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글자의 상처: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학부생부문 2등작
사랑이라는 글자의 상처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서울대학교 법학부 전혜림
1. ‘사랑을 하라 … 그건 네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야’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그러기에 자유로웠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숲, 한번 들어가면 미치광이가 되거나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는 곳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갔다.
나는 김연수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를 읽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백양나무 숲을 그리고 있었다. 드넓은 만주 벌판에 세워진 백양나무.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신성한 공간.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새빨갛게 일어나는 불길. 그 자유로운 사내는 백양나무 아이의 소원에 따라 그 아이의 가슴에 ‘사랑’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길을 걸어갈 때마다 소음에 가까운 노랫소리로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 놈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밤은 노래한다’의 ‘나’인 김해연은 평범한 소시민의 삶에서 비틀거리듯 이탈되어 버렸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을 시간 순서에 따라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으나 나는 ‘1932년 8월 용정’, ‘1933년 4월 팔가자’를 전반부, ‘1933년 7월 어랑촌’, ‘1941년 8월 용정’, ‘1932년 9월 용정’을 후반부로 나누고자 한다. 연인 이정희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자신의 사랑에 괴로워하다가 이를 점차 극복하는 전반부, 과거의 안정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자진해서 버리고 잔인한 세계와 투쟁하는 후반부로 정리할 수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김해연의 삶을 사로잡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뇨프가 마리아를 구하기 위하여 푸가초프의 진영으로 숨어들어간 행동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2. ‘나는 아름다운 암코양이 휄린느’
나는 이정희가 김해연에게 권유했던 것처럼 도서관에서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라는 책을 찾아서 ‘시계’라는 글을 읽었다. 아름다운 암코양이 휄린느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항상 같은 시간, 공간처럼 무한하고 엄숙한 시간을 읽는다. 김해연은 이정희의 눈에서 자신의 영원한 사랑을 읽었고, 그러기에 그는 그녀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그는 ‘시계’의 마지막 문장인 ‘지금 나는 당신자신처럼 힘이 있고 진정 찬양할 만한 연가를 당신에게 바치고 있지 않습니까.’를 읽고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정희의 반응은 뜻밖이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그녀는 청혼을 승낙함과 동시에 ‘지금 당신은 그리뇨프를 닮았어요. …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리뇨프보다는 푸가초프가 되기를 원하는 마리아랍니다.’라는 말을 한다. 사랑에 빠진 김해연은 자신이 그리뇨프도, 푸가초프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사랑을 지키기 위한 그리뇨프였으며 여기서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사랑에 도취되어 그녀의 손을 한없이 바라보았던 것도 잠시, 어느 날 자신에게 도착한 한 장의 편지로 인하여 김해연의 삶은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사실 이정희(안나 리)가 사실은 거물급 공산주의자 박길룡의 애인이었으며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지인인 나카지마 중위를 유혹, 기밀 정보를 유출시킨 스파이였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것이 드러나자 자살해버렸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후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자신이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불신. 이를 제대로 표현하고자 김연수 작가는 의도적으로 김해연의 직업을 측량사로 설정하였다. 김해연은 땅을 측정하여 건물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 역시 일정한 척도를 이용하여 재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측량의 세계에는 근사치만 있지, 참값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정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안 순간 자신을 속인 연인에게 분노하기 보다는 자신과 그녀를 둘러싼 세상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한 줄 책에 실린 글귀에 위안을 받고, 퇴근하는 저녁 길에 머리 위로 떠오른 초승달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기에 만주의 활극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민생단,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나는 앞에서 김해연은 그리뇨프라 언급한 바 있다. ‘대위의 딸’에서 등장하는 그리뇨프처럼 만일 이정희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하였을 것이다. 비록 이정희가 다른 남자의 연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랑은 변함없다. 그녀가 유서와 같이 그에게 남긴 글에는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 하나 적혀 있지 않더라도. 그 편지가 자신 외의 타인에게 보내져야 했다고 절망하면서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후 그는 창녀와의 정사에, 마약에 자신을 그대로 던져버린다. 이러한 그가 나카지마를 살해하고자 할 때 나카지마는 그를 비웃을 뿐이다(‘사랑 따위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자의 시시한 표정이로군’). 이에 사랑이든 증오든 그 어떤 것도 행동으로 실현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절망한 그는 자살 기도를 하나 이 역시 실패한다. 그는 요양을 하던 중 만난 여옥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눈물만 흘릴 뿐이다.
이는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이정희가 열한 살 차가운 바다를 건너면서 악마처럼 강해지겠다고 읊조렸던 것과는 달리, 그는 세차게 일어나는 파도에 그대로 순응해버리는 인간이었다. 그는 여옥을 만난 후로도 자신의 수동적인 태도를 고수할 뿐 정희의 복수를 위해서는 그 어떠한 것도 하지 못한 채 방 안에 드러누워 거울인지 유리인지도 모를 창을 통하여 단지 자신에게 단편적으로 비추어지는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이에 반하여 여옥은 기존에 자신이 접하던 정희와도, 창녀들과도 다른 존재이다. 어쩌면 자신이 알지 못하던 정희의 모습을 닮았다고 할 수 있는, 순수한 혁명의 아이이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던 세계인 바다, 과거 이정희가 자유를 말하였던 그 공간을 보여주라고 부탁한다. 이에 김해연은 정희를 잃은 슬픔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김해연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여옥에게서 찾을 수 있는 정희의 그림자에 의한 것이다. 다만 사랑으로 인하여 그의 일상적인 삶이 흔들린 것이라면, 새로운 사랑으로 인하여 다시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에 김해연은 여옥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갈 것을 계획한다. 드디어 그는 영국더기에서 정희와 같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또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3.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 여기까지가 소설의 마지막이었다면 한 남자의 슬픈 사랑과 그 치유로서 ‘평범한 이야기’로 끝나버리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1930년대 만주 지역을 휩쓸었던 민생단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김해연은 과거 이정희의 죽음에서 무기력했던 것처럼 유정촌의 학살에서 자신만이 온전히 살아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러나 이에 감상적으로 젖어들기 전에 그를 직접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첩자일 수 있다는 의혹이다. 마치 최도식이 감옥에서서 나오자마자 그에게 던져진 질문과도 같다.
여기서 작가는 연인과의 동반자살을 시도하다 자신만 살아남은 니시무라를 언급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니시무라가 다자이 오사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소설 『인간 실격』에서 연인의 죽음보다는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에서 역겨워하는 주인공과 니시무라가 자꾸만 오버랩이 되었다고 할까. 감옥에서 전향한 후 자신의 갈 길을 잃어버린 니시무라나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최도식. 이 셋은 어설픈 경계인이다. 니시무라의 경우 자신이 변절자라는 한계를 한탄하나 공산주의식 유토피아를 꿈꾸며 만주로 간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살한다. 최도식은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공산주의의 이상을 저버린 채 은행에서 일하는 소시민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만주에서 ‘살아남은’ 조선 공산단원들의 후반부는 이들과 달랐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일본의 앞잡이 노릇를 한다는 혐의를 씌워 조선인들만의 소비에트를 주장하는 민생단을 척결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공산주의자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자신의 민족만을 위하는 나약한 생각만으로는 온전한 혁명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할 수 있으나, 나 개인적으로는 실제로는 외부의 침입에 의해 분열하는 내부를 강하게 다잡기 위해서는 ‘타도할 수 있는’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전략 하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조치라 생각된다. ‘조선인들로만 이루어진’ 소비에트는 일본군에게도, 중국군에게도 없어져야할 대상이었다. 그 결과 무자비한 살육이 진행되었다. 토벌대와의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는 민생단원으로 간주되었다. 즉, 살아남은 자는 자신이 과거 속한 소비에트로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경계에 또 다시 서게 되었다.
김해연의 경우 자신을 경성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다는 상부의 제의를 거절한 채 두 번이나 자신의 삶을 비틀어버린 잔인한 세상에 대하여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빛과 어둠의 세상이 있다면 그 어느 쪽에도 들지 못하는 경계인에서 빛과 어둠을 동시에 바라보는 주체성 있는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망명자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과거 사진관에서 어설프게 흐릿하게 찍혔던 그의 손은 육체적 단련으로 인하여 나카지마의 관자에 총을 겨눌 만큼 강인해진다.
사실 작가가 육체의 단련을 통한 성숙에 대하여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음은 나카지마가 주장하는 ‘렌세이’, 박도만이 안세훈의 튼튼한 육체를 바라보면서 혁명의 순결성이 ‘능욕당했다는 느낌’을 지운 장면에서도 알 수 있다. 김해연의 검은 손은 그의 삶이 무기력한 지식인에서 능동적인 혁명가로 변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김해연에게 돌아온 것은 그가 민생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리고 고문이었다. 즉, 살아남은 자에게는 네 가지 길이 있었다. 운이 좋은 사람은 니시무라처럼 새로운 혁명을 꿈꾸지만, 다자이 오사무처럼 자살하거나, 최도식처럼 변절하거나 또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살해당하거나.
김해연은 그 중 첫 번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가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으나, 박도만을 만나 점차 변화한다. ‘잔인한 세계에 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잔인한 세계 속에서도 늘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힘을 믿는다’는 그의 말처럼, 김해연은 자신이 점차 달라지고 있음을 깨달으며 마침내 이정희의 복수를 위해 민생단원인 박길룡을 살해함에 이른다. 박길룡은 어쩌면 푸가초프에 가까운 사람일지 모른다. 굳이 푸가초프와 박길룡의 차이를 말한다면 전자의 경우 스스로 구시대의 상징인 황제를 자처하였다면 후자는 조선인들로만 이루어진 평등한 소비에트를 꿈꾸었으니 좀 더 진화된 혁명가라고 해야 할까. 아니, 어쩌면 둘 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실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망상을 쫓아 다수를 희생시킨 몽상가라 하겠다.
4.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슬픔
‘밤은 노래한다’의 주인공 김해연이 졸업 문집에 시를 제출하는 등 시인이 되고자 했다는 언급을 통해 작가는 김해연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다른 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소설의 ‘나’ 역시 자살한 여자친구의 유서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래서 그녀와 자신과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쓰던 중 자신의 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등산을 계획한다.
기본적으로 작가와 동일시되는 소설의 주인공은 사랑을 위해서면 무엇이든지 할 듯한 그리뇨프다. 『밤은 노래한다』에서 마리아-그리뇨프-푸가초프의 구조는 여러 번 등장한다. 『대위의 딸』에서 그리뇨프는 푸가초프의 지배하에 있는 성으로 잠입, 푸가초프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하여 마리아를 구출한다. 김해연의 경우는 그리뇨프를 닮았으나, 그보다 더 나아가서 정희에 대한 복수를 위해 푸가초프를 살해함으로써 어설픈 이상주의자가 아닌 진정한 혁명가로 거듭난다. 드디어 그는 이정희가 바라던 진정한 ‘푸가초프’에 가까워졌다.
소설 마지막에서 김해연은 최도식을 찾아가 정희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그러나 정희는 자신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아닌, 자살한 것이 맞다는 최도식의 말에 당황한다. 그리고 최도식의 아이들을 본 순간 그를 살해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정희가 마지막으로 원했던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그 어떤 것에도 지지 않는 그런 평안’을 아이들에게서 발견한 것이 아닐까. 그는 새 시대에 대한 염원. 그 사랑을 파괴할 수 없었다. 최도식을 내버려둔 채 돌아서는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영국더기로 향했다.
그렇다면 이정희는 어째서 자결을 한 것인가. 나는 ‘저를 죽일 수 있는 남자 역시 그처럼 심장이 뜨거워야 할 테니까’라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대성촌에서 일어난 학살처럼 무의미하게 죽느니 ‘나 자신만이 스스로를 살해할 수 있다’는 결론, 그것이 ‘고귀한 자 나름의 방식대로 죽어야 할 권리’를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나는 책을 덮으려 하였다. 하지만 나카지마의 말 한마디가 걸렸다(‘그 여자는 강철처럼 강한 여자야. 자살 따위를 할 여자가 아니란 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소설의 마지막 세 페이지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결국은 ‘사랑’이다. 그녀는 사랑을 두려워한다고 편지에 적었지만 나카지마의 말처럼 그녀가 한 것은 사랑이었다. 전에는 이 세상 전부를 원했지만 이제는 영국더기에 김해연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을 원한다는 말. 그러기에 이정희는 더 이상 박길룡을 따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혁명가가 아닌, ‘여자로서’ 죽었다. 모든 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났다. 백양나무에 새긴 ‘사랑’이라는 글자처럼.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