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학부생부문 3등작
‘거대한 전환’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조홍진
왜 '거대한 전환'인가
바야흐로 미국발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의 위기 이후 1년가량이 지났다. 작년 말만 하더라도 세상을 뒤덮던 세계경제의 위기 담론은 이제 ‘바닥을 쳤다’라는 낙관론과 ‘더블딥’을 우려해야 한다는 신중론이 다투는 단계로 넘어갔다. 위기 대두 당시만 하더라도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의 주요 테제인 ‘더 이상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는 한국 사회에서 반짝 대두하는 듯 하더니 지난 6월, 홍기빈에 의해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된 이후 별다른 반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폴라니가 잠시나마 주목된 이유는 기존의 주요 경제주체로 여겨졌던 ‘정부(국가)’와 ‘시장’이 아닌 ‘사회the Social’라는 제 3의 주체를 강조한 것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탓이다. 그러나 전술했다시피 폴라니의 주장은 잠시 주목을 받은 뒤 다시 잠잠해졌고, 과연 그가 강조하였던 ‘사회’란 무엇인지, 19세기 영국 사회를 중심으로 등장했던 ‘자기조정시장self-regulating market’이 어떻게 전세계적인 파멸적 귀결인 ‘거대한 전환’을 낳았는지 등에 대해 ‘후발산업자본주의국가’인 한국에서의 검토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폴라니의 이론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옳다’라고 입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경제주의’(혹은 ‘먹고사니즘’)가 사회 전반을 장악한 현실에서 그 파국적 종말을 반세기 전에 미리 경고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탄생하면서부터 ‘도덕’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내버리고 ‘경제’라는 근대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던 정권이 기득권층의 지지와 협력을 등에 업고 갈수록 노골적으로 언론을 장악하고 인권을 탄압하며 민주주의를 압살하려 드는 오늘날 한국에서 경제를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와 정치의 관계를 파헤치고, 그 최악의 결과물인 ‘파시즘’을 경고하는 폴라니의 논지는 충분한 시의성과 적실성을 갖추어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럼 이제부터 폴라니의 주장을 검토해보자.
‘자기조정시장’의 등장에서부터 ‘거대한 전환’까지
폴라니의 독특한 개념 중 하나가 ‘자기조정시장’이다. ‘자본주의capitalism’대신 ‘시장 경제market economy’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그의 논지의 기저에 바로 이 자기조정시장이 자리한다. 자기조정시장은 쉽게 말해, ‘정부 등이 나서서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한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즉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작동한다’는 고전파 정치경제학, 즉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상을 ‘시장이 스스로 조정한다’는 말로 재풀이한 말이다. 그래서 이 자기조정시장 담론은 사회를 정치와 경제로 이분하고, 노동이나 토지 같은 사회의 실재를 시장 메커니즘 아래 종속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이 수요나 공급과 상호작용하도록 가격을 갖고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도록 상품화되고, 모든 시장들이 서로 연결되어 총체적 시장One Big Market을 형성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상품으로써 거래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생산 요소인 토지와 노동, 그리고 그 교환을 매개하는 화폐 역시 상품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노동 ‧ 토지 ‧ 화폐는 분명 상품이 아니다. 상품을 시장 판매를 위해 생산한 물건이라고 정의할 때, 인간의 활동을 가리키는 노동은 결코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상품일 수가 없다. 토지 역시 자연의 일부를 인간이 전유할 뿐이지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화폐는 은행이나 국가가 보증하는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지, 이 역시 생산물이 아니기에 상품이 아니다. 그런데 자기조정시장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상품 허구commodity fiction를 유지해야만 한다. 요소 시장이 형성되지 않으면 시장 체제 자체가 위협받게 되므로, 노동 ‧ 토지 ‧ 화폐는 상품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의 실체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시장경제라는 ‘사탄의 맷돌Satanic Mill’에 노출된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인간과 자연의 파괴, 그리고 더 나아가 이에 기반한 사회의 소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중추가 18세기 말을 기점으로 ‘상업’에서 ‘산업’으로 이동하면서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노동 ‧ 토지 ‧ 화폐의 지속적인 공급이 보다 중요해졌고, 이를 위해서는 이 세 가지는 언제든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이들의 조직 원리를 마치 상품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즉 시장의 형태로 바꾸어야만 했다. 즉, 인간 사회가 경제 체제의 부속물이 된 것이다. 결국, 19세기는 허구 상품을 보다 시장적으로 조직하려는 운동과 허구 상품에 대한 시장적 조직을 사회 차원에서 제한하고자 하는 운동, 즉 ‘이중적 운동double movement’의 세기가 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뒷받침한 담론이 바로 고전파 정치경제학이었다. 스미스, 맬서스, 리카도뿐만 아니라 타운센드, 벤담 등이 개입해 자기조정시장체제의 형성과 주도권 획득을 줄기차게 요구한 것이다. 실제로, 자기조정시장체제의 구호인 자유방임laissez-faire에는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처음 사용된 이후 약 두 세대 가량 별 내용이 없다가 1820년대 이후 고전파 정치경제학에 의해 자유노동 시장, 금본위제, 자유무역이라는 교리가 더해졌다. 그런데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 세 가지 교리는 일종의 ‘삼위일체’로써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거나, 모두가 동시에 쇠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로 영국 의회에서 1834년에는 수정 구빈법이, 1844년에는 필 은행법이, 1846년에는 곡물법 철폐 법안이 연달아 통과되었다.
그러나 자유방임은 결코 ‘자연적’이지 않았다. 자유방임은 국가의 강력한 ‘관료기구’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특히, 1830년대 들어 기존의 의회 입법 대신 정부의 행정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반면, 자유방임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들은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집단주의적 음모’라며 비난하기도 했으나,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 각지에서 서로 다른 (계급)집단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장경제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을 막고자 들고 일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는 ‘모함’에 지나지 않았다. “자유방임은 중앙 계획이 만들어낸 것이었지만, 중앙 계획은 중앙 계획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자기조정시장을 확립하려는 노력에 맞서 이중적 운동의 한 축을 형성한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은 특정 세력의 계획과는 전혀 무관했지만, 분명 존재했다. 예를 들어, 1795년 지주계급을 중심으로 노동의 상품화를 저지하기 위해 입안된 스피넘랜드 법과 19세기 중반 노동계급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오언주의 운동이나 차티스트 운동은 분명 주도세력도, 시기도 달랐지만 노동의 상품화와 그 부작용을 막기 위해 벌어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상품허구로부터 사회의 실체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은 토지와 화폐에서도 제각기 발생했다.
사실 자기조정시장체제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파괴되는 사회를 막아내고자 하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측면에만 집중하는 것 이상의 포괄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기존의 자유주의적 시각이나 맑스주의적 시각은 모두 경제를 기반으로 규정된 계급에 기대서만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을 설명하려 해왔다. 그러나 경제적 계급이익만으로는 자기보호운동의 등장 이유를 다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 경제학은 그 위세가 스러지지 않는다. 19세기 영국의 자기보호운동은 분명 특정 계급의 계급이익 투쟁이기보다는 사회 보편의 선을 희망하는 계급과 자신의 계급의 이익을 지키려는 계급의 우연한 일시적 협력이었다.
게다가, 시장경제체제의 폐해는 단순히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자체의 ‘불구화’와 ‘문화적 진공 상태’를 초래했다는 사실이었다.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을 부정하는 일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산업혁명 당시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가 발생하기는커녕 모두가 보편적인 경제적 혜택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보호운동이 등장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적 재난은 문화적 현상이지 인구 통계나 소득 수준 같은 경제적 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경제적 현상이 아니다. 특히, 산업혁명 시기에 벌어진 사회 제도의 붕괴는 그 제도에 기반해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다. 19세기 후반의 인도나 북미의 원주민, 20세기 초반의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초기 자본주의의 등장이 지역 공동체 및 사회와 구성원을 파멸시켰던 사례들은 19세기 초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를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공통적으로, 새로운 체제의 이식은 인간성의 파괴와 공동체의 ‘문화적 진공 상태’를 낳았던 것이다. 따라서 산업혁명을 단순히 물질주의적으로 재해석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주장은 사회문화적 파국이라는 현상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줄 뿐이다.
1879~1929년 동안 보호주의가 득세하면서 시장경제의 자기조정 기능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시장경제의 자기조정능력을 대변하는 사례로 제시되어왔던 미국은 사실 노동 ‧ 토지 ‧ 화폐가 무한정 제공되어 지탱되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자기조정시장체제가 들어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결국 미국에서도 생산 요소의 무제한적 공급이 사라지자 연방준비제도를 필두로 뉴딜정책과 같은 보호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이야말로 자기조정 시장에 사회적 보호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인 것이다.
한편,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 망가지면서부터 정치적 개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국제 경제에서는 국제 수지 악화로 자국의 통화 가치가 떨어졌을 때 대외 채무 지불을 중단해버리는 나라들이 등장할 경우 이를 무력으로 응징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폭력은 식민지를 세계시장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서도 활용되었다. 그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의 유토피아였던 자기조정시장체제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실이었다.
결국 자기조정시장체제는 내외에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차대전은 시장경제에 기반해 환상을 좇았던 19세기 문명이 결국 그 모순을 이겨내지 못하고 몰락해간다는 사실이 표출된 사례였다.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던 1920년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뒤, 세계는 점차 파시즘으로 덮여갔다. 시장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인간성과 자유 모두를 포기한 선택이었다. 그 파국 이후, 세계는 19세기 문명과의 완전한 이별을 의미하는 ‘거대한 전환’을 선택했다. 비로소 경제가 아닌 사회에 주목하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2009, ‘거대한 전환’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출발의 필요성
폴라니의 논지를 되새김질해보는 것은 곧 그 현실성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과연 폴라니의 주장은 시공간적 배경이 전혀 다른 한국의 현실에도 소구할 수 있을까. 지면의 제한이 있으니 몇 가지 지점에 한정하여 간략하게 따져보자.
먼저, 폴라니가 1879 - 1929년의 세계의 상황이라 묘사했던 ‘실업’ ‧ ‘계급 긴장’ ‧ ‘외환 가치 압력’ ‧ ‘제국주의 경쟁 행위’라는 본질이 실상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지적할 수 있다. 작년의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실업률은 지속적으로 상승해 가장 최근에 지난 1970년대의 ‘황금기’ 종말 이후 최악의 수준까지 치달았고, 자본주의의 고전적인 테마인 계급 갈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고, 외환가치 압력은 미국 강달러의 기반인 ‘글로벌 불균형’은 해결되지 않는 한편 중국 위안화는 항상 절상 압력에 놓여있고, 공식적인 제국주의가 종료된 오늘날에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자원 외교’를 앞세워 아프리카에 저개발국가들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특히 금융 세계화의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자기조정시장이라는 환상의 시장경제가 무너지기 이전부터 토지나 노동에 비한 화폐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었다. 다른 둘에 비해 ‘금’이라는 전세계적 매개물이 대변하는 화폐의 이동성은 너무도 명백했고, 화폐경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가 운위되고 있는 시점에서도 유효하다. ‘2차 세계화’의 시대에서 가장 ‘큰 판’은 역시나 ‘돈’을 놓고 벌어지고 있다.
한편, ‘자유 시장’을 내세운 자본주의가 작년을 기점으로 약간 고삐가 죄어지긴 했다고는 하나 여태껏 그 위세를 잃지 않고 있고, 한편으로는 보호주의를 고수하는 ‘이중적 운동’을 펼친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19세기 말 구미의 국민국가들이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보호무역을 펼치고, 식민지에는 시장경제를 강제했듯이, 오늘날 ‘자유무역’을 외치는 미국은 실상 다자주의보다는 NAFTA 등의 지역주의를 선호하고, 개별 국가와의 FTA를 체결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이 모든 문제들은 한국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미 지난 십여 년간의 정부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척된 결과, 한국은 세계 경제와의 깊은 연계성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작년 금융위기 때 입증되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탄압, 자원외교, 금융 세계화, FTA 등은 한국 정부의 정책 기조임을 언론에서 너무도 쉽게 수시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폴라니가 자기조정시장의 사회 지배를 분석하며 ‘거대한 전환’의 등장 이유로 꼽았던 것들이 현재의 한국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다 섬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사회를 지배하고, 이끌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정부를 포함한 한국 사회 전반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신드롬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자기조정시장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해준다. 결국, 19세기 문명이 파시즘이라는 파국을 맞은 뒤 ‘거대한 전환’에 돌입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은 ‘지금, 여기’서 보다 일찍 ‘거대한 전환’의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전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 여기’서 새롭게 출발을
유토피아가 ‘no + where’과 ‘now + here’의 의미를 모두 가진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됐다. 유토피아를 ‘지금, 여기’로 만드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그 차이를 낳을 뿐이다. 시장에 의한 사회의 지배라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유토피아는 결국 파시즘이라는 결과물만 남겨두고 ‘no + where’로 종결됐다. 하지만 그 망령은 20세기 말 다시 살아나 ‘지금, 여기’에 그 환상을 다시 강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거대한 전환’이라는 ‘오래된 미래’를 향해 다시 나아가야만 할까.
물론 당연히 그 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 ‘지금, 여기’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폴라니의 주장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폴라니가 자기조정시장의 허구성을 분석하기 이전에 인류학적 연구를 근거로 ‘상호성’, ‘재분배’, ‘자급자족’ 등의 비경제적 동기를 바탕으로 사회적 제도가 충분히 가능함을 보인바 있다. 물론 이를 오늘날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래 인류 역사상 모든 ‘전환’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실현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조정시장체제는 사회 내에 묻어 들어가 있던embedded 경제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성립했고, 이것의 종말 이후 자본주의는 ‘정부’에 주목한 케인즈주의를 따라 일시적인 ‘황금기’를 맛보았다. 따라서 ‘사회’를 복원하자는 폴라니의 주장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다. 정부와 시장이 잇달아 실패한 지금, 제3의 주체에 주목하는 것은 응당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폴라니의 ‘사회주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폴라니는 책 말미에서 인류가 시장경제의 환상에서 빠져나온 뒤 파시즘이란 악수를 피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의 사회주의는 결코 소련식의 현실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례로, “결코 파기할 수 없는 개개인들의 권리들은 최고의 권력들 앞에서도 법적으로 실효성을 가져야만 한다”며 개인의 자유의 보장을 최우선시 한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시장경제가 파괴하였던 인간성을 지키고 더 확장하는 길이라 본 것이다.
사회가 경제를 관장하는 형태의 산업 문명을 만들어가기란 분명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을 분석했던 시기에도 그러한 전환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런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제 노동 ‧ 토지 ‧ 화폐가 상품이라는 환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생산물들은 경쟁적 시장의 방식에 의해 거래되고 있지만, 이것이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허구적 상품들에게 본래의 성격을 되돌려주는 것은 사실 하나의 획일적인 활동이 아니다. 하나의 방식으로 상품 허구의 해체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야말로 자기조정시장이라는 환상과 같은 관점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상품 허구를 해체하여 사회 전반에서 시장의 자기조정기관이라는 성격을 벗겨냄으로써 새로운 복합 사회가 열릴 수 있다.
이는 한순간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라는 조건 외에 구체적인 계획이 짜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장의 완전무결성이 의심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사회적 기업’이 요청되는 오늘날 ‘거대한 전환’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은 그 막막함에 사회변혁의 꿈을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폴라니가 밝혔듯이, 자기조정시장 같은 하나의 획일적인 패러다임이야말로 환상적인 것이다.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국가와 시장의 이분법 안에 갇혀 도저한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에게 ‘사회’의 존재는 새로운 희망을 선사한다. ‘도덕 경제’나 ‘공동체주의’같은 과거의 사례들을 참고하여 새로운 사회와 공동체를 꿈꾼다면, ‘거대한 전환’은 ‘지금, 여기’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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