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더 ‘나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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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더 ‘나쁠’지도 모릅니다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강다임
장하준 선생님께
저는 한국에 사는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2010년 1월 1일이 머지않았는데, 그때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이 됩니다. 예전 같으면 가정을 꾸릴 생각도 해볼 법한 많은 나이이지만 졸업 후에 취업 계획도 없는데다 학비도 대부분 부모님께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리고 철도 없다는 말을 들어도 핑계 대기가 민망합니다.
그나마 제가 ‘퇴행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오직 제 작은 정의감 때문이지요. 20대의 정치적 보수화가 우려된다는 말이 많습니다만, 광우병 문제로 불거진 촛불시위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참여하였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정치를 오직 진보-보수의 극으로 나누고, 다양성이란 그 둘을 섞는 비율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관점을 저는 매우 편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통치 시기와 미군정 시기, 군사 독재 정부를 거치며 ‘발전’해 온 한국의 역사를 생각해 보신다면, 제가 저 자신의 정의감을 소위 ‘진보진영’의 편에 섬으로써 확인하려 했던 까닭도 충분히 짐작하시겠지요). 아무튼, 실은 위에 적은 내용 모두가 제 소개이기도 하고 선생님의 책, 『나쁜 사마리아인』을 읽게 된 까닭이기도 합니다. 듣자니, 이 책은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경제적 현실을 꿰뚫어볼 수 있는 새로운 관점과 여기에서 연역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더군요. 게다가 국방부에 의해 불온도서로 지정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렇게 예전부터 선생님의 책을 읽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서평대회가 있어 마음을 먹고 앉아 찬찬히 정독해 보았습니다.
책을 읽은 소감 가운데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의아함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로서는 국방부가 이 책을 왜 불온도서로 선정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책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례가 나오지만, 간단히 박정희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제가 너무 단순화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장 명백한 기준 중 하나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생님의 책에는 이런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지만, 선생님께서도 박정희가 일반적인 한국의 정치 담론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분명히 알고 계실 테니까요.
사실, 실제로 박정희는 자신의 역사적 행보로 기억되기보다도 정치적 수사(rhetoric)로써 수없이 재활용되는 인물이지요. 즉, 그는 “민주주의를 희생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사람”의 상징으로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를 두고 저주에서부터 찬양까지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기는 하지만, 스펙트럼의 존재 자체가 이처럼 피상적인 박정희 알레고리를 전제해야만 성립하는 것이지요. 사족입니다만, 지금의 한국은 한 대통령의 재임 기간을 평가하기 위해, 아무 알맹이 없는 “배부른 돼지냐, 배고픈 소크라테스냐”의 ‘철학적’인 질문까지 던져야 하는 나라가 아닙니까. 그에 대한 실증적 탐구는 일파의 금지와 그 반대파의 감정적 대응으로 인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고, 설령 누군가가 학문적인 연구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에서 독해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왜곡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피상적인 탁상공론만 이어지는 것이 정상화되고 있지요.
아무튼 박정희에 대한 이런 잣대에서 보았을 때, 현 국방부는 분명히 박정희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호적’이라는 함은, 물론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일부 희생하기는 했어도 경제를 살린 영웅이라는 식의 수사를 전제하는 것이지요.
국방부에서 선생님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인정하기 전에 한 번 읽어보기라도 했는지 의아해진 이유는, 선생님의 책이 그들의 주장과 결정적으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경제적 성과에 대한 평가 측면에 국한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책에서 포스코의 설립, 특정 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 지원, 외화에 대한 강력한 통제, 다양한 국영기업의 운영 등 여러 사례를 들어 6, 70년대 정부주도형 경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계셨거든요. 사실, 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물질적 · 정신적 자유를 보장해 줄 정치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의 적’이라 흔히 평가되는 박정희에 대해서는, 그가 이룩했던 경제적 성과를 인정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네, 감정적으로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난 뒤에는, 그의 과는 과로 두더라도 공은 역시 공으로 인정하고 바로 평가해 줄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통해서 산업 발전 초기에 있어 정부의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생각해 보았거든요.
유치산업보호론 말입니다. 특히 진규의 예시가 매우 설득력 있었습니다. 예,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을 종교처럼 맹종하는 현대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자주 능력의 문제를 잊어버립니다. 마치 머리에 총을 겨누거나 수천억 원의 보상금을 건다면 열댓 살짜리 소매치기가 제 능력으로 뇌수술을 성공시킬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요. 그러나 무자비한 무한경쟁 시장에 던져 넣기 전에, 우리는 아직 새싹 단계에 있는 산업들을 잘 가꾸어 보호할 필요가 있겠더군요. 선생님이 방대하게 제시해 주신 여러 역사적 사례를 보니, 과연 신자유주의의 신화가 포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현대의 ‘부자 나라’들은 발전 초기에 자유 무역과 거리가 먼 정책들을 썼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유럽 각국의 절대주의 왕정 시대의 번영을 배우면서 분명히 프랑스의 콜베르와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에 관한 내용을 읽었거든요. 그런데 경제학 시간에는 몰역사적인 그래프들을 수없이 그리면서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에 대한 광신적인 숭배를 터득했고, 수많은 시험을 치르면서 그것들을 진리라고 학습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둘 사이의 괴리가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신자유주의냐 케인즈 경제학이냐의 토론은 늘, 영원히 증명되지 않을 형이상학적 논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책에서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상을 몇 년 치를 것인가를 놓고 토론하던 예송에 대해 실용적 가치가 거의 없는 논쟁이라는 언급을 하신 적이 있지요? 저한테는 현대의 경제학 논쟁이 그렇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선생님의 책을 읽기 전까지의 생각입니다. 지금은 선생님께서 책을 통해 주장하셨던 내용, 즉, 경제가 어느 정도 발전할 때까지 경기장을 가난한 나라들에 유리하게 기울여 놓고, 국가가 충분히 개입해야 한다는 경제 정책에 매우 공감합니다. 역사를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유치산업론에 따라 강력한 국가주도의 경제체제를 구축했던 박정희에 대해서도, 적어도 그가 거둔 경제적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만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통해 제 생각을 여기까지 바꾸어 놓으셨으니, 오히려 소위 보수단체들에서 교수님께 상이라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국방부도 그 ‘보수단체’ 중 하나라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사실 저는 국방부에서 선생님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짐작이 저를 두렵게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일부 희생하기는 했어도 경제를 살린 영웅이다.”라고요. 그런데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박정희는 독재자였다(직접적으로 이런 언급은 없으셨지만, 독재와 경제적 발전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대목에서 이러한 내용이 암시되었습니다).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선생님, 사실 저들의 말과 선생님의 말은, 얼핏 보기에는 같은 것처럼 보여도 실은 정반대의 진술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은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사이에 부정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식의 저들의 전제 내지 암시를 받아들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선생님은 박정희가 경제를 살렸기에 그가 영웅이라는 식의 언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사이에 상관관계를 지어 두는 것만큼 강력한 무기가 그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정의 상관관계라도 마찬가지이지요.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경제도 성장한다.”는 주장은, 살짝 비틀어 뒤집으면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굳이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러한 주장은 민주주의를 결국 자본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 놓으셨지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정말이지 강력하고 통쾌한 논리였습니다.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부정부패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나, 그와는 별개로 부정부패는 도덕적으로 근절해야 한다고 쓰셨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분리를 가장 경계했던 것인 듯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이유만으로 박정희가 영웅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제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입니다. 저들은 선생님께서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를 충분히 인정하고 계신데도 저들이 선생님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만일 그 까닭이, 제가 위에서 쓴 것과 같은 선생님의 ‘분리’를 그들이 경계하기 때문이라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들이 경계하는 것이 민주주의 자체라는 뜻이 되는데 말입니다. 경제 발전의 저해가 아니고 말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사실상 형평성을 희생하여 파이를 먼저 키우자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권력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적 선배들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민주주의에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 일반에 대한 평판을 깎아내리는 방법을 쓰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촘스키 교수의 말이 옳았던 걸까요? 선생님의 책이 불온서적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촘스키 교수가 국방부를 “자유와 민주주의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부서(Ministry of Defense against Freedom and Democracy)”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선생님.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로서는 선생님께서 너무 순진하셨던 게 아닌지 우려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쓰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선생님의 생각보다 훨씬 더 나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말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주는 것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탐욕스럽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일로 엄청난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순응주의자가 되는 편이 훨씬 쉽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잘못된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저도 어느 정도는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이 굳이 ‘나쁘지’는 않더라도, 그들은, 아니 저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들은 많은 경우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사회에 확정된 구조가 있고, 이 구조의 상부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마따나 ‘탐욕스럽고 편협한’ 사람들일 경우에는, 또는 단순히 무지하거나 남들의 사정까지 일일이 헤아릴 정도로 사려가 깊은 사람들이 아닐 경우에는, 또는 우연히 구조의 상부에 위치하게 되었을 뿐 구조 자체에 대한 통찰이 없는 부품 같은 개인일 경우에는, 구조가 악한 채로 영속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구조 하에서 대다수의 ‘선한’ 사마리아인들은 구조의 악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더 큰 문제이지요.
선생님의 책이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사건만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군 법무관 몇 사람이 이 문제를 가지고 헌법소원을 넣었는데, 결국 파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법고시 패스와 법관이라는 지위가 한국에서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단지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선생님, 저도 선생님 말씀대로, 사람들이 대체로 근본이 선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근본이 선한 것만으로는 구조적 문제, 경제구조의 문제를 포함한 모든 차원의 구조적 문제가 결코 개선되지 못합니다. 구조를 개혁할 수 있는 개인은 자신의 많은 것을 비용으로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뿐입니다. 물론 저는 문화적 각성으로서 경제가 성장하는 구조가 창출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런 이데올로기적 광고가 순진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인 변화를 낳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각성이라고, 저는 끝내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러한 각성이 없이 진행된 경제성장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진실을 알리는 것은 물론 그 각성의 시작입니다만 저는 그것으로 변화가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은 끝없는 투쟁입니다. 그리고 사회 외부를 향하는 투쟁이기 이전에 자신을 향한 투쟁이어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책에 명품 가방과 짝퉁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즉, 어차피 짝퉁의 수요자들은 명품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선진국들이 짝퉁 제품을 단속하지 않더라도 결국 선진국의 메이커 회사들이 손해를 볼 리는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명품이 성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특권의식으로 자신의 공허함을 포장하고, 스스로 대단한 인간이 된 것인 양 행세하고 싶어 합니다.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난 이후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경향입니다. 한국에 “시티홀”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는데, 그 등장인물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권력을 원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딱 하나야. 남용하고 싶어서라고.” 선생님, 명품 메이커들은 결코 짝퉁의 등장을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순수한 이윤동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굶주림과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 때문에 경제 발전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러한 상태만 가정하여 경제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낸다면,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움직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론 밖으로 흘러내리게 됩니다. 한국 사회에 팽배한 물질주의적 경향을 생각해 보면 이 문제점은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이 나쁘지 않게 행동했던 적이 있다며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사례로 드신 때가 바로 마셜 플랜이 시행되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우수한 경제정책들이 시행되던 과거 시기, 특히 열강들이 발전하던 시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는 각 민족국가의 경제가 팽창하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보호무역주의의 갈등이 고조되고 몇몇 사학자들은 이것을 세계대전 발발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합니다. 전쟁이, 아주 많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목도했던 영국 내의 끔찍한 빈부격차와 노동력 착취도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나던 일입니다. 선생님, 저는 당시의 자본가들이 먹고 살기 급급하여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국주의적 팽창과 노동력 착취를 지속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이윤을 위해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유인은 권력과 지배욕이었습니다. 그러한 욕망은 다른 이들의 파멸을 꿈꾸는 것입니다, 공존을 위한 해결책이 통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제가 인격으로서의 자본가 개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들도 구조의 부품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낫지 않으면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면, 당시의 노동자 한 사람을 선발하여 자본가와 입장을 바꾸게 했더라도 그가 자본가보다 덜 ‘탐욕스러운’ 일을 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구조적인 것으로 돌린다면 그 또한 무책임한 면피가 될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모든 구조가 바뀌어 왔다는 것입니다. 유물론과 관념론과 그 절충 가운데 무엇이 맞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조가 변동할 때 반드시 강한 개인과 순교자들이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구조 이상을 볼 수 있는 사람들만이 구조를 바꿀 수 있었고, 적어도 새로이 출현할 구조를 예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자기 안에 기생하고 있는 구조부터 먼저, 뿌리까지 혁파해야 하지 않을까요? 선생님의 책에 적용하여 본다면, 우리는 먼저 필요한 만큼만 욕망하는 개인, 남들에 대한 지배욕과 과시욕 및 여기에서 비롯되는 허허한 자존감에 의존하지 않는 개인들이 다수인 사회를 만드는 데에도, 만만치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살고 계시는 유럽은 사회복지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다든지, 여하의 다른 이유로 사람들이 이미 그런 끝없는 모더니즘의 욕망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이 한국 사회는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선생님, 저는 조용히 혁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서 눈에 보이고 먹을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혁명은 단순히 진실을 아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실을 붙들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하나이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튼튼한 어깨를 기르는 것이 또 하나입니다.
선생님이 쓰신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제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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