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아닌 ‘만남’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일반부문 다른 서평들

‘법’이 아닌 ‘만남’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최현도


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난장이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서울에 집을 가지지 못한 나는 자그마한 자취방에서 머무르면서 방의 계약이 끝나갈 때 마다 다음에 살아야 할 공간을 걱정해야 했다. 불규칙한 수입과 달리 월세와 생활비는 줄어들 줄 몰랐기에 나는 언제나 아르바이트를 새로 시작할 준비를 해야 했다. 게다가 얼마 전 부터는 서울 전역에서 재개발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주변의 월세 가격은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가격만큼이나 나도 주인의 눈치를 힐끔힐끔 봐야 했다.

평범하기 이를 때 없는 내가 서울살이를 하면서 부딪히는 일상은 70년대를 살아간 난장이 가족이 겪었던 것과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나마 아직은 젊은 그리고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그리고 일에 지친 몸 뉘일 공간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난장이 가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벽돌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쌓아 올려 만들었던 낙원구 행복동의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분노와 절망이라는 단어로 그들의 서러움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난장이 가족에게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일들 가운데 불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과 대립하고 있었던 ‘거인’은 모든 일들을 합법적으로 진행시켜 나갔다. 그들은 난장이 가족을 식사 도중에 길거리로 몰아냈지만, ‘법’에 따르면 이것은 온전히 난장이 가족의 잘못이다. 그들은 재개발을 하고자 법에서 정해진 바에 따라 난장이 가족에게 미리 공지를 주었고 얼마의 보상금도 손에 쥐어 주었다. 난장이 가족 다섯 식구는 절망감에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전쟁’과 같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전쟁의 시기에 법은 지켜지지 않지만 난장이가 사는 세상은 철저히 그리고 엄격하게 법이 집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갈등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법’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법이란 신기한 존재다. 이것은 다수 사회 구성원의 합의 아래에서 만들어 졌지만 정작 우리 자신이 법을 만드는데 직접 참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를 대변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법의 내용을 만들고 고쳐 나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은 분명 편리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을 때 시간적인 면에서나 비용적인 면에서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학에서 강조하는 ‘거래비용의 감소’ 측면에서 봤을 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든 이해당사자를 만나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고쳐나가는 기나긴 과정을 반복했어야 할 테니 말이다.

세상은 난장이 가족이 살 때나 지금이나 효율성을 신성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 효율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세상에서 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다. 법에 따라 문제를 무미건조하게 해결해 나간다면 우리는 불편하게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할 이유도 없을 것이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도 난장이와 거인은 서로 만나야할 이유가 없었다. 갈등은 그 둘 사이에서 만들어 졌지만, 그들 사이에는 수많은 법들이 놓여 있었고 법은 그들을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난장이를 만나지 않은 거인은 그들의 눈물과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은강그룹 회장의 아들 경훈처럼 난장이들이 자신을 사납게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뿐이었다.

이렇게 ‘효율성’이 만들어놓은 지금의 세상에서는 적막함이 느껴진다. 법은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사이의 관계는 단절시키고 말았다. 법에 따라 사람사이의 갈등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한쪽은 웃을 수 있겠지만 다른 한 쪽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쪽은 그들 삶의 전부를 그리고 살아갈 희망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난장이 가족이 집을 잃는 과정 역시 법과 효율성이 가져온 비극이다. 거인은 난장이 가족의 집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그들을 직접 대면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법의 이름으로난장이 가족에게 경고장을 보냈을 뿐이다.

법이 일상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난장이는 달나라를 꿈꾼다. 달나라로 가기 위해 난장이는 공장 굴뚝에 올랐고 결국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난장이가 그토록 원했던 달나라에서 법은 존재의 가치가 없었다. 그곳에서는 모두들 자신의 이성을 통해 삶을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달나라는 사랑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더 많이 가진 자들도 없는 이들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있는 자들은 없는 이들의 것을 강탈하면서까지 물질적 욕구를 채우지 않는다. 물론 난장이가 꿈꾼 달나라에서도 사랑이 없는 이들을 제재하기 위한 법은 필요했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것에 머물러야 했다. 난장이가 꿈꾼 달나라는 독일 하스트로 호수 근처에 있는 릴리푸트읍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진다. 이곳은 난장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어려움도 없는 이상적인 곳이다. 은강도시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억압과 폭력을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것이 난장이에 맞추어져 있는 이곳은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꿈꿀 수 없는 곳이다. 릴리푸트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마을 구성원 모두가 모여앉아 대화와 논쟁을 거치는 지난한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결국 거인나라에 비해 합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복잡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이것은 마을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효율적인 세상이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갈등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불가피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법이 모든 것을 판단하여 주는 세상에서 행복에 대한 희망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면서 인간보다는 재산에 대한 권리가 우선시 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법에 의한 갈등 해결은 권력이 있고 돈이 있는 자들에게 정당성마저 부여해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난장이들에게는 더 큰 아픔만이 남을 뿐이다. 반대편에 서 있는 거인들 역시 행복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은강그룹의 일가족 한명은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에 의해 불행히 살해당하였고, 회장의 아들 경훈도 왠지 모를 불안감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법이 지배하는 세상이 가져다 준 불행한 결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인생이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만든 법에 의해 결정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일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아 삶을 꾸려나가며,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세상은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만남과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주고 이해해줄 수 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난장이와 거인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판된 지 30년이 넘었다. 그렇지만 용산참사에서 보듯이 소설 속 난장이 가족이 겪어야 했던 슬픈 이야기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법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다. 난장이 가족이 집을 잃으면서 그리고 영수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면서 그들이 대면한 것은 구청에서의 철거 계고장과 법정에서의 법관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거인들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법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은 그만큼 차가우며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법에 의해 자신의 문제가 수동적으로 처리되는 상황은 이성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믿어지는 현대사회의 모순을 들어낸다. 지금 우리는 마땅히 가져야 할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상처가 깊어지고 모순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법이 우리의 삶을 간섭하는 지금의 상황에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서로를 가로막은 법을 치워버리고 우리는 만나야 한다. 만나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사치가 아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