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그 이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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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그 이후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고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과정 황진태


2009년 9월 현재 출판사 후마니타스에 따르면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인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2002년 출간이래로 자그마치 11쇄가 출간되었다. 이러한 짧은 기간 안에 높은 판매고는 비단 좁은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게 한몫 했을 것이다. 2002년 당시 학부 1학년이었던 나 또한 그러한 보기 드문 사회과학시류(?)에 휩쓸려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7년 동안 최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정치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전반에서 빈번히 인용되는 화두가 되었다. 새삼스레 부제를 포함한 책제목을 상기해보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한국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저자가 바라보기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한국민주주의의 보수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기존의 냉전반공주의의 헤게모니와 보수독점의 정치구조에 그저 얹혀 있는 외피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특권적 기득구조와 계급구조는 심화되었고, 사회의 공동체적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으며 개인의 삶도 황폐화되었다.”(17면)

이러한 저자의 분석력은 출간 당시 대다수 독자들이 공감하였고 정권이 바뀐 현재에 와서는 더욱 또렷하게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현미경과 망원경과 같은 설명력을 갖고 있다. 책이 출간된 지도 7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단순히 이 책의 내용요약이나 저자의 통찰력에 대한 주례사 서평은 이미 숱하게 재생산되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비슷한 복사판 서평을 쓰는 것은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본 서평은 현재 한국사회의 뜨거운 화두와 저작 간의 접촉을 통하여 현실적인 대안의 한가닥 실마리를 풀어보려고 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그 이후는?

2008년 촛불집회의 정점에서 최장집 교수의 발언은 그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문제없이 받아들여 왔었던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이견이 발생하면서 뜨거운 논쟁을 초래하였다. 당시 논쟁의 불쏘시개가 된 최 교수의 발언은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작동하지 않고 그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서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 운동만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였다. 이를 두고서 ‘직접민주주의는 진보 ↔ 대의민주주의는 보수’라는 구도의 논쟁지형이 형성되었고, 졸지에 최 교수는 진보진영의 비판자들로부터 보수적 민주주의자로 몰리게 됐다. 이번 서평의 핵심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그 이후는?”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비판적 읽기를 통해서 과연 ‘직접민주주의=진보 ↔ 대의민주주의=보수’로 양분된 논쟁의 화합이 가능한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최장집은 보수주의자인가?

그렇다면 과연 최 교수에게 ‘보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영양가 있는 비판일까? 최 교수는 “민주주의는 사회가 서로 갈등하는 이해와 의견의 차이로 이루어져 있는 조건에서, 이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는 정치체제”(33면)라면서 기본적으로 갈등 위에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최 교수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민주화의 완성으로 협소하게 해석하는 보수적인 학자들과는 선을 긋고, 오히려 비판자들과 유사한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최 교수는 “냉전반공주의와 접맥되어 있는 낡은 정당체제를 해체하는 것, 다시 말해 정당의 기반과 구조 자체를 급속하고도 광범위한 사회변화가 만들어 낸 새로운 갈등구조에 뿌리내리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153면)면서 현 정당제의 쇄신을 강조하였다. 이는 비판자들도 동의하는 대안의 하나가 될 것이다. 최 교수 본인이 밝히고 있듯이 저작에서는 샤츠슈나이더의 정당이론, 토크빌의 자유주의 등의 기본적인 민주주의 고전들을 토대로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있다. 설마 비판자들이 보기에는 최 교수가 샹탈 무페, 에네스토 라클라우 등의 직접민주주의 이론가들의 논의를 수용하지 않아서 보수주의자라고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의 시선에서 볼 때 토크빌이 보수적 자유주의자로 단정 지을 수는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최 교수가 샤츠슈나이더의 문구를 인용한 것처럼 “갈등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213면)이라는 인식에 비춘다면 비판자들이 고전에 충실한 최 교수를 절차적 민주주의만을 강조하는 보수적 민주주의자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생산적인 논쟁을 가로막는 과잉비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최 교수에 대한 약간의 변호가 필요했다.

지역은 국가의 봉인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최 교수와 비판론자 간의 합의점을 찾아보도록 하자. 여기서 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자. 최 교수는 수도권으로의 중앙집권화가 민주주의를 약화시킨 중요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는 누구나가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최 교수는 중앙집권화의 문제가 지속되는데 있어서 지역감정이 기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지역주의에 대한 발언을 들어보자.

“나는 한국의 지역감정을 그야말로 비합리적 감정 그 자체로 이해하는 접근에 언제나 반대해 왔다. 그리고 이를 영남이냐 호남이냐 하는 지역간 갈등과 대립의 구조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지역감정 내지는 지역정서란 한국적인 중앙집중화와 이로인한 불균형적 발전이 가져온 하나의 부수적 현상이다.”(28면, 굵은체 인용자주)
“한국에서 지역감정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지역간 차이나 대립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중요한 균열요소들이 이슈화되거나 정책의 쟁점으로 부각될 수 없는 조건, 냉전반공주의의 강한 영향력 때문에 정당체제로 대표되는 이념적 범위가 지극히 협애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문제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208면)

요컨대 최 교수는 지역감정을 중앙집중과 냉전반공주의의 영향력 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예전에 최 교수가 과대성장국가론 개념을 통해서 한국의 국가형태를 설명했던 인식론의 연장선상으로 풀이된다(45면 참조). 그런데 중앙정부의 영향에 의해서 지역감정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인식은 지역을 수동적인 공간으로 이해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중앙=능동 ↔ 지방=수동’으로 보는 이분법화된 공간인식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제출되는 일련의 연구들에 따르면 일찍이 1960년대부터 호남지방에서는 호남비료공장유치, 아시아자동차 공장유치 등을 위하여 호남지방근대화촉진위원회나 전남근대화촉진위원회와 같은 성장연합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전남 푸대접론” 등의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전략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였음을 밝혀냈다. 이는 지역주의가 가시화되었다는 1971년 대선보다 이전에 발생한 사건들이다. 이를 통해서 과대성장국가에서의 강고한 국가의 역할 하에서도 지역에서는 지역발전을 위하여 성장연합이 결성되는 등의 매우 능동적인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능동적인 공간으로서의 지역에 대한 인식은 최 교수와 비판자간의 합의점을 이룰 수 있는 틈새이자 매개다. 최 교수가 강조하는 보수화된 정당제의 개혁은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서울에 위치한 입법기관, 국회의원 등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반면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직접민주주의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각 지방, 지역에서는 행정구역 통합, 4대강 살리기 사업, 각종 개발사업을 둘러싸고, 토건지향적 세력과 이를 반대하는 환경지향적인 세력 간의 갈등이 전개 중이다. 그런데 단순히 최 교수가 인식하듯이 정당제의 쇄신만을 강조할 경우 무수한 인적 네트워크로 얽혀져 있는 지역의 현실에서 현존하는 주민소환제로는 한계가 있으며(최근에 불발로 끝난 제주도 김태환 지사 사건을 상기하라), 각종 개발사업에서 토건지향 세력들의 텃밭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역에서 직접민주주의를 뿌리내리도록 노력하는 것은 최 교수가 우려하듯이 현대 한국정치의 최대 균열인 “사회적 기반이 없는 정치적 대표체제와 이에 대표되지 못하고 저항하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인용자주) 비투표유권자 사이의 균열”(34면)을 메꿀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즉, 단순히 대의민주주의가 우선이냐 직접민주주의가 우선이냐는 식의 제로섬 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지역을 들여다봄으로써 둘 간의 절충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지역에서의 직접민주주의의 진전은 최 교수도 비판한 현 보수적인 정당들의 동원자원이었던 지역을 쇄신하여 보수화된 정당제를 바꾸는 현실적인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절충이 가능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이전(以前)’을 통해 ‘이후(以後)’를 생각하자

본 서평에서는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고서, 지난해 촛불집회로 논쟁이 촉발된 최 교수와 비판자간의 논쟁지형을 발전적으로 합의점을 만들어 보고자 지역을 화두로 제시해보았다. 비단 지역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문에서 이러한 합의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현 이명박 정부의 몰상식을 볼 때, 본 서평의 문제의식은 긴요하다. 본 서평에서 책소개는 거의 생략했었지만 서평의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한 부분만 언급하고자 한다. 최 교수는 보수적 민주주의의 기원을 반세기전 해방 직후 냉전이 도래하면서 여운형 등의 진보세력이 움츠러들고, 이승만과 한민당의 집권으로 보수화된 양당체제의 뿌리가 1980년대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제도권 정치 엘리트와 민주화운동 세력 간의 괴리”(112면)를 벌려놓았음을 목격했다. 정말 역사는 “언제나 익숙했던 게임의 반복”(113면)인듯 하다. 고로 민주화의 ‘이전’을 교훈삼아 ‘이후’를 조망해야 한다. 나는 7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 최 교수의 주장처럼 건강한 정당제의 기틀이 잡히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 교수도 말했듯이 “협약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경쟁의 제도화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내용이라 할 참여의 확대, 즉 경쟁행위자의 수칙, 질적 확대, 엘리트 간 게임의 범위를 넘어 정당과 사회적 기반 사이의 접맥의 확대, 정당간 경쟁의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의 확대 등을 가져오지 않았”(113면)는데 이것들을 확대하기위해서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간의 선순환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번 기회에 다시 읽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부터 <민주주의의 민주화>(2006), <어떤 민주주의인가>(2007, 공저)까지 최 교수의 논의에서는 그를 비판했던 논자들의 논의와 포개어지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음을 발견했다. 즉, 앞으로 보다 섬세한 연구가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난해 논쟁 이후 최 교수도 활발하게 자신과 비판자 간의 사이를 좁히는 구체적인 시도가 아직까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 사회에서 정책정당이 가능하려면 지식사회에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이 제시되고 이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 여러 대안들의 타당성과 현실성이 검토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한국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발본적 비판에 기초하여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미있는 지적 논쟁이 존재하는가? 지식사회에조차 민주화 이후 한국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회피되고 있다.”(36면)

이 짧은 서평을 통해서 의미 있는 지적 논쟁을 하기에는 지면이 좁다. 앞으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그 이후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활발한 지적 논쟁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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