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 대한 해석의 현대적 가치
일반부문 1등작
예수에 대한 해석의 현대적 가치
김규항, 『예수전』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최성호
맑스는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했다. 그에게 종교는 현세의 사회적 문제를 내세의 보상을 통해 희석시키는 것으로서, 혁명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요소였다. 맑스는 노동자계급에게 종교의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종교라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선 종교의 종류가 너무 다양하다. 내세의 구원보다는 현세의 수양을 중시하는 종교도 있고, 내세의 구원을 강조하더라도 종교에 따라 그 방법이 다양하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역사상 벌어졌던 수많은 논쟁, 오늘날 볼 수 있는 수많은 기독교 분파들을 맑스의 해석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종교 또한 인간들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문화현상이기 때문에 맑스가 말한 대로 정치사회적 측면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맑스의 해석은 너무 협소하다. 종교와 사회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종교인들이 목표로 삼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 또한 너무도 다양하다.
한국의 역사에서도 기독교는 사회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왔다. 반공주의의 선두에 서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혐오와 우려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기독교 단체도 있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운명을 같이 했던 기독교 단체도 적지 않았다. 내세에 대한 구원, 이적에 대한 믿음으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성에 기반한 신앙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가진 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단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려고 노력하는 교단이 있다. 계층, 계급뿐만 아니라 타 종교, 타 문화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들이 갈등하면서 공존한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맑스와 같은 단순한 분석기준으로 온전히 분석해 낼 수 없다. ‘기독교적 가치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인가?’, ‘기독교적 이상사회란 무엇인가?’ 등 수많은 문제에 지점에 대한 다양한 답들이 이러한 차이를 유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중세에는 이런 충돌은 생명을 걸고 일어나는 충돌이었다. 가장 신성한 해석, 가장 진정한 해석을 해 내는 것이 신학자로서 살아남는 길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단으로 몰려 생존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오직 한 가지 해석만이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참신한 해석을 내놓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대는 다양한 해석이 공존할 수 있는 시대이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은 어떤 해석이든 일단 경청되고, 설득력이 있을 때에는 그 해석의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진정성을 내세우며 다양한 방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설득하며 자신의 해석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어떤 이는 사회혁명을 위하여 기독교를 폐기하고자 하며, 어떤 이는 사회혁명과 기독교혁명을 함께 이행하려고 한다. 기독교를 사회에서 다친 상처를 치유하는 독립체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전』에서 저자는 이러한 오늘날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한다. 사회주의자로서, 신학자로서 예수의 참 모습을 밝히고 예수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전하고자 한다.
저자가 전하는 진정한 예수는 사회적 문제와 종교적 구원을 함께 해결고자 한 분이다. 저자는 예수가 당시에 권력을 가진 계층,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계층이 독점적으로 향유하고 있던 종교와 신앙을 모든 사람에게 확대하려고 한 분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성경의 4대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성립되었다고 추정되는 「마르코복음」을 강독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마르코복음」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율법사들을 매우 강력하게 비판한다. 율법사들은 종교적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는 척도이며 천국으로 가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또한 율법의 의의를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율법에 어긋나는 여러 행위를 한다. 예컨대 모든 종류의 노동이 금지된 날에 이적을 행하고, 금식해야 하는 날에 가난한 자들과 빵을 나누어 먹기도 한다. 그리고 율법에만 얽매이는 율법사를 비판한다.
저자는 율법사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에서 사회경제적 메시지를 읽어낸다. 유월절에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시키며 살 수 있지만, 하루라도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은 율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자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기독교를 가진 자들만의 종교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진 자들끼리만 선민의식 속에서 우월감을 느끼며 하느님 안에서 안주할 수 있을 뿐이다. 저자는 이것을 ‘죄의식의 체제’라고 부른다. 가난한 자들에게 올바른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의식을 심어주는 체제라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율법사 비판을 기독교를 모든 이들을 위한 종교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각자가 처한 경제적 상황에 따라 신앙의 신실함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저자가 예수를 단순히 사회혁명가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구원을 주고자 했던 사람이지 사회경제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사회혁명을 희망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종교적 구원과 사회경제적 문제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종교적 구원을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분명히 알고 거기에 맞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설명은 오늘날 영적 해방과 정치적 해방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신앙의 문제는 재정적 상황과 늘 결부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가진 자들이 종교단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교단의 운영에 재정이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재정적 기여도가 신앙의 척도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인들은 그런 변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의 종교를 늘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많은 이들의 종교적 구원을 이끌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사회에 대한 감수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 실제로 사회문제에 적극 개입하지는 않더라도 지금 자신의 종교활동이 어떤 사회적 위치 속에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어야 올바른 종교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
예수는 율법사들, 선민의식에 휩싸여 있는 바리사이인들,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인들에 의해 유발된 문제들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저자는 예수의 행적 중 그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을 제시한다. 예수는 정치적 운동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종교적인 신앙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은 사회정치적 문제까지 모두 포괄해야 하며, 그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심지어 예수의 곁에 있던 제자들까지도 이런 예수의 뜻에 동조해주지 않는다.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고 심지어 예수를 밀고하기까지 한 것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한다. 함께 정치적 혁명을 하기를 바랐던 제자들은 예수가 철저히 종교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실망을 한다. 또한 예수는 인류 전체가 구원을 받기를 바랐던 것이지 이스라엘 민족만 구원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떠나간다.
아울러 많은 이들은 현실에서 신세계를 열어주기를 기대했지만, 예수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길을 제시할 뿐이다. 가난한 노파에게 남들보다 부자가 되도록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낸 두 랩이라는 금액의 가치를 조명해 줄 뿐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보잘 것 없게 만들고, 그 노파가 죄의식을 가지도록 만드는 모든 규범과 세력들을 비판한다. 부자든, 율법사든, 혁명가든 편을 가리지 않고 비판하면서 약자들의 신앙의 가치를 보호한다.
그래서 예수는 모든 세력들로부터 적대적인 시선을 받고, 모든 세력들의 암묵적 동의하에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예수는 자신의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이후 오늘날까지도 끊임없는 왜곡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상이 『예수전』에서 저자가 예수의 의미를 해석한 내용이다. 저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행적에서 오늘날 사회 운동을 성찰할 수 있는 요소를 끌어낸 것이 눈길을 끈다.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한 맑스와 달리, 저자는 진정한 기독교를 복원한다면 사회의 문제까지 함께 안고 갈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의 사회적 가치를 조명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해석은 다양한 해석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점이 다소 문제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해석을 다양한 해석 중 가장 우월한(정확한) 해석이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역할이 복잡한 것과 마찬가지로 경전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의미 또한 다양하다. 성경에서는 종교와 사회, 구원과 혁명에 관한 유의미한 해석을 끌어낼 수도 있지만, 메시아 혹은 개벽의 도래를 예고하는 예언자의 행적으로서 성경을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신성의 현현으로서 경전을 읽어볼 수도 있다. 성경은 그런 많은 함의를 복합적으로 담고 있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한다.
저자의 해석은 참신한 메시지를 많이 던져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른 여러 해석보다 우위에 있는 해석이 되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사회문제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지만 앞에서 말했듯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기록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예수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이 복음서가 4대 복음서 중 가장 초기에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예수의 실제 모습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르코복음」만을 중심으로 한 해석이 가장 사실적인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저자가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을 점검하지 않는 것은 다른 복음서들은 「마르코복음」보다 후대에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후대사람들의 각색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각색한 부분이 있더라도 각 복음서 속에는 예수의 메시지가 일정부분 들어가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비록 4대 복음서 중에서는 가장 최초로 편집된 것이라고 하지만 「마르코복음」 역시 각색이 들어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든 복음서는 각색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유의미한 메시지를 끌어내는 작업은 각각의 복음서에 대해서 동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마르코복음」만을 근거로 끌어낸 예수의 모습을 가장 정확한 예수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중,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한 참신한 해석정도로 『예수전』의 의의를 평가하고 싶다.
그렇다 해도 이 책의 시도를 낫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현대는 인간의 이성이 제시한 해석에 충분히 권위를 부여할 줄 아는 개방적 시대이다. 얼마나 성경을 정확하고 신성하게 이해했는가가 해석자의 역량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되지 않는다.
이 글은 이성에 입각해서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 냉철하게 사회를 분석하고 거기에서 종교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지침을 제시해 준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의미있는 시도이다. 다만 ‘이것이 예수다’가 아니라 ‘나는 예수를 이렇게 보고 싶다’라고 글을 써야 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현대는, 그 해석이 논리적이라면, 이런 용기있는 시도가 허용되는 이성의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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