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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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조은아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이나 논문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도 그런 저작들의 일부이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는 가족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벌레로 변신해 버리자 가족들은 그를 외면한다.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창출해 내지 못하는 ‘그레고리’는 그의 가족들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초기 산업 자본가들이 기계를 쉴 새 없이 가동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처럼 오늘날의 사람들도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자신의 몸을 혹사시킨다. ‘변신’에서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했다는 것은 현대인이 벌레처럼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벌레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인간과는 다르게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일정한 자극이 주어지면 그에 따르는 일정한 반응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왼쪽 뺨을 맞았을 때, 자신도 상대방을 때릴 수 있는가 하면 오른쪽 뺨을 내어줄 수도 있다. 또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수도 있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나가버릴 수도 있다. 사람마다 그 반응이 다르며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고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벌레의 경우에는 그 결과를 상당 부분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당개구리는 천적을 만났을 때 몸을 뒤집어서 붉은 배를 보여준다. 자신에게 독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서 천적의 공격을 피하려는 방어수단인 것이다. 이런 방어수단은 그 동물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사용하리라 기대할 수 있는 결과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생했고 발전해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원동력, 내적 속성을 이해할 때 그 문제점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란 책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알아보는 데 적합했다. 구체적인 예를 적절하게 들어 이해를 돕고 내용을 재미있게 이끌어 나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본주의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양분으로 자랐다는 것이다. 경제에 관해 무지했던 나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한 근거를 그 당시의 자본주의 구조에서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가 발전해 온 과정에서도 매우 불합리하고 비도덕적인 원리가 작용되어 왔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던 자본의 축적은 너무나도 악랄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납치해서 그들을 물건처럼 사고 판 돈이 거대 자본을 형성했던 것이다.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과 똑 같은 인간이 아닌 자신에게 속해있는 재화처럼 간주했다니 분노가 치민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에도 흑인 노예 매매가 존재했고 오래 전부터 지배 계급이 하층민들을 노예나 농로로 부려먹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디즈레일리의 노예 무역에 적극 지원하고 심지어 노예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예수호’라는 명칭을 달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오리발을 내미는 그들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기가 막혔다. 혁명이라 불린 운동도 그 실상을 헤쳐보니 엉터리였다. 부르주아지는 귀족들을 치기 위해 농민들을 이용하고서는 목적을 달성한 후 그들을 매몰차게 내팽개쳤다. 실제 전투를 행했던 농민들은 그들이 바꿔보고자 했던 그 지겨운 관습, 즉 자신이 생산한 것을 눈 앞에서 뺏기는 경험을 또 다시 겪어야 했다. 종교개혁이나 십자군 운동도 성스러운 이름으로 채색되었지만 실상은 경제적 이익을 위한 치졸한 싸움에 불과했다. 마르틴 루터는 천민의 폭동을 인정하느니 악한 정부가 존속하는 것이 낫다는 발언을 했다. 그는 교회가 강요하는 십일조나 부담금으로 고통 받는 농민들을 가련히 여겨서가 아니라 교회가 가진 토지와 재산이 탐이 났던 것이다. 상인들이 일으킨 혁명도 구호로는 자유를 외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유를 원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주는 이점을 추구했던 것이라고 한다. 마르크스는 생산 방식 등을 결정하는 경제 구조가 가치, 이념, 규범을 이루는 상부구조를 형성한다고 했는데 위의 사례들을 보면 그의 말이 타당한 것 같다. 대개 사람들은 눈 앞의 이익에 현혹된다. 평등이나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직접적 이익을 얻기 위해 규제를 철폐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규제를 철폐로 인해 얻는 이익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시킨 것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층민들의 벗이 되었어야 할 교회가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농노를 해방시키는 것에 가장 거세게 반발했다는 점도 힘 있는 계급의 위선을 보여준다. 종교적 교리가 그들을 포함한 지배 계급의 이익을 대변했다는 것을 보면 종교 자체는 어쩔지 몰라도 종교로 인해 권력을 얻은 단체는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사업적 관계에서는 냉혹한 잣대를 적용하는 현대에 종교적 교리가 경제적인 영역에도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중세 시대의 경제 개념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예전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을 때의 방식을 화폐 제도가 도입된 후에도 적용시켰다. 중세에는 자신이 투자한 노동력과 그 시간만큼 보상 받기를 원했지 자신이 투자한 가치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때에도 이자를 원하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그야말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시대이다. 그런데 상품의 가치가 그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자된 노동력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오늘날의 상품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 동안 수요 공급 법칙에 의거한 상품의 가격 조정이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어쩔 때는 은근히 그 결과 만들어진 가격에 불만을 품어본 적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기 있는 제품을 사거나 경매에 입찰된 상품을 살 때, 사람들의 수요가 많다는 이유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가격보다 가격이 오르면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다. 복잡한 상황하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수요 공급 법칙에 의한 자동적인 가격 조정이 효율적이며 의도적인 개입을 배제했기 때문에 분쟁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바로 이 수요 공급 법칙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에 독점과 담합이 소비자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상품의 가치가 그 상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처음에 사람들이 기근이 들어 포도의 생산이 줄어들었을 때 포도주의 가격이 상승하는 것을 부자연스럽고 특별한 상황으로 보았던 것이 이해가 된다. 토지가 보유하는 대상에서 소유하는 대상으로 바뀐 것도 흥미롭다. 요즈음에는 땅을 자유롭게 사고 파는 것이 일상화되었지만 중세 시대에는 봉건 영주도, 국왕도 땅을 보유했지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나는 이때의 개념이 더 적절하고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생산해 낸 것도 아닌 토지를 자기 마음대로 매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크나큰 오산이요, 오만이다. 토지를 보유한다는 개념이 사회를 지배했을 때에는 그 누구도 토지를 함부로 손상시키거나 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토지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환경을 파괴시키고 땅을 투기 대상화하여 문제가 일어난다. 유럽인들에 의해 학살 당했던 인디언들의 가르침을 존중할 줄 알았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을 친구로 생각했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잠깐 동안 자연을 보호 또는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미 토지가 소유의 일부로 자리잡은 이 때에 토지를 보유하는 개념이 되살아날 수는 없는가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다.

마르크스가 소외론에 대해 말하면서 노동자들이 생산물, 생산과정, 노동하는 자신, 그리고 다른 동료 노동자들로부터 소외 당하고 있다고 말하였을 때 그 뜻을 정확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어렴풋이 뜻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노동력을 판다는 것의 의미를 숙고하게 되면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현대의 모든 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임금 노동자들이 불행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TV나 책에서 임금 노동자들을 고용주들에게 얽매인 부자유스러운 존재로 그리기는 했지만 그들도 결국 자신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잘못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을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잘못 판단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임금 노동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느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팔고 그 결과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생산수단 소유 여부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구분했던 이유는 생산 수단을 소유했을 때 비로소 자신을 위해 노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의 의지로 일을 하고 완성된 제품을 팔 수 있다. 그러나 임금 노동자는 고용주가 정한 규칙에 따라 일을 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판다. 고용주에게 있어 노동자의 노동력은 완제품과 마찬가지로 가치를 창출해 낼 일종의 상품에 불과하다. 노동자는 완성된 제품에는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이 우스꽝스럽지만 아주 적절하고 명확하게 보여준 바 있듯, 기계의 부속처럼 오로지 제품을 생산해 내는 일부 과정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노동자가 생산물로부터, 더 나아가 노동하는 자신으로부터 소외 당하게 된 것이다. 장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노동과정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일에 애착을 가지고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의미에서 노동하는 것도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지만, 이바지의 의미가 아닌 고용주를 위해 일을 한다는 종속의 의미는 그 사람의 의욕을 꺾게 될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적시에 포착하고 그 기회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성공했다. 몇몇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기보전의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견뎌내기도 했다. 변화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만 변화하고 있으므로 그 자신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더욱 어렵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과정이 피로 얼룩진 추잡한 과정이었다고는 해도 시장 규모가 확대되고 새로운 경제 이론을 창출하여 그 현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의의가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르나 변화에 재깍재깍 반응한다면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게 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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