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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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06학번 함혜선


내가 다녔던 여고의 3월 풍경이다. 2학년은 쉬는 시간마다 1학년 교실로 내려가 동아리를 홍보했다. 각 반에 서너 명씩 있는 예쁜 신입생들은 다른 동아리가 채가기 전에 첫날부터 찜했다. 교탁에 있는 출석부 사진을 보고 예쁜 아이를 확인하고 그 아이를 찾아가 쉬는 시간마다 설득했다. 예쁜 애 옆에 앉아있는 예쁘지 않은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억지로 엎드려 잠을 자거나 화장실을 갔다. 홍보 기간이 끝나고, 내가 속해 있던 동아리는 그 해 따라 신입생의 지원이 많지 않았다. 면접일, 압박면접을 끝내고 누구를 떨어뜨릴지 의논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다. 14명을 뽑아야 하는데 우리 동아리 수준에 맞는 외모를 가진 아이는 10명. 나머지 4명은 못생긴 애들 중 울며 겨자 먹기로 뽑아야 했따. 2학년 중 몇 명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이 골룸을, 이 올챙이를 동아리 후배로 받을 수 있는지. 이 아이가 내 마니또가 된다면 후배를 보는 기쁨이 얼마나 줄어들지. 동아리의 위상을 이렇게 깎아먹은 것에 대해 선배언니들의 얼굴은 어떻게 볼지. 후배들이 못 생겨서 2학년은 대성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교내 동아리의 수준은 구성원의 외모 수준이 말해줬다. 동아리 성격이 어떻든, 어떤 활동을 하는 동아리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지극히 평범한 일반고등학교였다. 만약 ‘재력’, ‘부모님의 직업’ 순으로 줄을 세워 동아리를 가입시켰다면 뉴스에라도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물질만능주의를 걱정하는 어른들의 우려는 100분 토론을 부르고, 동아리 철폐라는 대책을 들고 나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보다는 훨씬 순진하여 외모지상주의를 절대가치로 받아들였고, 이는 가십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비싼 커피를 마시면 된장녀 소리를 듣고 돈을 좇아 결혼하면 속물 소리를 듣지만 ‘예쁜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사회에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위트 있다는 칭찬을 듣는다. 우리 사회에서 외모는 절대선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줄여서 파반느)는 판타지 소설이다. 박민규는 소설에서 못생긴 그녀를 사랑하는 그를 창조했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를 네오 아담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못생긴 여자를 좋아하는 꽃미남, 이 책의 주인공 화자인 ‘그’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다.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나.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인 그녀를 보고 머릿속 요들송을 들었던 그가 서서히 그녀에게 빠져 들어가는 사랑이야기가 어색하지 않다. 여기에는 잘생기고 가정을 버린 아버지와 못 생기고 헌신적이었던 어머니라는 주인공의 가정사가 큰 몫을 했다. 외모지상주의의 희생양이었던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고 자란 그는 청소년기부터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흥분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못 생긴 그녀를 보고 연민을 갖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또한 소설은 사랑에 빠진 남성의 심리를 1인칭 시점에서 잘 고백하고 있다. 수화기 너머의 ‘여보세요’, 지극히 단순한 한마디 앞에서 기뻐하는 그의 모습. 그녀와의 통화를 위해 친구와 일찍 헤어져 집에 오는 모습은 분명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추녀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다른 시점을 사용했더라면 이 남자의 진심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소설에서 그녀는 충분히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다. 졸업한 상고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학생이었고 가족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자신에게 처해지는 불평등을 감내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했고, 그와의 데이트에서도 그를 저렴한 켄터키 치킨집으로 이끄는 사려 깊은 여자였다.

별다른 삼각관계 하나 없이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나타나는 작가의 말을 읽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이 이야기는 비현실적이고, 못 생긴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있을 수 없다고, 자기 자신도 그렇다고, 그리고 역시 우리도 그렇지 않느냐며 자신의 소설 속 이야기를 철저히 부정한다. 이 이야기에 문득 공감하게 된 나는 슬퍼진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그녀’가 결국 현실에선 ‘그’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못 생긴 사람들이 사랑 받지 못 하는 게 너무 당연한 우리에게 “그것이 당연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작가는 너무도 못 생긴 그녀가 일생 동안 감내해야 했던 차별을 통해 외모지상주의의 주소를 이야기 한다. ‘야 이 못난아.’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말은 여섯 살 때 들은 것이다. 그 전까지는 함께 어울려 놀았고, 그래서 모두가 동등할 것이라 짐작했을 세계에서 그녀는 최초로 ‘격리’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녀는 증언한다. 그 격리의 공간이 영원할 거란 사실을 몰랐었다고. 그렇게 ‘동등한 인간’이었던 그녀는, 순수한 장난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짐승인 아이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 일을 단지 어린 아이들에 국한해 죄책감을 피해 갈 독자를 위해 작가는 “물론 세상에는 아이들과 같은 정신연령을 지닌 어른들도 많습니다” 라는 말로 친절하게, ‘너도 북어지’ 지적해준다 또 ‘난 아니야, 난 저렇게 노골적인 친구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줘…가 서린 동조의 표정’을 느끼는 그녀의 증언을 통해 우리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가해자란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가해자들로 인한 고통의 역사의 결과로 그녀는 데이트를 할 때에도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고, 그가 그녀와 함께 다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까 걱정한다

외모지상주의는 사회적 문제로도 그 영향력을 뻗친다. 상고를 나온 그녀는 성적은 참 좋았지만, 외모가 보통이 되지 않아 취직에 번번히 실패했다. 운이 좋아 급히 전산업무가 가능한 졸업생을 필요로 한 백화점에 취직했으나 그 곳에서도 점차 밑으로 밀려나 아르바이트생들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 덕분에 백화점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세상에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는 만큼 외모지상주의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이는 걸 어떡하라고’, ‘이건 본능이야’. 박민규는 외모지상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합리화를 하는 사람들에게 문제의식을 가지도록 한다. 인간은 본능으로만 사는 동물이 아니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갖는다.

먼저, 작가는 “누군가에게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것은 분명 노력으로 극복이 가능한 부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는 그녀의 대사를 들어 외모지상주의는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라는, 심지어는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도 있어 ‘인간 계층화’라는 문제를 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왜 균등한 조건이 주어진 듯, 가르치고 노력을 요구했냐는 것입니다.”라며 스스로의 태생만을 평가 받아 왔다 말한다. 이는 계층은 없어졌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현대의 사고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또한, 외모지상주의는 그 무넺가 분명 있음에도 문제제기가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다른 문제들보다 더 큰 문제라고 말한다. 그녀는 장애인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도 많다고 고백한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들의 장애를 인정을 해주기 때문이다. “세상엔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도 많단다, 라고 말하며 사람들은 저의 어둠을 장애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저를 장애인으로 만들어왔습니다.” 남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고, 그 누구도 그녀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남과는 다른 취급을 받아야 했다. 나는 언젠가 한 TV 프로그램을 봤다. 8명의 여성의 패널로 나왔는데 7명의 여성을 소개하는 멘트는 ‘청순 미녀’, ‘섹시 미녀’ 등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여성은 못 생긴 코미디언이었다. MC는 한숨을 쉬더니 ‘뭐 정 갖다 붙일게 없어서요. 학벌미녀~’라며 그녀를 소개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선 복지기금이 있고 장애인을 위해선 장애수당이 있따. 차별 받는 성(性)을 위해선 쿼터제가 있다. 하지만 차별 받는 추녀, 추남을 위해선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다. 오늘자 신문에 ‘몸매 관리도 자기 능력’이라는 소리를 면접장에서 들은 한 여성의 인터뷰가 실렸다. 세상은 아직 외모 차별을 차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녀의 입을 빌어 타인의 얼굴을 공격하는 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한다. 그러고는 요한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그는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라 말한다. 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남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

요한은 그, 그녀의 친구로 파반느의 중심 인물로서 작가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크게 보아 그와 그녀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외모지상수의를 비판한다면, 요한의 개똥철학을 통해서는 한가지 더, 무한경쟁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무한경쟁 자본주의는 외모지상주의와 함께 파반느가 비판하는 또 하나의 사회문제이다. 나는 파반느를 비롯 우석훈의 『88만원 세대』와 같은 책들이 현재 서점에서 베스트셀러인 이유를 이 대목에서 찾는다. 스펙관리와 외모 관리, 현대인들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지만 우리는 88만원 세대이고 경쟁할수록 세상의 평균은 높아져 결국 제자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나’는 노예와 같은 삶을 자각한다.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 대학을 나와야 하고, 예뻐지기까지 해야 한다. 차를 사야 하고, 집을 사야 한다. 이런 내가, 대학을 가는 순간 세상의 평균은 또 한 치 높아진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이 순간 세상의 평균은 올라간다. 누군가를 뒤쫓는 순간에도 세상의 평균은 그만큼 올라간다. 나는 생각했었다. 누군가 누군가의 외모를 폄하하는 순간, 그 자신도 더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예쁜가? 그렇게 예뻐질 자신이… 있는 걸까? 사는 게 별건가 하는 순간 삶은 사라지는 것이고, 다들 이렇게 살잖아 하는 순간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할 세상이 펼쳐진다. 노예란 누구인가? 무언가에 붙들려 평생을 일하고 일해야 하는 인간이다.”

작가는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워 문제를 제기한다. “왕조의 쇠퇴와 몰락을 줄줄이 외게 하면서도 왜 이별을 겪거나 극복한 개인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는가. 남을 이기라고 말하기 전에 왜, 자신을 이기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왜 협력을 가르지지 않고 경쟁을 가르치는가. 성공이 아니면 실패라고, 왜 그토록 못을 박는가. 그토록 많은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왜이며, 그 조항들을 만드는 것은 누구 인가.” 그는 우리를 호도하려 하지 않고 주인공의 자각과 문제제기를 통해 독자들 스스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파반느가 찾은 외모지상주의와 무한경쟁주의 문제점의 해결잭은 ‘사랑’이다. 세기의 대표 추녀 그녀가 사랑에 빠지자 그에게 묻는다. ‘부끄럽지 않으세요?’ 요한은 이 질문을 그녀에게 힘이 생긴 것으로 해석한다. 외부의 압력에 맞선 내부의 압력으로 생긴 맥주 캔의 거품처럼 그녀에게도 비로소 세상에 맞설 만한 작은 힘이 생겼다. 이는 사랑이 인간에게 주는 힘이다.

요한은 ‘사랑’을 영혼이라는 필라멘트에 빛을 공급해주는 힘으로 봤다. 요한의 어머니는 보 기 드문 미인이었지만 그의 남편에게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하자 빚이 사라졌다. 작가의 사랑 예찬론은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강해져 인간은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로 나온다. 사람들은 경제력, 외모를 보고 결혼을 함에도 자기 최면이라도 하듯 이건 연애라고,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고는 결혼하고 나서 사랑이 식었다는 둥, 난 돈을 벌어다 주는 기계인가 하는 자각을 한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포장을 버리지 않는 이유에서 작가는 사랑이란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란 근거를 찾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영리활동을 하면서도 사랑을 하는 기분, 사랑을 받는 기분을 느끼고도 싶은 거라 한다.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모든 인간은 투병 중이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는 말로 인간이 사랑을 해야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한다. 사랑을 인생의 목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있었던 것 같다. 작가의 사랑 해결론도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을 했듯이 아마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를 먼저 바라는 마음일 것이라 짐작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열등감을 갖지 않을 수 있을 테고 그럼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에 의해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일 또한 없을 테고, 그러면 외모지상주의, 무한경쟁 자본주의에서 오는 폐해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란 논리 전개일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비록 ‘작가의 말’에서 박민규는, 못생긴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 했지만 이는 현재 그렇다는 거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이미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면 굳이 산고의 고통을 겪으며 파반느를 잉태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을 통해 문제제기를 하고, 사랑이라는 해결책을 가지고 나온 이유는 이 책을 통해 사회가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적어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만이라도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적 배경은 나, 그녀 그리고 요한이 일이 끝나면 항상 맥주와 켄터키 치킨을 먹는 치킨집이다. 영어를 잘 못하는 가게 주인은 HOF를 HOPE로 잘 못 표기한 간판을 달고 있다. 치킨집의 이 HOPE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계속 조명된다. 박민규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인 ‘그녀’가 굳이 독일까지 가지 않아도 한국에서도 취직을 하고, 행인의 놀림을 받지 않고, 사랑을 하는 그 날에 대한 희망. 누가 만들어 냈는지도 모를 기준에 목매며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을 깎아 내리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전구를 밝힐 수 있을 것이란 희망.

외모지상주의, 무한경쟁 자본주의의 폐해를 다룬 책, 영화들은 많다. 그 동안의 작품들은 주로 외모지상주의의 폐해, 차별을 보임으로써 수용자들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들로 하여금 더욱 외모 공포증을 갖게 했다. 외모 순으로 취업을 하는 실업계 고등학교 여학생들을 그린 영화는 물론 의도치 않았겠지만 ‘아. 못생기면 저렇게 치별을 받는구나. 저렇게 되면 안 되겠다’는 공포를 형성한다. 그 공포로 인해 자신의 못 생긴 부분을 싫어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못 생긴 것을 더욱 깎아 내리며 외모지상주의를 심화시키게 된다. 그에 반해 파반느는 추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외모지상주의의 비합리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추녀도 사랑할 수 있다. 추녀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는 건 우리들의 열등감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투쟁해야 할 가혹한 사회적 기준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불 꺼진 전구와도 같다. 외모, 재산을 보고 느끼는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그 감정으로는 전구가 켜질 수 없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며칠 동안 작가의 말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현실에서 그녀는 정말로 사랑할 수 없는 걸까? 며칠 동안 끙끙 고민하고 나서야 그들에겐 켄터키 지킨집의 HOPE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란 비록 사물,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드는 1차적 생각이 있을지라도 그 생각 후에 합리적인 2차적 사고를 하도록 연습하면 나중에는 동일한 사물, 사건을 보고 2차적 생각을 자동적으로 할 수 있는 동물이다. 끼어들기 차량을 보고 욕을 하던 사람이, 연습을 통해 ‘저 사람이 참 바쁜 일이 있나 보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희망을 가져본다. 더군다나 현재 성인기로 접어들고 있는 우리 세대는 계급 사회는 나쁘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누구나 똑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교육 받아온 세대가 아닌가. 나는 무한경쟁 사회의 일원이다. 비록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는 아니었지만 다른 누구보다는 확실히 못 생겼다는 것에 항상 눈물 흘렸고 자신의 몸매에 콤플렉스를 느껴 뚱뚱한 사람을 혐오했던 사춘기를 보냈다. 파반느는 그런 나의 사춘기에게 ‘괜찮아. 너의 잘못이 아니었어. 사회가 잘못되어 있고, 너는 단지 그것을 알기엔 너무 어렸을 뿐이야.’하며 등을 토닥인다. 파반느를 다 읽고 난 지금은 소설이 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힘’으로 남의 전구를 밝히기 보다는 나의 전구를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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