “관객”인 민중들이 권력에 대한 저항담론을 생성하는 장이기도 했다. 민중들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처형을 방해하고, 사형집행인의 손에서 사형수를 탈취하고, 폭력에 의존하여 죄인의 사면을 얻어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형집행인을 공격하고, 재판관을 매도하고, 판결에 대해 큰 소통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폭동에 대한 제재로서 사형 선고가 내려졌을 경우에 이러한 사태가 빈번히 발생했다.(105면)" 이렇게 수형자의 신체는 민중과 중앙 권력이 대결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의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신체형은 소멸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사형수에 대한 통치자의, 신체를 둘러싼 (민중들과의) 대결 상황을 제거해야 하고, 군주에 의한 보복과 민중의 억눌렸던 분노 사이에서, 사형수와 사형집행인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격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123면)” 필요성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인구에 대한 새로운 관리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사회적 부의 증가는 경범죄가 늘어나는 양상으로 이어지면서 그 당시 지식인들은 범죄를 좀 더 세분하게 분류할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형벌개혁의 주역들이었던 법학자, 법률가, 판사, 입법가 등이 신체형의 소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신체형을 없앤 이유가 신체형을 당하는 사형수에 대한 ‘인간적’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에서 신체형을 더 이상 허용하지 말자는 담론을 형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경범죄의 증가는 형벌체계에 대한 개편을 요구하게 된다. 경범죄를 신체형으로 처벌한다면 민중들의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범죄자 개인의 특성과 일치하는 형벌, 즉 형벌의 개인화에 대한 요구가 일어났다. 이 개인화는 근대 형법의 전체 역사 속에서 대단히 무거운 짐이 되었다. 바로 그것이 개인화가 뿌리내리는 지점이다.(161면)” 개별화된 범죄자와 범죄는 린네 식의 분류체계로 체계적으로 분류되고, 이 과정에서 ‘범죄’와 ‘범죄를 범한 신체’는 하나의 개체로서 대상화된다. 신체형의 잔인함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나타냈던 권력은 신체형의 소멸과 함께 소멸한 것이 아니라, 대상화하는 처벌 권력으로 변모한 것이다.

계보학적으로 접근하는 푸코를 따라 형벌체계 개혁에 대한 담론을 살펴보면, 푸코와 함께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범죄자 개인의 특성과 일치하는 형벌”의 담론이 사라지고 감옥에 구금시키는 형태로 일원화된다는 점이다. 감금, 구금의 형태는 비용을 수반하고, “수형자를 나태에서 지내게 하여 그들의 악덕을 증가시킨다(184면)”는 이유로 개혁자들에게 비판받았던 형벌형태였다. 그런데 감금이 순식간에 징벌의 본질적인 형태가 된 것이다. 푸코는 커다란 획일적인 장치인 감옥이 프랑스 전역과 유럽에 확산된 수준이 “행정상의 중앙 집권화의 여러 단계와 정확히 일치(186면)”한다는 점을 발견한다. 고전시대부터 존재하던 감금의 모형을 살펴보면, 수형자에 대한 통제뿐만 아니라 개개인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모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중앙의 처벌 권력은 감금이라는 직접적인 방식과, 관찰을 통한 지식 축적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각 개인을 자신의 권력 하에 두고자 한다. 이제 감옥은 “지식의 도구” 이자 한 개인에 대한 권력 남용이 여실히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감옥의 처벌권력이 중앙에서 한 개인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중앙 집권화된 정부가 사회의 개인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유사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범죄를 처벌하는 권력과 정부의 중앙 권력의 일정한 상관성을 유추해볼 수 있게 된다.

처벌 권력은 사회 전체의 악으로 상정되는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어 그를 ‘교정’한다. 범죄자는 정상이 아닌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감옥은 비정상인을 ‘교정’시켜 정상으로 만든 뒤 사회에 복귀시키는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정상인 그가 필요한 곳은 바로 중앙 정부가 권력을 행사하는 사회라는 장이다. 감옥은 이렇게 정부의 필요에 부응함으로써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감옥에서 비정상인 범죄자를 정상인으로 변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규율을 신체와 정신에 모두 내재화시키는 것이다. 이 규율은 감옥뿐만 아니라 군대, 학교 등 사회화기관에 확산된다. 인간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이런 사회화 기관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 속에서 인간은 규율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이를 내재화시킨다. 규율은 “공간에 따른 개인의 분할”을 실행한다. “개인 분할”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규율은 폐쇄적인 공간, 독방, 서열 중심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이용한다. 이 기술의 기반 위에서 규율은 시간표, 행동에 대한 시간의 작성, 신체와 동작의 상관화, 객체로서의 신체의 유기적 연결 등을 통해 복종하는 개인,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시간과 공간의 구획을 통한 새로운 객체의 탄생인 것이다. 개인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구획된 시공간에서 활동하는 규율의 결과이자 대상으로 기능할 뿐이다.

객체가 된 개인은 중앙 권력이 개개인의 힘을 조립하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권력은 자신이 원하는 개개인의 힘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위계질서적 감시, 규범화한 제재, 시험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그 중에서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격화를 만드는 상벌제도의 기술을 결합시킨(289면)” ‘시험’이다. 시험은 권력과 지식을 연결한다. 즉, 시험을 통해 인간은 그 권력과 지식에 예속된다. 인간은 권력이 원하는 지식을 습득하고, 타인과 경쟁하는 시험을 통해 평가받는 과정을 거쳐 권력의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으로 기능하며 통제와 감시에 익숙해진다.

통제, 감시, 지식의 축적과 같은 요소를 갖춘 권력의 메커니즘이 가시화된 형태는 오래 전 벤담이 고안한 ‘일망 감시시설(Panopticon)’이다. ‘일망 감시시설’은 “개별화한 관찰, 특징 표시와 분류, 공간의 분석적인 계획 배치(314면)”의 요소를 갖춘 기술권력이다. 권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수형자는 감독자만을 볼 뿐 다른 수형자를 보지 못한다. 오직 감독자의 시선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수많은 감방은 감독자의 시선을 위한 작은 극장이 된다. 이제 감시라는 권력 밑에서 감방의 수형자들은 모범수처럼 보이는 연기를 하게 된다. 이를 습관화시켜 비정상인 수형자들을 사회의 정상인에 맞게 교화시키는 것이 이 공간의 목적이다. 푸코는 이를 통해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시키는 감방 안의 수형자들이 교정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이 ‘교정’의 과정이 일상생활에까지 확산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개인들은 타자의 시선과 자기 자신을 객체화하여 바라보는 자기의 시선을 통해 이중적으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한다. 일상 속에 정부가 세워지는 것이다.

감옥의 처벌 권력은 규율권력과 함께 일상생활에 침투했다. 그러나 실제 감옥은 자신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수형자들은 교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감옥 속에서 다른 수형자들과 접촉하면서 범죄를 모의하기도 한다. 또 다른 범죄의 탄생이 시작되는 곳으로 기능하는 감옥은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은 없어지지 않았다. 푸코는 감옥의 실패가 여러 차례 지적되었지만, 실패에 대한 처방은 언제나 똑같음을 지적하면서 감옥의 실패와 개혁은 “동시적 체제”임을 통찰해낸다. 즉, 감옥에서 출소한 재소자들이 사회에 나가서 범죄를 다시 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범죄의 용의자를 잡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집행유예와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에 범죄 기록을 명시하는 방법 등을 통해 사회는 재소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이는 범죄에 대한 원천적인 절멸이 목적이 아니라, 범죄를 보다 효율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권력의 의지가 결부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감옥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감옥의 규율은 군대의 규율과 놀랍도록 유사하고, 수형자들의 노동공간, 수형자를 위한 재사회화의 교육기관, 수감 중에 병이 생길 때 그것을 치료해주는 병원 같은 장치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들은 사회 속의 장치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여기에 감옥의 존재의의가 있다. 즉, 감옥의 시스템을 통해 사회 전체를 감시하는 것이다. 출소자들을 감시한다는 명목 하에 모든 개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분류하고, 감옥과 비슷한 구조를 지닌 사회화 기관을 통해 개인 정보를 취합함으로써 개인을 감시하고 처벌한다. 권력 네트워크는 모세혈관처럼 사회 전체에 퍼져있다. 중앙의 심장부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감시하고 통제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자신의 권력 하에 두고자 한다. 중심부를 장악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주체가 대통령이든, 군부든, 범죄자이든 간에 권력 네트워크의 작동 방식은 비슷하다. 연결고리가 엉키면서 서로 상호작용하며 정교한 형태로 작동하는 것이다. 또한 권력은 국가 권력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법적권력, 기술권력 등 아주 다양한 형태로 우리 안과 밖 도처에 있다.

일상생활에서 공기처럼 숨 쉬고 있는 권력에서 인간의 자유를 외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바로 눈앞에 권력이 존재한다. 학생은 선생님이 권력의 주체가 될 것이고, 자녀는 부모가, 회사원은 자신의 직장상사가 권력 주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감시망과 같은 권력은 눈에 보이는 권력 형태로 가시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권력은 상호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설사 권력에 대한 저항을 행할지라도, 저항담론 조차 권력의 형태가 되어버린다. 군주권력이 행하는 신체형에 대한 민중의 저항담론은 권력으로 작동했고, 이는 지배층의 공포를 불러 일으켰던 것을 기억해볼 때 권력은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도 권력의 생성은 현재진행형이다. 군부에 저항한 5.18민주화 운동과 같은 저항도 저항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시민권력으로 작동하면서 기존 권력을 전복시키는 형태로 작동했다.

푸코는 일상 뒤에 있는 권력의 그물망을 해체하여 그 실체를 폭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근대적 개인이 자신을 뒤덮고 있는 권력을 직시하고 더 이상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생산되고 상호작용하는 권력 네트워크 속에서 주체적 개인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푸코는 권력의 실체를 끝까지 추적하면서 설득력 있게 비판하지만 진정한 개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독자들에게 숙제로 남긴다. 오히려 푸코는 우리에게 자신을 둘러싼 권력을 직시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전하는 듯하다. 그리고 권력에 저항할 때 생성되는 자신의 권력을 바라봄으로써 객체이자 주체인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개인이 되는 출발점임을 암시해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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