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에서 밝힌 연대의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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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서 밝힌 연대의 촛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양창희


꽃나무가 햇빛이 비추는 방향으로 자라는 것처럼, 인간 역시 태생적으로 양지(陽地)를 좇는다. 따뜻한 햇볕 뒤에 찾아오는 싸늘한 어둠이 무서워 인간은 어둠을 밝히는 수많은 도구까지 만들어냈다. 인생길에 대한 지향도 마찬가지여서, 많은 이들은 금과 은과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지지 않는 태양이 빛나고 있는 이 길의 끝에는 인간이 원하는 모든 영광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다 발을 잘못 헛디뎌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사람의 인생길은 거기서 바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어둡고 눅눅한, 불빛 하나 없는 음지(陰地)를 묵묵히 두 발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한 발 한 발 내딛기조차 힘들고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이지만, 쉬지 않고 걸으며 어느새 가슴 한편에 저마다의 촛불 하나씩 켜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 음지보다 더 어두운 음지를 걸어 햇빛보다 밝은 촛불을 켠 사람의 기록이 있다. 신영복님의 옥중 서간집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래, 신영복님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안양교도소·대전교도소·전주교도소 등을 거치며 1988년 8월까지 20년 20일간을 복역했다. 사회의 어떤 ‘음지’보다 어둡고 외로운 음지인 교도소에서, 결코 누구도 짧다고는 얘기할 수 없는 2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그는 자신 앞에 놓인 길을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걸어간다.

사회와 격리된 공간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많지 않았다. 교도소의 각종 노역들과 독서, 그리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것들이 생활 영역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가 남긴 생각과 글들은 단순히 쓴다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많은 편지들에 따뜻한 정이 담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기까지 한 느낌이 드는 까닭은, 편지를 쓰는 일 자체가 생존을 위한 움직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느낌은 책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엽서의 글씨와 그림을 접했을 때 더 생생히 다가온다. 한 글자라도 허투루 적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 엽서 안에, 꾹꾹 눌러 쓴 글자 한 획마다 그가 보낸 인고의 시간과 자기성찰의 사색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그의 수형 세월동안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격동의 역사를 보냈다. 유신 개헌과 독재자의 암살, 군부의 정권 장악과 5월의 함성, 그리고 6월의 민주화가 숨 가쁘게 지나갔다. 그 20년 동안 자신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고자 했던 그의 치열한 자기성찰은 점점 무르익어 간다. 때로는 독방에 갇히면서, 때로는 묵묵히 주어진 노역을 수행하면서 그의 정신은 단단해지고 강해진다. 성찰의 결과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철저하게 제약되어 있는 감옥의 현실 속에서도 가족들과 교감을 나누며, 같은 처지에 있는 수인(囚人)들과 소통하며 그는 삶의 진실을 찾아간다.

징역생활의 다양한 양태에서부터 사회적 관계의 실체까지, 깊은 사색의 조각들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진실, 그가 찾은 삶의 진실은 ‘사람과의 관계’였다. 먼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잊지 않는 편지들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과의 관계가 발견된다. 가족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는 단순히 안부의 확인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는 ‘심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염려의 편지에서 벗어나, 진실과 깨달음을 나누는 대화의 편지를 지향하고자 한다(아버님께 보내는‘염려보다 이해를’). 또한 결혼을 앞둔 동생에게 인생의 반려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점에 대한 당부를 하기도 한다(동생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여자’). 생활을 함께 하지 않은 계수에게도 편지로 서로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계수님께 보내는 ‘이웃의 체온’).

그는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20년 전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작한 아들, 아우, 형님의 모습으로 머무르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소통의 과정 속에서 그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고 변화하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가족은 지속되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 위안을 주는 관계를 넘어 함께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는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징역살이에서 만난 벗, 수인들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에서도 사람과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차가운 교도소의 겨울을 옆 사람의 체온으로 이겨나가듯이, 그는 수인들과 맺는 관계와 그 깨달음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한다.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옆 사람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알아가는 ‘징역 속의 동거’에서, ‘속세’와는 다르게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며 ‘하나하나의 측면들을 개별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전체 속에서 파악’하기에 이른다(아버님께 보내는 ‘짧은 1년, 긴 하루’). 그는 징역생활을 다 마친 동거인을 떠나보내고, 떠나는 사람과 남은 자신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기도 한다(계수님께 보내는 ‘떠남과 보냄’).

인권이 극도로 억압되는 교도소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맺어가는 관계는 교도소 밖의 사회와 결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각자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은 사회에서보다도 더욱 모나게 행동할지도 모른다. 보통의 호의적인 관계마저도 맺기 힘든 특수한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교도소의 특수성을 깨달음의 계기로 받아들인다. 그는 죄명(罪名)이나 형기(刑期)로 사람을 판단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총체를 바라보며, 그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계수님께 보내는 ‘죄명과 형기’). 우리가 평소 맺는 인간관계에서 알기 힘든 진실을 수인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가족과의 소통과 수인들과의 관계에서 느낀 사람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은 ‘연대’라는 원리로 구체화된다. 그는 즐겨 하는 붓글씨에서도 연대의 관계론을 유추해낸다. 획 자체가 아름다워 글자가 성공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획과 획이 서로 만나는 상호 연계의 과정 속에서 서도(書道)가 완성된다는 것이다(아버님께 보내는 ‘서도의 관계론’). 사람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 혼자서는 세상을 절대로 살아갈 수 없으며,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을 그는 홀로 고고한 산봉우리의 한 그루 소나무가 되기보다는 수많은 나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다고 표현한다(계수님께 보내는 ‘비슷한 얼굴’).

삶을 사람의 관계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파악할 때, 그가 이야기하는 연대의 가치는 더욱 뜻 깊게 다가온다. 사람 인(人)자가 생겨난 유래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것이 삶의 양상이다. 모든 이가 다른 이를 필요로 하고 그 관계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연대는 삶의 모습 그 자체임과 동시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발전적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저마다 등에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가벼이 할 수 있다. 우산을 구해다 펼쳐주기보다는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연대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형수님께 보내는 ‘함께 맞는 비’).

20년 수형 생활의 흔적 속에서 신영복님이 조근 조근 들려준 진실은 바로 사람이었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겨울 감옥의 바닥에서 신영복님이 찾아낸 진실이, 연대라는 가치로 굳게 맞잡은 우리 손의 온기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그렇지만 많은 역설이 그렇듯이 통렬한 진실이기도 하다.

이제 그늘진 음지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가슴에서 피어난 촛불의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그 촛불이 일렁이며, 칠흑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작은 불빛이 하나씩 떠오른다. 촛불 한 자루로는 작은 방을 겨우 밝힐 뿐이지만, 수만 인파가 저마다의 가슴속에 품고 나온 촛불은 시대의 어두움을 밝히는 큰 빛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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